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수리남> 스틸컷 영화 <수리남> 스틸컷

▲ 영화 <수리남> 스틸컷 영화 <수리남> 스틸컷 ⓒ 영화 <수리남> 스틸컷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강인구(하정우). 미군에 식자재를 납품하며 단란주점, 카센터를 운영한 돈으로 겨우 가족들과 살 수 있는 전셋집 한 칸을 마련한다. 그런 인구에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 응수(현봉식)는 수리남에서 홍어를 수입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고 꼬시는데. 단란주점과 카센터를 정리한 돈으로 수리남으로 간 인구. 하지만 중국 갱스터인 첸진(장첸) 일당의 협박에 사업은 위기에 빠진다. 이때 한인교회의 목사 전요환(황정민)이 그를 돕겠다고 나서는데.

한국과 수리남을 오가는 장대한 드라마 <수리남>을 인수분해 하면 '아파트'와 '꿈'이 남는다. 캐릭터와 장르, 윤종빈 월드의 정체성이 담긴 두 수록곡이 조용필의 '꿈'과 윤수일 밴드의 '아파트'다.

<수리남>을 대표하는 첫 번째 수록곡은 가왕 조용필의 '꿈'이다. 1991년 발표된 앨범 < The Dream >의 타이틀인 이 곡은 마약왕이자 사이비 목사인 전요환의 테마이자 동시에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에서 윤종빈 감독이 시도하는 장르물의 토대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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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수리남> 스틸컷 영화 <수리남> 스틸컷 ⓒ 영화 <수리남> 스틸컷

 
<수리남>의 장르를 강조하는 조용필의 '꿈'

'꿈'이 처음 등장하는 건 5화의 도입부다. 국정원과 인구의 활약으로 브라질 루트가 봉쇄되고 계좌까지 동결된 요환은 첸진과 손을 잡고 유럽에 코카인을 유통해 자금난을 해소하려 한다. 오랫동안 적대관계였던 요환과 첸진의 대화가 순조롭게 풀린 후 오프닝 영상이 지나고 본격적인 5화의 시작과 함께 몽환적인 기타, 신시사이저 소리가 퍼지며 27초간의 긴 전주가 시작된다.

인구의 뒷모습을 잡으며 그의 테마로 활용될 것처럼 보이던 '꿈'은 가사의 첫 문장과 함께 수영장에 몸을 담근 요환의 모습 비추며 시선을 이동한다. 동시에 외화면에서 들려오던 곡은 요환의 수영장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자연스레 내화면에서 울려 퍼진다.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쳐 지구 반대편 수리남에서 마약과 사이비종교로 꿈같은 왕국을 세운 요환을 '꿈'의 가사가 명쾌하게 요약한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마지막 화에서 '꿈'은 한 번 더 등장한다. 요환의 조직에서 몰래 활동하던 국정원 요원의 정체가 밝혀지고 인구의 계획도 성공해서 푸에르토리코로 코카인을 실어 보내는 자동차 안이다.

큰 돈을 벌 생각에 사로잡힌 요환은 인구와 기태가 자신을 속이는지도 모르고 운전 중인 기태에게 노래의 볼륨을 높이라며 외친다.

"전도사 뭐해! 이제 하이라이트인데".

정체를 숨긴 요원이 활약하는 언더커버 장르의 짜릿함이 폭발하는 이 장면 역시 '꿈'의 가사와 착 붙는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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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수리남> 스틸컷 영화 <수리남> 스틸컷 ⓒ 영화 <수리남> 스틸컷

 

윤종빈 유니버스를 그린 윤수일밴드의 '아파트'

1981년 발표된 윤수일 밴드의 '아파트'는 인구의 테마이자 <수리남>을 통해 윤종빈 월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곡이다. '아파트'가 흘러나오는 건 인구의 전사가 소개되는 1부다. 인구가 친분있는 여자들에게 전화를 돌려 기적적으로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갖게 되는 장면에서 '아파트'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강조되는 부분은 이상하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동생들까지 뒷바라지하며 안정적인 가정을 꿈꾸던 인구가 그렇게 바라던 가족을 꾸렸는데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라는 후렴만 3번 반복된다.

이는 훗날 가족들과 떨어져 수리남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인구의 미래를 넌지시 예견할 뿐 아니라 윤종빈 월드에서 가장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수리남>은 <공작>처럼 서로 속고 속이는 언터커버 장르물 틀 아래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의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의 스토리라인과 감정선을 그대로 따라간다. 둘은 스토리 측면에서 거의 동일하다. 탈법과 불법을 소심하게 넘나는 다소 불량한 시민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 우연한 기회에 범죄에 연루되고, 여러 가지 이유로 보스를 끌어내리려는 정부의 계획에 참여한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불량시민은 최익현(최민식)이었고 보스는 최형배(하정우)였다. 

