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극에서는 병자를 치료하는 의원들이 왕족들은 물론이고 양반 사대부들 앞에서도 쩔쩔맨다. tvN 사극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의 계지한(김상경 분)도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영업장에 들어와 소동을 피우는 양반댁 마님 앞에서 굽실거리는 장면이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직종에서나 돈 많은 고객 앞에서는 그런 장면이 연출될 수 있지만, 특히 의원 직업와 관련해 사극들이 그런 묘사를 많이 하는 것은 그들의 신분이 낮았다는 관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중인이었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묘사하는 측면이 있다.

의원의 위상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 tvN

 
하지만 중인이라는 법적 신분은 없었다. 법률상의 신분은 양인(자유인)과 노비 둘뿐이었다. 중인은 일반 백성과 특권층의 중간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일반 백성도 명확한 개념이 아니고 특권층도 명확한 개념이 아니듯이, 중인 역시 그랬다. 중인들 간에 계층적 연대의식 같은 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을 신분적으로 개념 짓는 제도적 장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양반으로 불린 지배층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누가 양반이고 누가 아닌지가 칼로 무 베듯이 명확했던 것은 아니다. 특권층의 범위를 분명히 정하기 힘들다는 점은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사극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의원들이 양반 앞에서 자동적으로 허리나 고개를 숙이는 장면은 실제 역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현존하는 사료 대부분은 왕실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이 생산한 것이거나 그 용인 하에 생산된 것들이다. 역사 기록물이 대개 다 이렇다 보니, 그런 자료를 통해 역사를 들여다보는 현대인들은 아무래도 일반 대중보다는 왕실의 관점을 갖게 되기 쉽다. 왕족이나 고위층 귀족들이 의원들을 바라보던 시각을 현대인들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런 관점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되면, 일반인들이 가까이 하기 힘들었던 의원들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일반 대중이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봤을 의원들의 실제 위상을 제대로 가늠할 수 없게 된다.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한 장면. ⓒ tvN

 
고대로 갈수록 의술은 무녀나 승려의 몫이었다. 의술이 종교에서 독립하지 못한 시절이 오랫동안 있었다. 이 점은 의사를 지칭하는 한자 의(醫)가 고대에는 의(毉)로 쓰인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무당을 뜻하는 무(巫)가 들어간 의(毉)라는 글자를 썼던 시절이 있었다. 종교인이 의료를 담당하던 고대 사회의 모습을 이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비슷한 흔적이 오늘날의 일부 부흥회 목회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무당이 의료를 담당하는 풍경은 다산 정약용이 귀양살이하던 19세기 초반까지도 매우 흔했다. 1801년에 첫 번째 귀양지가 된 경상도 장기현(포항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가 <촌병혹치>라는 의서를 저술한 것은 현지 주민들이 무녀 의사에게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으로 의술을 배운 정약용의 눈에는 무녀들의 치료 방식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촌병혹치>라는 일종의 처방전 책을 저술한 것이다.
 
의료 무대에서 밀려난 종교인들

그런 주술적인 의사들을 의료 무대에서 조금씩 밀어내는 현상이 고려시대 들어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으로 의료 지식이 상당부분 축적돼, 종교인들에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책을 통해 의료를 배울 수 있는 단계가 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책으로 배운 의원들이 본격 배출되던 고려시대 상황을 보면, 이런 의료인들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의 사극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의원들이 그렇게까지 낮은 대우를 받지는 않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왕원(王源)이라는 고려인의 묘지명이 보관돼 있다. <고려국 광평공 묘지>라는 이름이 붙은 묘지명이다. 무신정변 이듬해인 1171년 12월 30일(묘지명 날짜는 음력 12월 2일)에 제작된 이 유물은 고려 문종 임금의 손자인 광평공 왕원에 관해 "공은 유학과 불교 양쪽에 능통했고 의술은 더욱 정교해서 일찍이 약으로 인민들을 널리 구제했다"라고 평했다.
 
이 묘지명은 왕원을 훌륭한 인물로 높이 평가한다. 그를 호평하는 부분의 첫 대목에 나오는 것이 유·불 능통과 더불어 의술이다. 그는 의술을 익히고 직접 약을 만들어 백성들을 치료했다. 의료인 활동을 겸한 왕족이었던 것이다.
 
묘지명을 기록한 사람은 중서문하성의 종7품 주서(注書)인 고돈겸(高惇謙)이다. 개인적으로 쓴 글이 아니라 조정의 명령을 받고 쓴 글이다. 그런 글에서 왕족의 의료 활동이 높이 평가됐다. 의원 경력이 왕족의 위신을 떨어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로(李商老)는 중서사인인 이중부의 아들이었다. 중서사인은 국정의 잘잘못을 논박하는 종4품 벼슬이었다. 그런 이중부의 아들이 승려가 선물한 의서를 공부해 전업 의료인이 됐다. 이중부가 묘청의 난에 연루돼 귀양살이를 하기는 했지만, 의원이 천대받는 직종이었다면 사대부의 아들인 이상로가 의원이 되는 데에 장애물이 많았을 것이다.
 
<고려사>보다 분량이 짧은 <고려사절요>는 1185년 연말부터 1186년 연초를 다루는 대목에서 명종 임금이 이상로를 장관급인 이부상서에 임명한 사실을 소개한다. <고려사절요>는 그가 의술 외에 배운 게 없다는 이유로 지식인들이 이 인사 조치를 비판했다고 말한다. 전문 의료인을 장관으로 임명한 것에 대해 말들이 있기는 했지만, 의원들이 귀족 앞에서 무조건 굽실거려야 했다면 이런 인사 조치가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고려시대 문인 중에 이규보가 있다. <동국이상국집>으로 유명한 문인 겸 문신이다. 그가 쓴 '약학을 읽다(讀本草)'란 시가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돼 있다. 시에서 그는 "정치가 졸렬하니 마음은 힘들고 병은 살가죽을 끊어내"라고 한 뒤 "의학서를 읽어 늙은 의원이 되고 싶다"라고 읊었다.
 
이규보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다. 시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의학서를 읽었고, 은퇴 후에 의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왕원·이상로와 더불어 이규보의 사례는 의원이라는 지위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낮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동양 의학은 철학과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전문적인 의료인으로 출발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학자들이 의학을 겸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정약용도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이 의료인을 겸하는 사례가 꽤 됐다는 것은 의원이 되는 것이 커다란 불이익이 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었으니, 그런 불이익이 따를 일이 더욱 더 적을 수밖에 없었다. 전문 의료인이 사대부보다 낮은 대우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사극에서 묘사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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