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써클하우스>의 한 장면.

SBS <써클하우스>의 한 장면. ⓒ SBS

 
무한경쟁의 시대, 결과만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벗어나 과정을 즐기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성숙한 경쟁은 불가능한 것일까. 3월 10일 방송된 SBS <써클하우스>에는 2022 베이징 올림픽에서 활약한 쇼트트랙 국가대표 이승훈, 곽윤기, 이유빈, 정재원이 출연하여 '무한경쟁사회'와 '국가대표의 무게'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졌잘싸(졌지만 잘싸웠다)'라는 표현이 화두로 떠올랐다. 정재원은 "졌잘싸라는 말이 진 거는 진 거지 않냐, 선수들은 올림픽을 위하여 4년을 기다려야 한다. 경쟁에서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유빈은 "졌잘싸라고 하는데 지기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 메달이란 제가 저에게 주는 (그 과정의 노력에 대한) 보상심리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반면 최선참인 이승훈은 "최선을 잘했으면 졌잘싸도 납득이 된다"고 밝혔지만, 곽윤기는 올림픽 최다메달을 획득한 이승훈에게 "다 따봤으니 그런 것"이라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기록경신 은메달 VS 어부지리 금메달'이라는 설문에 대하여 3대 6으로 금메달 쪽으로 무게가 기울었다. 이승훈은 두 가지 상황을 모두 겪어봤다며 "솔직히 반반이다. 저는 둘다 좋았다"고 밝혔다. 곽윤기는 "어부지리 금메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선수가 끝까지 달리지 않았다면 그 기회는 잡지 못했을 것"이라는 소신을 드러냈다. 정재원도 "어부지리라고 해서 내 노력과 금메달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유빈은 선수중에서는 유일하게 기록경신 은메달을 선택했다. 이유빈은 월드컵 대회에서 3등을 달리다가 앞서 달리던 한국 선수들이 넘어지면서 어부지리로 1등을 차지했던 경험을 들며 "금메달을 땄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 실력이 아닌데 금메달에 대한 성취감이 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반면 월드컵 3차대회에서는 2위를 차지하고도 "'다음 대회에서는 금메달을 노려봐야지' 하는 목표가 생기고, '내가 이만큼 할 수 있구나'하는 성취감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댄서 리정 역시 유빈의 의견에 동의하여 "댄스배틀에서 저 스스로 떳떳한 무빙을 했다면 져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제가 못하고 이기면 오히려 찝찝하다"고 이야기했다.
 
출연자들은 모두 남다른 승부욕의 화신들이었다. 청순한 이미지의 한가인은 의외로 "졌다라는 말 자체가 싫다. 지는 게 싫어서 경쟁을 포기할 정도다. 남편에게 지는 건 더 용서가 안된다"라며 뜻밖의 승부욕을 드러냈다. 또한 한가인은 20대 또래 배우들을 보면서 혼자만의 남모를 경쟁심리 때문에 힘들었던 순간을 밝히기도 했다. 한가인이 선택한 길은 경쟁의 결과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경쟁 자체에서 아예 빠지려는 것. 젊은 나이에 결혼을 빨리 선택한 것도 이런 마음과 관련되어 있다고.
 
오은영은 한가인같은 유형에 대하여 "너무 잘하고 싶어서 100이 아니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못해서 창피할까봐 아예 안 하려는 심리"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라고 분석했다.
 
치열한 경쟁속에서 부상은 어쩔 수 없이 몇 번쯤 거치게 되는 인고의 과정이다. 국가대표들은 저마다 아찔했던 부상 경력을 회상했다. 이유빈은 습관성 탈골이 생겼고, 곽윤기는 발에 차여서 코가 함몰되고 스케이트날에 볼이 뚫려서 보조개가 된 적이 있다고도 고백했다. 그럼에도 곽윤기는 "피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무섭지만 부딪혀야 이 시간도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시간이 걸렸지만 트라우마를 극복한 비결을 밝혔다.
 
