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국제적인 명장이었다. 몽골군·홍건적·여진족·왜구의 침입을 격퇴하고 고려 내부의 반란도 진압했다. 최영 역시 국제적인 명장이었다. 두 명장이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 1388년 위화도회군이다. 이성계의 쿠데타로 시작된 이 대결은 반란군의 승리로 끝났다. 반군 5만 명 앞에서 최영의 명성은 중과부적의 한계를 드러냈다.
 
최영이라는 거목까지 쓰러트린 이성계였다. 하지만 아들 이방원에게는 두 번이나 패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는 무방비 상태로 이방원의 쿠데타를 허용했다. 이방원이 둘째 형인 정종 이방과를 허수아비 임금으로 세웠다가 직접 임금이 된 뒤인 1402년에도 부자간 대결이 있었다. 대규모 군대가 맞붙은 1402년 조사의(趙思義)의 난 때도 이성계는 아들에게 패했다.
 
1398년에는 이성계 군대가 정부군이고 이방원 군대가 반군이었다. 1402년에는 아버지 군대가 반군이고 아들 군대가 정부군이었다. 두 대결 모두 이방원의 완승으로 끝났다. 국제적 명장인 이성계가 유독 아들한테만 두 번이나 졌던 것이다.
 
조사의의 난은 외형상으로는 안변부사 조사의가 일으킨 사건이지만, 실제로는 조사의의 난이 아니라 '이성계의 난'으로 기록돼야 할 사건이었다. 건국시조 이성계를 역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왕조의 이념적 기반이 흔들릴 수 있는 데다가 아버지가 죄인으로 규정되면 아들의 왕위가 위태해지는 왕조국가의 시스템을 반영하는 '역사왜곡'이다.
 
안변부사 조사의는 강원도 원산 남쪽인 안변에서 사또로 근무하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음력으로 태종 2년 11월 5일자(양력 1402년 11월 29일자) <태종실록>은 그의 거병 소식을 전하면서 "사의(思義)는 현비 강씨의 족속이다"라며 "강씨를 위해 원수를 갚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목숨을 잃은 세자 이방석을 포함해 신덕왕후에게서 태어난 왕자들을 위해 복수에 나섰던 것이다.

'조사의 난' 배후에는 이성계가 있었다
 
 KBS 1TV <태종 이방원> 한 장면.

KBS 1TV <태종 이방원> 한 장면. ⓒ KBS1

 
 KBS 1TV <태종 이방원> 한 장면.

KBS 1TV <태종 이방원> 한 장면. ⓒ KBS1

 
조사의의 난에는 동북면인 함경도가 대거 참여했다. 당시 이곳은 사실상 여진족의 땅이었다. 그래서 조사의가 그들을 직접 동원하기는 힘들었다. 연고가 깊은 이성계의 뜻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성계가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에게 갖는 애착을 잘 알고 있었다. 동북면 사람들은 특히 잘 알고 있었다. 조사의가 신덕왕후의 복수를 거병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그들의 주목을 끌 만했다. 그에 더해, 배후에 이성계가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동북면 사람들이 조사의를 중심으로 뭉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성계가 배후에 있었다는 점은 <태종실록>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실록에 포착된 이성계의 이동 동선은 반군의 이동 동선과 아주 명확히 겹친다.
 
조사의가 거병하기 나흘 전의 상황을 기록한 태종 2년 11월 1일자(1402년 11월 25일자) <태종실록>은 "태상왕의 어가가 동북면으로 향했다"고 서술했다. 4일 뒤 조정에는 조상 묘소에 참배하러 간다는 이성계의 전언이 전달됐다.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킨 당일에 그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다.
 
<태종실록>에는 이 소식 바로 다음에 조사의의 거병 소식이 기록됐다. 아버지가 본거지인 동북면으로 들어갔다는 소식과 그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이방원의 귓속에 연달아 들어갔던 것이다.
 
조사의 군대는 진압군인 이천우(李天祐) 부대를 격파한 뒤 지금의 평안북도·평안남도·함경도가 만나는 쪽으로 이동했다. 그쪽을 거쳐 개경으로 남하하려 했던 것이다. 동북면에서 서북면을 거쳐 개경으로 이동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방원은 쿠데타를 일으킨 이듬해에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래서 조사의가 거병한 1402년에는 개경이 도읍이었다.
 
