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KBS 1TV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 KBS 1TV

 
KBS 사극 <태종 이방원>의 주인공처럼 쿠데타에 성공한 인물이 정부수반이나 국가수반이 되기까지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가 많다. 쿠데타 세력은 보편적인 방식으로 집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동의를 얻기까지 첩첩산중의 도전을 거치는 일이 많다.
 
이 점은 642년에 쿠데타를 일으킨 고구려 연개소문의 사례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쿠데타로 중앙 정권은 확보했지만, 안시성주 양만춘 같은 세력의 지지는 받아내지 못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양만춘이 연개소문의 집권에 불복했다고 알려준다. 연개소문은 그런 저항세력이 있는 상태에서 645년에 당나라 태종(당태종)의 침공을 당했고, 이때만큼은 양만춘과 협력해 외세의 침략을 막아냈다.
 
쿠데타에 성공한 뒤에도 사회적 동의를 얻는 일이 이처럼 험난하기 때문에, 군주의 신병을 확보하는 일의 중요성이 쿠데타에서는 더욱 높을 수밖에 없다. 군주의 신병을 확보하게 되면, 반대파의 공격을 불법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군주의 신병을 확보한다 해도 사회적 동의를 얻는 일은 여전히 만만치 않기 때문에, 군주를 확보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황명이나 왕명으로 발포하기 시작한 뒤로도 시일이 상당기간 걸릴 수밖에 없게 된다.
 
'황명'이라는 표현이 한국사에 부적절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조선시대에 국한된 이야기다. 조선은 도읍 명칭을 중국의 북경·남경처럼 한경(漢京)으로 부르지 못하고 한성으로 불렀지만, 고려는 도읍을 개성이 아니라 개경으로 불렀다. 한자문화권에서 경(京)은 제후가 아닌 황제의 도읍이었다.
 
고려를 무너트린 조선왕조는 고려 역사를 제후국 역사로 폄하했지만, 고려가 황제 칭호를 쓴 적이 있다는 점, 중국 연호가 아닌 독자적 연호를 쓴 적이 있다는 점 등과 더불어 도읍을 '경'으로 불렀다는 사실 등은 이 나라가 한때는 황제국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황명이나 왕명'이라는 표현이 한국사에 부적절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황명이나 왕명을 확보한 뒤로도 시간이 소요되다 보니, 정부수반이나 국가수반 자리에 도달하기 전에 '중간 과정'을 거치는 일도 자주 일어난다. 쿠데타 세력이 추가적인 쿠데타 혹은 정변을 일으키거나, 반대세력의 도전을 역이용해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일들이 그것이다.
 
1961년 5월 16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1963년 12월 17일에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의 사례에서도 그런 중간 과정이 나타났다. 그는 1961년 7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을 체포하는 정변을 추가로 일으키고, 원충연 쿠데타 음모 같은 이른바 '반혁명 음모'들을 제압해 나가면서 대통령 자리에 도달했다.
 
1979년 12월 12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1980년 9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의 경우에도 그랬다. 그의 경우에는 5·17 쿠데타와 5·18 학살이 그런 역할을 했다.
 
제2차 왕자의 난, 이상한 면들
 
 KBS 1TV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KBS 1TV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 KBS 1TV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날은 음력으로 태조 7년 8월 26일(양력 1398년 10월 6일)이다. 정종 이방과에게 왕위를 양보한 이방원이 세자가 되기로 결정된 날은 정종 2년 2월 1일(1400년 2월 25일)이고, 주상으로 즉위한 날은 같은 해 11월 13일(1400년 11월 28일)이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부터 1년 4개월 뒤에 세자가 되고 2년 1개월 뒤에 임금이 됐던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이방원에게도 '중간 과정'이 있었다. 제2차 왕자의 난이 그것이다. 이방원의 형인 이방간이 주도하고 박포가 부추긴 사건으로 관찬 역사서에 기록된 제2차 왕자의 난은 최종 목표를 향한 이방의 움직임을 가속화시켜주는 기능을 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상식적이지 않은 측면들이 발견된다.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주는 사건이다. 정종 2년 1월 28일자(1400년 2월 22일자) <정종실록>에 따르면, 제2차 난의 발단은 이방간이 사냥을 명목으로 수백 명의 사병을 움직인 일이었다. 이 시절에는 귀족들이 병력을 이끌고 사냥을 나가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병력을 이끌고 사냥을 나간다는 사실 자체만 갖고는 쿠데타로 단정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방원은 그것을 쿠데타로 간주하고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방원이 세자가 되지 않았고, 이방간과 이방원 사이에 긴장감이 조성돼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이방간이 사냥을 간다며 병력을 움직였으니, 이방원이 쿠데타군으로 간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방간이 사냥을 나간 날, 이방원 측도 사냥을 나갔다. 군사를 먼저 움직인 쪽은 이방원이었다. 위 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의 병력은 사냥을 명목으로 새벽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이방간 측은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방원이 군사행동을 벌이려 한다고 의심할 수도 있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한번 더 일으킬지 모른다는 의심을 가질 만도 했던 것이다.
 
