tvN <슈룹>의 한 장면.

tvN <슈룹>의 한 장면. ⓒ tvN

 
우산의 옛말을 드라마 제목으로 사용하는 tvN 사극 <슈룹>은 왕실 부모들의 자녀교육 열정을 다룬다. 왕자들의 학업을 위해 암투 이상의 경쟁을 벌이는 중전과 후궁들이 등장한다. 일반적인 사극에서 중전 자리를 향한, 혹은 임금의 관심을 얻기 위한 궁중 암투가 그려지는 것과 대조되는 장면이다.
 
15일 밤의 제1회 방송은 중전과 후궁들이 세자를 제외한 일반 왕자들의 학업 테스트를 참관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왕족 교육기관인 종학(宗學)으로 앞다퉈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이 스케치됐다. 오늘날의 학부모 참관 수업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제1회에 등장한 종학 학생들의 연령은 그리 높지 않다. 청년을 넘어서는 학생은 화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청소년 연령대가 제1회에 등장한 학생들의 평균 연령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종학 학생들의 연령대는 이보다 훨씬 다양했다. 제1회에서 학부모로 등장한 사람들과 비슷한 연령대도 이곳에서 공부했을 정도다.

드라마와 달랐던 실제 종학 풍경
 
 tvN <슈룹>의 한 장면.

tvN <슈룹>의 한 장면. ⓒ tvN

 
왕족 교육기관이 처음 생긴 것은 조선 세종 때다. 이 시대 기록을 살펴보면, 실제의 종학 풍경이 <슈룹> 제1회와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음력으로 세종 9년 9월 4일자(양력 1427년 9월 24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교육·의례·외교 등을 담당하는 예조는 서기 1년(한나라 건국 206주년) 중국 한나라에서 10만 명을 넘은 왕족들을 위한 교육제도가 시행된 사실을 예시하면서 조선에도 이런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예조는 각급 학교가 전국적으로 설치된 데 비해 종친 교육 기관이 없는 현실을 거론했다. "종친이 입학할 곳이 없어 교육할 방도가 없으니 참으로 불편합니다"라는 게 예조의 지적이었다. 그런 뒤 경복궁 동문 바깥을 지칭하면서 "바라옵건대 옛 제도에 의거해 건춘문 바깥에 학사를 별도로 건립하고 종친 자제가 나이가 8세가 되면 모두 배우러 들어가게 하시고"라고 건의했다. 이 건의는 세종의 재가를 받았다.
 
이때는 입학 연령이 8세였지만, 나중에는 상향됐다. 성종 때인 1485년 시행된 <경국대전>은 종학 입학 연령을 15세로 규정했다. 이 연령이 조선 후기에는 15~20세로 높아졌다가 15~30세로 높아졌다. 특정 나이를 입학 연령으로 지정하지 않고, 15세에서 20세 사이에 입학하면 된다는 식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여러 연령대가 종학에서 공부했다는 점은 세종의 왕명에서도 확인된다. 세종 25년 6월 17일자(1443년 7월 13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소학>과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 중에서 하나를 통과한 사람을 만 40세에 방학(放學)시킬 것을 명령했다.
 
놓아줄 방(放)이 들어가는 오늘날의 방학은 학교 수업을 한두 달 쉬는 것인 데 반해, 세종이 언급한 방학 개념은 오늘날의 졸업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달랐다. 세종은 50세가 되도록 <소학>과 사서 중 어느 한 과목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방학시키라고 명령했다. 난이도가 있는 사서는 물론이고 아동용 유학 교재인 <소학>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방학시키라고 지시한 것이다.
 
40세에 방학한 사람은 그 방학이 학력 인증이 될 수도 있지만, 50세에 방학한 사람은 그 방학이 정반대 기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이 사용한 방학 개념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졸업과 똑같은 게 아니었다.
 
16세기 유림들의 사표인 조광조를 가르친 스승이 김굉필이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수행자 자세로 연구하고 학생들 앞에서도 무릎 꿇고 강의한 김굉필은 <소학>을 일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는 학문의 기본에 충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소학동자였다.
 