동북면에서 서북면으로 움직이는 반군의 이동 경로는 이성계의 이동 경로이기도 했다. 태종 2년 11월 18일자(1402년 12월 12일자) <태종실록>은 "태상왕의 어가가 서북면 옛 맹주(孟州)로 향했다"고 말한다. 지금은 평안남도 맹주시인 맹주는 평안도와 함경도가 만나는 곳이었다.
 
서북면으로 이동하는 중에 조사의 군대는 1만으로 불어났다. 하지만 이 군대는 평안북도와 남도를 가로지르는 청천강에서 쉽게 무너졌다. 태종 2년 11월 27일자(1402년 12월 21일자) <태종실록>은 이들이 살수강변에서 무너졌다고 말한다.
 
위 날짜 <태종실록>은 반군의 패인이 심리전에 기인했음을 알려준다. 반군의 포로가 정부군 규모를 실제보다 부풀려 4만이라고 실토한 것이 반군 병사들의 대거 탈영을 초래했다고 말한다. 탈영하고자 밤중에 살수를 건너다가 얼음이 깨져 수장된 병사도 수백 명이었다고 한다. 이 혼란 중에 발생한 방화로 반군 병사들은 흩어졌다. 조사의는 안변으로 도주했다가 체포돼 개경으로 압송된 뒤 참수형을 당했다.
 
이성계가 동북면으로 들어간 뒤 그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군과 이성계 모두 서북면으로 이동했다. 그런 다음, 반군이 살수에서 와해됐다.
 
조사의 군대가 궤멸되고 닷새 뒤의 상황을 기록한 태종 2년 12월 2일자(1402년 12월 26일자) <태종실록>은 조사의 부대를 잃은 이성계가 살수 남쪽인 평양에 도착했다고 말한다. 이성계가 반군과 함께 이동했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성계의 마지막 군사 대결
 
 KBS 1TV <태종 이방원> 한 장면.

KBS 1TV <태종 이방원> 한 장면. ⓒ KBS1

 
토요일에 방영된 KBS <태종 이방원> 제25회 초반부에서는, 반란이 진압된 뒤 이성계의 군막에 이방원이 불쑥 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됐다. 이방원이 "태상왕 전하, 다치신 데는 없사옵니까?"라고 인사하자, 이성계는 "결국 네 놈이 이겼구나"라고 말한다.
 
조사의 군대가 무너진 직후 이성계를 실제로 찾아간 인물은 내관이었다. 위의 태종 2년 11월 27일자 <태종실록>은 이방원이 내관 노희봉을 이성계에게 보냈다고 알려준다.
 
이처럼 조사의 부대의 배후에 이성계가 있었다는 점은 <태종실록>에 노출된 이성계의 이동 경로만으로도 쉽게 드러난다. 하지만, <태종실록> 속의 등장인물들은 공식 석상에서 이 점을 아주 완곡하게 표현했다.
 
조사의의 난 초기에 이성계가 동북면에 들어간 사실을 논의할 때도 그랬다. 태종 2년 11월 9일자(1402년 12월 3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의정부는 태종 이방원 앞에서 '건강도 안 좋으신 태상왕께서 동북면에 깊숙이 들어가 계신 상태에서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켜 태상왕이 빠져나오시기 힘들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성계가 연루된 사실을 그렇게 에둘러 표현했던 것이다.
 
이방원 정부가 이성계의 연루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1402년 겨울에 벌어진 사건은 이성계의 난이 아니라 조사의의 난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이로 인해, 1402년의 패배자는 이성계가 아닌 조사의로 처리됐다. 이성계에 의해 수립된 조선왕조 하에서 이방원이 임금 역할을 하자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성계가 당한 1398년의 패배도 공식적으로는 정도전의 패배로 기록됐다. 이성계·정도전의 패배로 기록돼야 할 사건이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처리됐다. 이런 상태에서 1402년의 패배 역시 조사의의 난으로 처리됐기 때문에, 이성계의 마지막 군사 대결은 최영과의 대결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이성계는 군사 대결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불후의 명장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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