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바람의 향기>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바람의 향기> 스틸컷

▲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바람의 향기>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바람의 향기>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1.
깎아지른 듯한 절벽.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한 남자가 곡예를 하듯 절벽에 매달려 약초를 캐고 있다. 까마득한 발 아래로 작은 돌덩이가 소리를 내며 끊임없이 떨어지지만 정작 그는 이 상황이 익숙하기라도 한 듯 동요하지 않는다. 그 절벽에 앉은 채로 약초가 담긴 가방을 등에 둘러메고 집으로 향한다. 이란의 외딴 시골 마을 한 구석에 그의 집이 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라도 한 듯 주변에는 인가의 흔적이 드물다. 낡고 작은 그 집에서 남자가 살고 있다. 하반신에 장애가 있어 몸이 불편한 그는 자리에 누워 눈만 깜빡이며 움직일 줄 모르는 전신 마비 상태의 아들을 간호하며 지내왔다. 어느 날, 그런 두 사람의 집에 전기가 끊겨 전력부 기사가 이곳을 찾는다. 변압기 문제임을 발견하게 되지만 부품을 구할 수 없어 수리에는 열흘에서 보름이 걸릴 예정이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란 출생 감독 하디 모하게흐(Hadi Mohaghegh) 감독의 <바람의 향기>(Scent of Wind)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개인주의적이고 빠르게만 흘러가는 지금 사회와는 달리 느리고 불편하지만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손을 내밀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이 90분의 러닝 타임 내내 그려진다. 이를 통해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 속에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완전히 흩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고자 한다.

02.
영화 바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 중 하나는 모하게흐 감독이 연출과 동시에 작품에 직접 출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연극 분야에서 배우로도 경력을 쌓기 시작한 바 있는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몸이 불편한 남자와 아들을 돕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력부 기사 역을 직접 연기했다. 그는 공식기자회견 자리에서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외면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것이기에 이를 제대로 연기하도록 하는 것이 어려웠다"며 "특히 이번 작품은 대사도 많이 없는 편에 속하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연기하는 것이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더 나아가 그 내면을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그의 의도대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력부 기사는 자신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자처하면서 영화 속 부자(父子)를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선다. 변압기 문제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 직접 뛰어다니는 것은 물론, 나중에는 자신의 사비를 전부 털어가면서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왜 저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영화 전체의 결에서 벗어나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물론 감독은 최소한의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두 사람의 집을 처음 방문한 기사가 집안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동일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점은 영화가 바라보는 인물이 다리가 불편한 남자로부터 전력부 기사로, 그리고 다시 다리가 불편한 남자로 순환하는 과정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요인이 된다.

영화의 처음에서 정전이 된 것을 깨달은 남자가 전력부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전화기를 구하러 다닐 때 마을에서 할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지만 바늘에 실을 꿰어 달라는 할아버지의 요청을 외면하지 않는다. 잠시 후, 할아버지는 그가 꿰어준 실로 자신의 양말이 아닌 타인의 양말을 꿰매 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변압기의 부품을 요청하는 기사의 무전에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또다른 기사들은 한마음으로 도움의 연락을 보내오고, 길에서 만난 시각 장애인의 뜬금없는 요청 역시 기사는 외면하지 않는다.

영화 속 모든 등장 인물이 그렇다. 이 영화 <바람의 향기>는 프레임 속에 단 한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그의 동인(動因)이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이나 바람에 놓여있지 않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영화 속 모든 인물은 타인의 요청이나 부탁, 책임과 같은 마음으로 움직인다. 측은지심(惻隱之心). 타인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이 그 바탕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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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바람의 향기>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바람의 향기>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눈에 보이지 않는 인물들의 그런 마음을 시각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부분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다. 목가적이라고 하면 흔히 떠올리는 유럽의 어느 작은 소도시 같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느낌과는 다르지만, 이유 모를 옅은 슬픔과 조금은 빛이 바랜듯한 서정성, 따뜻함이 느껴진다. 연인을 만나러 가는 시각 장애인을 위해 기사가 꽃을 꺾어다 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노란 꽃밭 역시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랑스럽게 그려진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껏 만나온 일반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르다. 이란이라는 국가가 가진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모하게흐 감독은 걍제적 문제로 많은 주민들이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도시에 녹아 있는 자연스러운 슬픔이 묻어나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만약 관객들이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얕은 슬픔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배경적 상황에 의해 환기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의 감정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욕심이 조금도 없다. 영화에 앞서 작품이 완성될 수 있도록 앞서 걷지도 않는다. 그저 영화의 곁에 서서 우리가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유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 나지막한 목소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슬픔의 감정은 그곳으로부터 전이되어 온다. 낮게 깔린 운무처럼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두 사람을 쉬이 놓지 못하는 한 사람과 다시 한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같은 모습으로 이어나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때는 정말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04.
5일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자신의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에 대해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다던 하디 모하게흐 감독에게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물론 영화가 좋았으니까 선정했습니다'라는 간략한 대답을 내놨다. 여기에는 물론 이제 모두에게 작품을 선보인 뒤에 축하의 뜻을 건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한 해의 영화제에 수 백 편의 영화가 초청되고 소개되지만, 그 중에서도 개막식에 타이틀을 올릴 수 있는 작품은 단 한 작품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말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이 영화 <바람의 향기>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유는 과연 어디에 놓여 있을까?

그동안 코로나19의 여파로 영화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올해 열리는 제27회 영화제는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전면 정상화를 목표로 삼은 첫번째 영화제다. 여러 이유로 침체기를 겪고 있는 영화 산업은 물론, 이제 막 제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영화제와 관련한 모든 이들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처럼도 보인다.

이 영화 <바람의 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처럼 서로를 향한 관심과 사랑을 잃지 말고 모두 함께 계속해서 묵묵히 걸어 나가자고 말이다. 몇 차례의 지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관객들과 함께 자신의 길을 걸어온 영화제의 지난 역사 속 걸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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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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