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A <블랙-악마를 보았다>의 한 장면

채널A <블랙-악마를 보았다>의 한 장면 ⓒ 채널A

 
1990년대 '지존파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범죄조직이나 연쇄살인사건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권이나 개인적 원한이 아닌, 그저 불특정 다수에게 묻지마 살인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집단까지 결성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었다. 그들은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불평등한 사회 구조와 부자들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했고, 끝까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않아 대중을 더욱 경악시켰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동물이라도 하기 어려운 그런 행동이 있습니다. 국민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다"며 이례적으로 경찰서까지 찾아 안타까움을 드러낼만큼 경악스러운 범죄였다. 심지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이들의 당시 평균연령은 고작 21세에 불과했다. 대체 무엇이 이 청년들을 인간이길 포기한 괴물로 만든 것일까.

5월 6일 방송된 채널A 범죄다큐스릴러 <블랙-악마를 보았다>에서는 '가진 자들을 응징한다'는 그들만의 논리로 피해자들을 잔혹하게 납치, 살해하고 시신을 소각한 지존파 사건을 조명했다.
 
1994년 9월, 민족의 명절인 추석을 보내고 있던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졌다. 이른바 '인간 살인공장'이라 불리우던 연쇄 살인조직의 실체가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이들은 단순한 조직폭력배가 아니라 오직 살인만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인 집단이었고, 이런 범죄 유형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사례였다. 그래서 지존파 사건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범죄사의 가장 엽기적인 사건으로 회자된다.
 
조직원들은 스스로 "인간이길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지존파는 총 5명의 피해자를 상대로 납치, 감금, 금품갈취, 성폭행 등을 저지른 끝에 잔혹하게 살해했으며 심지어 시신을 불에 태워 소각했다. 평소 국가원수가 개별적인 강력사건 때문에 경찰서까지 방문하는 일은 요즘도 거의 없지만, 당시 사건의 심각성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경찰서를 찾아 지존파의 행위를 언급하며 규탄할 정도였다. 당시 김 대통령이 언급한 '동물도 하기 어려운 행위'란, 피해자를 살해하고 '식인'까지 저지른 것이다.
 
조직원들은 체포된 이후에도 반성하기는 커녕 "부모 잘 만나 고급 승용차 몰고 으스대는 압구정 야타족들, 오렌지족들 내 손으로 못 죽여서 아쉽다", "사회가 우리같은 사람들을 제발 만들지 말라", "난 인간이 아니다", "더 죽이고 싶었는데 못죽여서 한이 될 뿐"이라며 오히려 사회와 타인에 대한 한없는 적개심을 드러내며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놀랍게도 조직원들은 전원 20대였고 최연장자가 23세, 최연소는 18세에 불과했다. 세상에 대한 증오가 극악무도한 범죄와는 전혀 어울리지않는 나이였다. 1993년 8월에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은 "잘 사는 사람들을 응징하자"는 목적으로 연쇄살인조직을 결성한다.

이들의 범행대상이었던 한 부부는 추석에 자가용을 몰고 벌초를 하러왔다가 아지트에 납치-감금 당한 뒤 협박으로 금품을 갈취 당하고 결국 살해 당했다. 피해자는 부유층과 거리가 있는 자수성가한 작은 중소기업 대표였고, 그들이 범행대상이 된 이유는 단지 고급승용차의 소유주였기 때문이었다. 행동대장인 김현양은 체포당시 "2천만 원 이상의 자동차를 가진 이는 모두 죽여야한다"고 주장할 만큼 '좋은 차=부자'라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내세웠다.
 
심지어 지존파는 시체 훼손과정에서 여성 피해자의 인육을 먹기도 했다. 김현양이 밝힌 식인의 이유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기 위해서, 그리고 조직의 일원으로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는 것. 조직원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트라우마로 인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피해의식과 폭력성을 가지고 있었다.
 
