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시절이 있었다. 소셜 미디어에 '투표 인증샷'을 올리는 것만으로 특정 정당,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의사표현이라 간주 받던 시절이. 틱톡은 상상도 못했고, 유튜브가 흥하기 전이었으며 트위터가, 인스타그램이, 페이스북이 국내에서 정착하던 2010년대 초반이 그랬다.

맞다. 20대 대선에서 무려 36.93%의 투표율을 기록한 사전투표도 도입되기 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할 수밖에. 이제 사전투표는 젊은 층이, 본 투표는 노년 층이란 전통적인 공식도 깨진 지 오래 아닌가.

인증샷 역시 그랬다. 스마트폰이 지금처럼 널리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각종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이들 역시 비교적 젊은 층이었고, 소위 '얼리어답터'로 분류되는 이들이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인증샷 자체가 연예뉴스를 통해 조명 받는 연예인들이나 유명인, 문화예술인들도 마찬가지였고.

그 투표 인증샷 자체가 특정 정당이나 진영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전유물일 때가 있었다는 얘기다. 소름 돋는 것은 그 인증샷이 일종의 '블랙리스트'로 활용됐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리라. 공교롭게도, MB 정부 시절 국정원 블랙리스트로 낙인 찍혀 고초를 받았던 방송인 김제동, 김미화씨나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 모두 그 당시 트위터 사용자였다. 투표 인증샷을 게시하기 주저하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이후 구체화 된, 피해자들이 선명한 블랙리스트의 기억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듯 싶다.

투표 인증부터 특정 후보 지지까지 
 
 방송인 겸 가수 데프콘이 9일 오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투표인증샷

방송인 겸 가수 데프콘이 9일 오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투표인증샷 ⓒ 데프콘 인스타그램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소셜 미디어 시대가 도래한 이후, 투표 인증은 선거관리위원회조차 독려하는 자연스러운 정치참여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중이다. 이번 대선도 마찬가지다. 트위터 실시간 검색어는 '투표 인증'이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중이다. 인스타그램 역시 투표인증이 인기 해시태그를 점령했다. 일반인은 물론 유명인과 연예인들의 투표 인증도 줄을 잇고 있다.

그 중 방송인이자 가수 데프콘은 9일 오전 파란색과 빨간색 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상의를 입고 인증샷을 찍어 올려 화제가 됐다. 특정 정당,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는 것을 경계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의상이었다. 이처럼 투표 인증 자체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에 참여하는 전국민의 유희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연예인들의 특정 후보 지지는 '밥줄이 걸린' 문제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20대 대선 본투표 하루 전날인 지난 8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가수 김흥국이 진행자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딱 그랬다.
 
 방송인 김흥국씨가 24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팔달문 앞에서 열린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국민과 원팀' 수원 집중 유세에서 지지연설을 하고 있다.

방송인 김흥국씨가 2월 24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팔달문 앞에서 열린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국민과 원팀' 수원 집중 유세에서 지지연설을 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윤석열 후보를 지지한다는 김흥국은 "내일 선거 딱 끝나면 프로그램 DJ자리로 돌아가시는 겁니까?"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다시 연락 올지 그건 모릅니다"라며 이런 대답을 내놨다.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김흥국 특유의 화법 속에 진심이 숨겨져 있었다.
 
우리가 승리해야지 승리 안 하면 연락 오겠습니까? 좀 불안합니다. 사실. 먹고 살아야 되는데 (웃음) 생방 연결된 김에요. MBC 라디오 정말 제가 친정집인데 신곡을 두 곡을 냈어요. 살아봅시다, 걸어가는 중입니다, 어떻게 예전에 알던 PD 작가들이 노래 한번 안 틉니까? 이런 것도 문제입니다. MBC가.

특히 대중문화예술인들은 또 다른 창작자들, 즉 감독이나 작가, 연출가들의 선택 없인 그 '밥줄'을 이어나갈 수 없는 직업이라 할 수 있다. 또 대부분 그 선택은 대중들의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유권자들이 바로 그 대중들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전대미문의 인기를 누린 '밈'의 주인공이자 '개비스콘좌'로 유명한 배우 김하균. 그는 선거 막판이던 지난 7일 민주당 부산 유세에 동참, 이재명 후보와 함께 바로 그 개비스콘 광고 속 연기를 재현했다.

앞서 똑같은 방식의 지지 인증샷을 공개했던 김하균 배우에게 쏟아진 격려 혹은 우려도 바로 '연예인이 밥줄을 걸고 저러는 건 대단한 거다'란 반응이었다. 보편화된 투표 인증을 넘어 자신의 정치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지지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것에 대한 대중들의 우려가 현존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20대 대선이 끝난 이후에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7일 오후 부산 남포동 창선삼거리 유세에서 소화제 광고로 인해 ‘개비스콘좌’로 알려진 배우 김하균씨와 광고 패러디를 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7일 오후 부산 남포동 창선삼거리 유세에서 소화제 광고로 인해 ‘개비스콘좌’로 알려진 배우 김하균씨와 광고 패러디를 하고 있다. ⓒ 이희훈

 
그러한 우려 속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걸 주저하지 않고 대선후보 지지에 나선 모든 대중문화예술인들의 용기에 박수와 응원을 보내는 바다. 또 사전 투표 및 본 투표일에 투표 인증을 하고 또 마치 비유나 은유를 동원해 정치적 의사 표명에 나선 이들에게도 찬사를 보낸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지 클루니나 레이디 가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뉘어 적극적인 의사 표현에 나서는 미국 내 문화예술인들의 표현의 자유가 선거 때마다 부러움의 대상이 됐던 때가.

그런 거칠 것 없는 사회 분위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볼 수 있다. 한 쪽 진영에선 여전히 '좌파 블랙리스트' 운운하고, 이에 반발하는 문화예술가들이 기자회견에 나서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분명하고 공통된 것은 블랙리스트 없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마다할 문화예술인들은, 또 대중은 없으리란 사실일 것이다. 균형을 강조한 데프콘과 각자 대선 후보 지지를 선언한 김흥국과 김하균, 이들 모두에게 이번 20대 대선이 결과를 떠나 민주주의 축제의 장으로 남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물론, 대선이 끝난 이후에도 '밥줄' 걱정은 없어야 할 테고.   
20대대선 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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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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