정재원은 어린 나이에도 발목 골절, 허리디스크 등 다양한 부상에 시달렸다. "어린 나이인데 이렇게 아픈데 나이 들어서 계속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 때문에 훈련마다 부상을 먼저 신경쓰게 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에 오은영은 "인간은 언제나 물리적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한계를 인정해야 무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리하면 오래 할 수 없다"라고 설명하며 "그러려면 내가 언제 무리하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곽윤기는 오은영의 주장에 동조하면서도 막상 지도자나 어른들이 '불가능은 없다. 한계를 넘어서라. 자신과 타협하지 말라'는 주장 등으로 '무리를 한계로 내모는' 현실을 지적했다. 곽윤기는 "나랑 타협하면 뭔가 죄책감이 든다"고 밝혔다. 이유빈도 "부상은 두렵지만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않다"고 고백했다.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압박감과 고정관념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노력과 타협의 적당한 경계는 어디일까. 모두가 인정하는 불굴의 노력파였던 이승훈은 정작 마지막 무대인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서는 예상 성적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동안 다 보여드렸지 않냐. 최선을 다해 올림픽 즐기고 결과는 하늘에 맡길 것"이라고 대답하며 실제로 편안하게 올림픽을 즐겼다는 일화를 밝혔다.
 
또한 '성적이 안나오면 내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자책하는 이유빈에게 "노력 안 하는 선수는 세상에 없다. 국가대표가 되고 올림픽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노력의 증명이다. 그리고 예체능은 노력과 결과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후배들에게 결과에만 집착하여 좌절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승훈은 후배들에게 충고하는 것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게 된다고 밝혔다. 정재원은 첫 올림픽이었던 평창 대회에서 경기 시작 10초를 앞두고 이승훈의 '괜찮아, 하던 대로 편안하게 해'라는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결승을 앞둔 상황에서는 '재원아, 벌써 2등 확정이다'라고 이야기해준 게 부담을 털어주고 큰 힘이 됐다고 고백했다.
 
 SBS <써클하우스>의 한 장면.

SBS <써클하우스>의 한 장면. ⓒ SBS

 
육체적인 부상보다 더 힘든 것은 마음의 부상이다. 곽윤기, 한가인은 모두 최근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 대중의 '악플'로 받았던 상처를 고백했다. 이유빈은 취미생활로 즐기던 댄스 때문에 비난을 받았던 경험을 밝히며 자기도 모르게 '그 악플이 맞았던 걸까?'라고 휘말리게 되는 심경을 토로했다. 
 
오은영은 "악플은 몸의 부상보다 심한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고 경계하면서 "우리가 악플을 볼 때는 비판과 비난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은 생각이 다른 의견이지만, 비난은 모욕이다. 이걸 구별하는 게 참 어렵다. 악플이 나를 향한 화살이라고 느끼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치열한 경쟁의 과정에서 저마다 겪게되는 정신적 공포감이 있다. 이유빈은 올림픽 계주 중 넘어졌던 순간의 기억을 트라우마로 꼽으며 지금도 영상조차 보기 힘들다고. 이유빈은 그 이유에 대하여 "첫 올림픽이었고 유일한 목표는 '넘어지지만 말자'였다"고 밝혔다. 베이징올림픽 시합을 앞두고 연습경기에서도 똑같이 넘어지는 일이 있었다고.
 
오은영은 "후배들이 생겨서 '넘어지면 어떡하죠?', '저 때문에 팀이 지면 어떡하죠'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이유빈은 잠시 생각하다가 "언니들을 믿어라. 자기 자신에게 모든 걸 돌리지 말라"고 할 것 같다고 답했다. 오은영은 "정답을 잘 알고 있다"고 미소를 지으면서 "그 답을 스스로에게 말해보면 된다"고 격려했다. 이어 "자신의 가장 창피한 트라우마와 흑역사를 극복하려면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이유빈은 출연자들과 함께 그날의 경기 영상을 4년 만에 함께 시청했다. 당시 경기에서 이유빈이 넘어지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팀원들이 모두 합쳐 결승진출을 이뤄냈다. 오은영은 "이건 흑역사가 아니라 레전드"라고 극찬했고, 정재원은 "저같으면 넘어지고도 세계신기록 세워봤냐고 자랑하고 다닐 것 같다"고 격려했다. 이유빈은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경쟁사회속에서 누구나 직면할 수 있는 공포심을 극복하는 각자의 비결이 언급됐다. 시험공포증 때문에 고통받는 시청자의 사연이 소개됐다. 학창시절 우등생이었던 한가인은 지금도 가끔 수능시험을 보는 꿈을 꾼다고 고백했다. 이유빈은 경기를 앞두고 스스로에게 긍정적인 주문을 외운다고 밝혔다. 오은영을 이를 '자율적 자기암시'라고 설명하며 남들의 격려보다 자기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밝혔다.
 