 채널A <블랙-악마를 보았다>의 한 장면

채널A <블랙-악마를 보았다>의 한 장면 ⓒ 채널A

 
본래 지존파가 그들 스스로 붙인 조직 이름은 마스칸이었다. 그들은 마스칸이 그리스어로 야망을 뜻하는 것인줄 알고 작명했으나 실제는 아랍어로 집이나 숙소를 뜻하는 말이었다. 지존파는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가 임의로 지은 조직명으로, 조직원들이 당시 유행했던 홍콩영화 <지존무상>을 광적으로 좋아했고 두건에 '지존'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은 데서 비롯됐다.
 
지존파는 극악한 범죄과정을 위하여 '부자에 대한 증오', '10억을 모을 때까지 범행 지속', '배신자는 처형',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않는다', '조직을 배반하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죽인다' 등 자신들만의 섬뜩한 행동강령을 정하고 그대로 실천했다. 경찰은 지존파 검거 당시 압수과정에서 많은 범죄소설과 테러리스트의 회고록 등을 발견했다. 지존파는 책을 보고 따라하면서 범행수법을 연구했으며, 아지트를 완성하고 범행을 위한 공기총, 대검 등을 구입하는가 하면, 지리산에서 1주일간 지옥훈련을 거치며 마치 전문적인 테러집단같은 행태를 보였다.
 
지존파 전원은 모두 어머니, 학교 여자 선생님들을 증오하는 등 여성혐오를 보였다. 특히 김현양은 자기 어머니에 대한 적개심이 유독 강했는데, 1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자신을 홀로 키운 어머니의 사생활을 목격하며 여성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 김현양은 "어머니를 내 손으로 못 죽여서 한이 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세상에 대한 원한을 내세웠지만, 결국 지존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역시 돈이었다. 이들은 각자 학업-취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사기를 당하는 등,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였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범죄를 제의하며 조직원으로 포섭했다.

강동은은 서울의 유흥업소를 방문했다가 부유층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큰 박탈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강동은은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잘살수 없다. 부자들을 납치하고 돈을 빼앗아 잘 살아보자"고 조직원들에게 제안했다.
 
최초의 범죄는 1993년 7월, 송봉우를 비롯한 조직원 3명은 홀로 길을 가던 여성을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살해했다. 당시는 아직 조직 결성 전으로 우발적인 성폭행 사건이었지만 조직원중 한 명이 피해자를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 살해 이유는 첫째로는 행동강령에 대한 증거인멸이었지만, 두 번째 이유는 충격적에게도 앞으로의 본격적인 범행을 위한 예행 연습이라는 것. 그들은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강해져야한다"며 다른 조직원들을 부추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조직원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송봉우는 아무 죄없는 사람을 살해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악몽에 시달렸다. 송봉우는 3백만원을 인출하여 도주했지만 불과 반나절만에 조직원들에게 붙잡혔다. 조직원들은 송봉우를 용서해주겠다며 설득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고 결국 야산에서 피살당했다. 배신자는 끝까지 따라가서 처형한다는 그들의 행동강령이었다.
 
심지어 조직원들은 막내를 살해하고도 곧바로 태연히 개까지 잡아먹으며 "하루에 개를 두 마리 잡은 것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그들의 눈에 얼마 전까지 함께했던 막내는 조직을 배신한 순간부터 개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지존파는 집단으로 거주하던 시골 주택 지하에 사제 감옥과 소각장까지 만들고 스스로 아방궁이라는 부르며 사람을 살육하는 살인공장을 구축했다. 마을 사람에게는 자주 고기를 굽는 모습을 보이며 시체를 소각하는 것을 은폐했다.
 
지존파는 범행을 위하여 공기총, 대검, 손도끼 등 각종 무기에 심지어 다이너마이트까지 구비했다. 또한 이들는 불법 무기상으로부터 범행 대상으로 노릴만한 유명 백화점의 VIP 명단 개인정보까지 입수한 것으로 드러나며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하지만 정작 이들 중 대다수는 부유층도 아닌, 1년에 한두 번씩 특별한 날에나 백화점을 찾는 평범한 서민들이었다.
 
 채널A <블랙-악마를 보았다>의 한 장면

채널A <블랙-악마를 보았다>의 한 장면 ⓒ 채널A

 
지존파의 본래 두목은 26세의 김기환이었다. 지존파의 범행 당시 김기환은 12세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 상태였다. 김기환은 부두목 강동은과 조직원들을 직접 포섭하고 자신의 권위와 행동강령 등을 세뇌시켰다. 구치소 안에서도 조직원들에게 범행을 시작할 것을 지시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환이 없는 동안의 지존파는 강동은이 사실상 이끌면서 범죄를 주도하게 됐다.
 