그런데 동일한 스토리구조 아래에서도 <수리남>과 <범죄와의 전쟁>이 시민과 보스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차이가 있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익현은 인맥과 혈연 등 오만가지 꼼수를 동원해 조직폭력배의 이권사업을 확장하고 여차하면 파트너의 뒤통수를 치는 양아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킨 가장이기도 하다. 형배는 자존심은 강하지만 정치에는 약해 결국 익현에게 속고마는 어수룩한 건달이다. 경찰서에 잡혀왔으면서도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라며 자신의 인맥을 과시한다. 속 빈 강정 같은 가부장제에 대한 씁쓸한 조소가 <범죄와의 전쟁>에 흐르던 정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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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수리남> 스틸컷 영화 <수리남> 스틸컷 ⓒ 영화 <수리남> 스틸컷

 

반면 <수리남>에서 시민이자 가장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다. 의심 많은 마약왕을 끝내 속여넘기는 재빠른 두뇌회전과 임기응변술, 큰 돈을 포기하고 사이비종교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친구의 죽음에 대한 복수의지까지 불태우는 인구.

익현이 신물나게 보여준 양아치스러움과 달리 인구는 지덕체를 갖춘 슈퍼히어로에 가깝다. 인구가 쓰러뜨려야 하는 마약왕도 형배와 다르다. 검은 돈으로 수리남의 정재계를 포섭해 마약을 독점공급하게 된 뛰어난 비즈니스맨이자 잔악하고 의심 많은 슈퍼 빌런이 바로 요환이다. 

양아치와 건달의 우스꽝스러운 대결을 중심으로 한 블랙코미디 <범죄와의 전쟁>과 달리 <수리남>은 슈퍼히어로와 슈퍼빌런이 맞붙은 히어로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한국 사회를 지탱하던 가부장제를 희화화하던 입장도 미묘하게 변화해서 어떻게든 집안을 먹여 살리려 분투하는 가장에 대한 연민으로 바뀌게 된다.

생존을 위한 가장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 <수리남>을 관통하는 정서이기 때문에 "강프로 식사는 잡쉈어"가 작품을 대표하는 대사로 기억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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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수리남> 스틸컷 영화 <수리남> 스틸컷 ⓒ 영화 <수리남> 스틸컷

 
어떤 딜레마도 없이 직진하는 캐릭터의 부조화

가부장제에 대한 묘한 연민의 시선과 함께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수리남>이 윤종빈 감독에게 기대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윤종빈 월드의 주인공들은 딜레마를 품고 있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장원(이승영)은 군대의 악·폐습에 문제를 제기하고 끊어내고 싶으면서도 기대를 따라오지 못하는 후임 때문에 결국 부조리의 늪에 빠진다.

<비스티 보이즈>의 승우(윤계상)는 본인도 호스트이지만 여자친구의 화류계 생활을 지켜볼 용기가 없다. <군도>의 조윤(강동원)은 본인이 서얼로 태어나 신분제의 차별을 겪었으면서 민란을 저지해야 한다. 

반면 <수리남>에서 인구는 어떤 딜레마도 없이 요환의 파멸을 향해 직진한다. 물론 같이 사업을 키워나가자는 요환의 설득에 혹한 순간도 있었지만, 요환의 왕국에서 사이비종교와 약물로 고통받는 아이를 본 뒤 금세 정신을 차린다.

이후 긴장감 넘치는 총격전과 카체이싱, 육박전이 펼쳐지지만, 액션이 폭발하는 통쾌한 히어로와 빌런의 대결을 보고 싶으면 <범죄와의 전쟁>이 아니라 <범죄도시>를 찾아가는 게 낫다. 납작해진 서사를 일단 끌고 가는 건 장르적 추동력이다. 국정원이 심은 또 다른 언더커버의 정체는 극의 후반부가 되어야 밝혀진다. 혼란을 유도하는 세밀한 연출이 돋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서브플롯이다.

결국 <수리남>의 원동력은 실화가 가진 힘이다. 시청자들은 요환이 붙잡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인구가 어떻게 요환의 의심을 벗어나 그를 함정에 빠뜨릴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이는 각본의 영역이 아니다. 믿지 못할 실화가 가진 흡입력이 시청자를 6시간 동안 주저앉힌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의 연기대결, 6시간을 집중하게 만드는 윤종빈 감독의 연출력은 여전하지만 <수리남>은 그의 신작을 기다린 팬들에게 아쉬울 수 있다. <수리남>에는 분명 순간순간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말맛'이 살아있지만 캐릭터의 거침없는 돌진으로 그간 촘촘하게 빚어온 윤종빈 월드에는 어딘가 미치지 못한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조용필의 '꿈' 마지막 가사다. 군대, 가부장제, 군부독재, 남북분단상황처럼 한국의 독창적인 소재들에서 인간적인 페이소스를 담아내던 윤 감독 고향의 향기가 유난히 그립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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