김굉필처럼 소학을 연구하기로 치면, 나이 50은 물론이고 80, 90이 돼도 <소학>의 경지에 도달하기 힘들다. 김굉필 식으로 하게 되면 소학 과목에서 통(通)을 받는 것은 일평생을 살아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위에서 세종이 말한 통(通)의 개념은 일반적 의미의 '통'보다는 낮은 개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 선비들보다 학문 수준이 떨어지는 종친들의 수학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개념이었다. 세종이 말한 통은 <소학>을 어느 정도 이해하면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선비들에게 요구되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세종의 왕명으로 본 종친들의 수학능력
 
 tvN <슈룹>의 한 장면.

tvN <슈룹>의 한 장면. ⓒ tvN

 
방학 연령에 관한 세종의 왕명은 종친들의 수학능력이 높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어려서부터 국비 지원을 받으며 공부했는데도 나이 40은 물론이고 50을 넘어도 <소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친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조의 건의에 따라 종학이 설립된 것은 1428년이다. 세조가 방학 연령을 정한 것은 15년 뒤다. 50이 넘어도 안 되면 그냥 내보내라는 왕명은, 세종이 그 15년 동안 종학 학생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는지 짐작케 하는 자료다.
 
<슈룹> 제1회는 종학에서 학부모들이 어린 학생들의 수업을 참관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제1회에 등장한 어린 학생들뿐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들까지도 함께 공부하는 곳이 실제의 종학이었다. 아버지 세대의 왕족들이 참관인이 아니라 학생 자격으로 공부하는 곳이었다. 40이 넘고 50이 넘어도 <소학>을 깨우치는 왕족과 그의 아들이 똑같이 헤매는 모습을 선비 출신 교사가 지켜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했을 만한 곳이기도 하다.
 
<슈룹>의 왕실 여성들은 오늘날의 학부모 못지않는 열정을 발휘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왕족 교육에서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오늘날의 학부모들과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 학부모들은 자녀를 유명 학교나 안정된 직장에 보내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왕족 학부모들은 그런 생각이 별로 없었다. 자녀뿐 아니라 그 자신도 종학 학생일 수 있는 왕족 학부모들은 일반인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살았다.
 
임금의 4대손까지는 종친으로 인정됐다. 이런 왕족에게는 소작농이나 노비가 딸린 토지가 지급됐다. 농업경제시대에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들은 오늘날의 기업체 사장에 상당했다. 그랬기 때문에, 자기 자녀도 종친 범주에 드는 왕족 학부모들은 일반 사대부 부모들처럼 취업을 전제로 하는 공부를 자녀들에게 독려할 필요가 없었다.
 
왕족은 관직을 나눠주는 입장에 있는 왕실의 일원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관직 취득을 목표로 하는 과거시험에 신경을 쓸 이유가 별로 없었다. 왕족이 정치적으로 성공하는 길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문제를 잘 푸는 데 있지 않았다. 왕실 내의 역학구도에 잘 적응하고 관료들을 잠재적 우군으로 만드는 데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공부나 시험에 대한 왕족들의 마인드는 일반 사대부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왕족들은 사대부들처럼 관직 진출에 명운을 걸 필요도 없는데도 조선왕조가 그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별도로 설립한 이유 중 하나는 왕실의 위신과 관련이 있다. 명종 21년 8월 26일자(1566년 9월 9일자) <명종실록>에 따르면, 32세 된 명종은 공식 왕명에서 "종친들은 거의 다 무식해서 심지어 중범죄를 저지르니 내가 깊이 통탄한다"고 말했다. 이런 탄식에서 나타나듯이 왕족들은 사대부에 비해 학문 능력이 떨어졌다. 심지어 기본 교양마저 부족해 일반인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았다.
 
왕족 교육이 갖는 현실적 의의는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군주의 혈족일 뿐 아니라 국영 토지의 지주들인 왕족들이 최소한의 기본 교양을 갖춰 왕실 전체가 사회적 지도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만드는 데에 종학 제도의 실용적 의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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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 제15회 임종국상..저서: 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 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 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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