지존파는 김기환없 이도 1994년 9월부터 본격적인 범행에 돌입했다. 더욱 섬뜩한 것은 두목인 김기환이 출옥하는 시점에 맞춰 미리 입수해둔 백화점 고객명단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대량살육극을 벌이려고 계획했었다는 것.
 
지존파의 극악함을 증명하는 또다른 일화는 바로 유일한 생존자였다. 세 번째 범행이었던 남양주 납치사건의 피해 여성은 살해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죽음보다 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했다.
 
지존파는 해당 여성을 납치하여 집단로 성폭행하고 강제로 다른 피해자들을 살해하는데 동참시키며 공범으로 만들기도 했다. 여성은 지존파의 강압에 못이겨 살기 위하여 같이 납치되었던 직장 동료를 목졸라 살해해야했고, 다른 피해자를 납치하는데도 동참해야했다.
 
이는 평소 여성을 혐오하던 조직 행동강령과 달리 "조직원 중에 여자 1명은 있어야 의심을 덜 받는다"며 피해 여성을 조직원으로 만들자고 했던 김현양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고. 김현양은 다른 조직원이 반발하자 몸싸움까지 하면서 해당 여성을 지켰다고.
 
여성은 조직원들의 비위를 맞추는 척 하면서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 어느날 김현양은 화상으로 손을 다쳐서 여성과 함께 병원을 방문했다. 김현양은 진료실에 들어가며 여성에게 "도망가려면 도망가라"면서 휴대전화와 돈까지 맡겼다. 여성은 병원을 빠져나와 지존파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여 포도밭에 은신했다가 서울로 올라와 경찰에 신고했다.
 
지존파는 여성이 곧바로 인근 경찰서로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3일이나 동태를 살폈다. 그들이 피해 여성이 범행에 일부 가담한 만큼 결국 신고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심했다. 경찰은 처음엔 허름한 몰골에 횡설수설하는 피해여성의 진술을 믿지못했으나 그녀가 증거로 제출한 휴대전화와 사건을 파악하고 지존파 검거에 나섰다.

지존파 검거 당시 또다른 여성 조직원이 함께 검거됐다. 해당 조직원은 피해여성이 도주한 뒤 강동은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새로운 조직원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지존파가 스스로 정한 행동강령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불과 이틀 뒤에 지존파 전원이 체포되며 여성 조직원은 직접적으로 범죄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경찰은 각종 위험한 무기들로 중무장을 하고 있던 지존파를 검거하는 데 신중해야했다. 물건을 사러 밖에 나왔던 강동은을 먼저 검거한 경찰은, 교통사고를 핑계로 남은 조직원들을 파출소로 유인하여 3명을 추가 검거했다. 아지트에 남은 2명은 백병옥은 공포탄 소리에 놀라 항복했고 강문섭은 산으로 도주했으나 추격한 기동대에 의하여 사로잡혔다.
 
검거 2일 전 합류한 여성 조직원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남성 조직원들은 전원 사형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잔혹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범인들이 추호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고 전국민에게 심각한 불안을 넘어 좌절감을 느끼게했던 사회적 반향등을 고려할 때 극형으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
 
지존파는 1995년 5월 25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11월 2일 6명 전원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이례적으로 검거 1년 2개월만에 재판과 판결, 집행까지 진행된 것은 그만큼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에 대한 사회적 분노와 공감대가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목 김기환은 최후진술에서 "나는 내가 왜 단죄를 받아야하고 내 죄가 왜 잘못된건지 모르겠다. 나는 세상이 가르쳐준대로 살았다"는 이야기를 남기며 끝까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당시 20대 초중반에 불과했던 그들의 인생에서 누군가 잘못을 알려주고 인생의 나침반이 될만한 존재가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하지만 불우하고 어려운 환경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모두가 그들처럼 인간이길 포기하는 괴물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블랙악마를보았다 지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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