이날 이방간 측이 보여준 행동 속에는 쿠데타군의 일반적인 패턴에서 벗어난 것이 많았다.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황명이나 왕명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쿠데타군은 군주의 신병을 어떻게든 확보하려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방간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KBS 1TV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KBS 1TV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 KBS 1TV

 
왕자의 난 당일에 이방간 측은 임금인 정종과 태상왕인 이성계의 신병을 확보할 기회가 있었다. 위 실록에 따르면, 정안대군 이방원이 군사행동에 착수한 뒤에 이방간은 상장군 오용권을 정종에게 보내 "정안공이 저를 해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어서 제가 부득이하게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고자 하오니 청하옵건대 놀라지 마소서"라는 말을 전했다. 이는 이방간 측이 정종의 신병에 접근했음을 보여준다.
 
위 기록에는 이방간이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성계의 거처를 지나다가 이성계에게 거병의 동기를 해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성계는 건국시조이기 때문에 정종 대신 그의 신병을 확보해 왕명을 발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방간 군대는 그 기회를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런 뒤 이 군대는 그날 하루 동안 관군에 의해 손쉽게 진압됐다.
 
위 기록은 이방간을 배운 게 없고 어리석은 인물로 평가했다. 이방간이 설령 모자란 인물이었을지라도, 수백 명의 사병을 이끌게 되면 군사나 정치에 밝은 참모들의 보좌를 받기 마련이다. 쿠데타에 성공하려면 군주의 신병을 확보해야 한다는 상식을 아는 사람이 이방간 캠프에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방간이 태상왕과 정종의 신병을 확보할 기회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버렸다는 사실은 그가 그날 정말로 쿠데타 하려 한 게 맞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방원과 경쟁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야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날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게 맞나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운영하는 조선왕조실록 사이트(http://sillok.history.go.kr)는 위 사건을 정종 2년 1월 28일 사건으로 분류해놓았다. 이 분류에 따르면 제2차 왕자의 난은 그날 벌어진 사건이 된다.
 
그런데 정종 2년 2월 1일자(1400년 2월 25일자) <정종실록>에 따르면, 이날 이방원의 최측근인 하륜은 제2차 왕자의 난을 "어제의 일(昨日之事)"로 언급했다. 이 언급에 따르면, 제2차 왕자의 난은 정종 2년 1월 30일(1400년 2월 24일) 벌어진 사건이 된다. 1992년에 <석당논총> 제18집에 실린 정재훈 동아대 교수의 논문 '방간의 난에 대한 일고찰' 역시 이 사건을 정종 2년 1월 30일 사건으로 표기하면서 <정종실록>의 날짜 편제에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종 2년 1월 30일(1400년 2월 24일)에 벌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이방원이 후계자로 공식 지정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1398년 10월 6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고도 대권 행보를 위한 결정적 돌파구를 뚫지 못하던 이방원에게 활로를 열어주는 계기가 됐다. 쿠데타 바로 다음날 이방원을 세자로 삼는다는 공식 결정이 내려졌다고 <정종실록>은 알려준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이방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까지는 이를 뒤집을 결정적 증거가 없다. 하지만 <정종실록>에 묘사된 정황들을 고려하면, 이방원 측에 의해 기록이 과장됐거나 이방원이 이방간의 도발을 유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최초의 쿠데타로부터 공식 집권까지의 사이에 자주 등장하는 '중간 과정' 성격의 추가적인 쿠데타가 제2차 왕자의 난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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