정재원은 시합 전날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밝혔다. 오은영은 "불면증에 걸렸을 때 너무 자려고 애쓰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다만 잠이 안 온다고 다른 걸 하면 뇌가 깨게 된다. 불을 끄고 눈을 감고만 있어도 잠을 잔 것과 90%같은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기지 못하더라도 경쟁을 즐긴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승훈은 "즐길 수 있다"고 답하며 사람마다 '즐긴다'의 개념과 방식에 다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곽윤기처럼 화려한 쇼맨십이 있을 수도 있고, 조용히 경기에 집중할 수도 있고, 혹은 올림픽 현장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정재원 역시 동의하며 "성격상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스케이트 자체가 너무 재미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자체가 즐거웠다"라고 밝혔다.
 
반면 이유빈은 "'즐긴다'는 것과 '할 수 있다'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시합에만 집중하고 몰두하다보니 즐기지 못했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지치게 되더라"고 고백했다. 특히 이번 올림픽에서 압박감이 컸다는 이유빈은 "부담을 이겨냈다기보다는 계속 싸워냈다"고 이야기하며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곽윤기는 "올림픽을 3번 나가면서 가장 후회했던 게 메달 따는 데만 목을 맸던 것"이라면서 "메달도 안 남고 올림픽에서 느꼈던 추억이나 감정도 남지 않더라. 그래서 회의감이 들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번 올림픽에서는 후배들에게 "너의 가치를 메달색으로 정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줬다고.
 
그런데 오은영은 곽윤기의 밝고 거침없는 언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경쟁을 즐기지 못하는 것 같다"고 예리하게 분석했다. 유쾌한 모습조차도 경쟁의 부담감과 긴장감을 이겨내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라는 것. 대신 "본인은 못 즐기지만, 후배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앞장서는 느낌"이라고 곽윤기를 분석했다.
 
곽윤기는 공감하며 "후배들은 앞으로도 올림픽에 몇 번 더 나갈 기회가 있으니까. 근데 저는 베이징 때 즐기지 못했다"고 고백하면서 "시합전에 최악의 시나리오를 많이 그린다. 그래야 그 상황에 직면했을 때 상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승기는 곽윤기가 베이징올림픽 인터뷰에서 은메달을 따고도 "기대만큼 못해서 국민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던 순간을 거론하며 안타까워했다. 곽윤기는 "금메달을 못 딴 아쉬움보다는, 국민들에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는 속내를 고백했다. 또한 경기중에 본인의 실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맏형으로 후배들이 의지할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었다. 준비한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컸다"고 당시의 속사정을 밝혔다.
 
하지만 국민들은 메달의 색깔보다 선수들이 흘린 땀과 노력의 가치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오은영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속상했던 것 같다. 그보다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올림픽을 위하여 수많은 과정을 거쳐왔던 본인이 바로 금메달이다"라고 격려하며 곽윤기를 감동시켰다.

"국가대표의 의무는 메달을 획득하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주는 것이다. 그걸로 다해준 것"이라는 오은영의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국제 대회마다 남아있는 성적지상주의 문화와 선수들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 현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오은영은 국가대표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 MZ세대에도 만연해있는 '경쟁의 압박'에 대하여 "몸과 마음에는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다. 부디 하루에 10분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않고 멍때리는 시간을 가져볼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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