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김민정과 문근영, 박신혜, 고아성, 박은빈, 유승호, 김유정, 김소현, 김향기, 김새론 등 철저한 관리와 본인들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아역에서 성인연기자로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1980~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역스타들이 성인연기자로 성공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지나친 관심을 극복하기가 힘들었고 대중들에게 박힌 아역배우의 고정된 이미지도 성인연기자 변신에 방해가 됐다.

'국민드라마' <모래시계>에 출연했던 두 청소년 배우도 기대만큼 대형 스타가 되지 못한 사례. 최민수의 아역을 연기했던 김정현은 단 2회 출연으로 단숨에 충무로와 방송가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하지만 주연을 맡았던 영화 <나에게 오라>와 <청춘>이 연속으로 흥행에 실패하며 슬럼프에 빠졌다. 김정현은 2009년 <선덕여왕>, 2010년 <자이언트>, 2013년 <기황후>에 출연하며 데뷔 초 청춘스타 이미지와는 다소 결이 다른 연기자로 자리 잡았다.

<모래시계>에서 박상원의 아역을 연기했던 홍경인 역시 성인 배우로의 활약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연기를 통해 '리틀 안성기'라는 별명을 얻었던 홍경인은 성인이 된 후 자신의 연기력에 맞는 캐릭터를 찾지 못하며 이미지가 소비됐고 지금은 드라마와 뮤지컬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첫 주연작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나올 때만 해도 관객들은 훗날 그가 '국민배우'로 성장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993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4개 부문을 휩쓸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993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4개 부문을 휩쓸었다. ⓒ (주)대동흥업

 
'국민배우'로 성장하지 못한 '리틀 안성기'

1990년 어린이드라마 <꼴찌수색대>를 통해 연기를 시작한 홍경인은 1991년 어린이영화 <텔레파시 여행>을 거쳐 1992년 <구로 아리랑>을 연출했던 박종원 감독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출연했다. 이문열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작은 시골마을 국민학교의 급장 엄석대를 연기한 홍경인은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백상예술대상 특별상과 춘사영화제 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 단숨에 천재 배우로 떠오른 홍경인은 <제3공화국>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역,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 독고영재의 아역, <젊은이의 양지>에서는 하희라와 전도연의 막내 동생 수철을 연기했다. 그렇게 착실하게 필모그라피를 쌓아가던 홍경인은 1995년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대한민국 노동계의 신화적인 인물 전태일을 연기했다.

현실에서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 홍경인 역시 직접 몸에 불을 붙이는 엄청난 열연을 펼쳤고 홍경인은 만 19세의 나이에 1995년 춘사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는 27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은 역대 최연소 남우주연상 기록이다. 하지만 안성기의 뒤를 이을 국민배우 0순위 후보로 불리던 홍경인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버금가는 대표작을 만나지 못했다.

홍경인은 1990년대 후반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과 드라마 <왕초>를 통해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연기했던 캐릭터는 주인공이 아닌 '감초'에 가까웠다. 1999년에는 뛰어난 가창력을 살려 솔로앨범을 발표했지만 <남자 셋 여자 셋>과 <왕초>에서의 코믹 이미지 때문에 대중들의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2002년 주연을 맡았던 코미디 영화 <남자, 태어나다> 역시 서울관객 1만 3000명으로 흥행 참패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군복무 후 뮤지컬 배우로 컴백한 홍경인은 <선덕여왕> <광개토대왕> 등 사극에 출연하며 연기를 재개했다. 2013년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는 밤무대 가수 란(이채영 분)을 짝사랑하며 원류환(김수현 분)에게 어설프게 싸움을 가르치는 동네 파출소 말단 순경 조두석을 연기하기도 했다. 홍경인은 현재 KBS 1TV를 통해 방영되고 있는 대하드라마 <태조 이방원>에서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의를 연기하고 있다.

전후 한국사회를 국민학교 학급에 투영한 작품
 
 엄석대 역을 맡은 홍경인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스크린을 장악했다.

엄석대 역을 맡은 홍경인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스크린을 장악했다. ⓒ (주)대동흥업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1987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이문열 작가가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젊은 날의 초상>과 <황제를 위하여>(1989년 드라마 제작),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이문열 작가의 작품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고 흥행에도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실제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N포털사이트에서 네티즌 평점 9.32점을 받고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역은 단연 엄석대를 연기한 홍경인이었다. 영화 속에서 엄석대는 국민학교 5학년생으로 나오지만 한병태(고 태민영/고정일 분)를 구타하려는 6학년 선도부를 말리고 중학생과 철길에서 담력내기를 할 정도로 학교를 장악하고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나온다. 선생님 앞에서는 완벽한 급장이지만 뒤에서는 학급 간부들을 구타해 기강을 잡는 것은 마치 1980~1990년대 군대 내무반을 보는 듯하다.

한병태의 회상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대부분 무능하고 어리석게 표현된다. 초반 병태가 석대의 악행들을 고발했을 때도 교사들은 석대를 감싸고 병태를 혼내기 바쁘다. 시종일관 석대만 감싸고 학부모로부터 촌지까지 받아먹는 무능하고 부패한 5학년 담임 최 선생(신구 분)은 말할 것도 없다. 병태의 아버지(우상전 분)는 지방으로 좌천돼 아들에게 넋두리만 늘어놓고 어머니(김혜옥 분) 역시 자신의 체면만 신경 쓰느라 아들의 고민은 뒷전이다. 

이처럼 꿈도 희망도 없는 학교에 젊은 김 선생(최민식 분)이 전근을 오면서 '엄석대 월드'는 엄청난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김 선생은 석대의 악행들을 찾아내고 이를 묵인 및 방조했던 아이들을 꾸짖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제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좋은 선생의 모습 같다. 하지만 김 선생 역시 세월이 흘러 국회의원이 되고 최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동네 유지들에게 굽신 거린다. 정의와 자유를 외치던 열혈교사도 권력 욕심 앞에 타락한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엄석대가 한병태를 비롯한 간부급 학우들과 여학생들을 불러 인적이 드문 동굴에서 밤 늦게 술파티(?)를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자리에서 학생들은 살아 있는 토끼의 배를 갈라 구워먹고 사과의 윗부분을 안쪽으로 파서 술잔을 만든다. 군대에서도 전시에나 있을 법한 다소 극단적인 장면들이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 대한민국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다. 

1700만 배우 최민식이 정의구현하던 시절
 
 최민식은 파릇파릇한(?) 30대 초반 시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 아시아 태평양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최민식은 파릇파릇한(?) 30대 초반 시절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 아시아 태평양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 (주)대동흥업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대부분의 이야기가 한병태가 최 선생의 장례식장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아역배우들의 장면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영화 속 화자를 연기하며 그나마 분량이 많았던 중년의 한병태 역을 맡은 고 태민영은 1970년대부터 연기활동을 시작해 <노다지> <용의 눈물> <태조왕건> 등에 출연했지만 2000년 간암으로 4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 <명량>에 출연했던 최민식은 데뷔 초였던 1992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의 왕국을 무너트리는 김 선생을 연기했다. 물론 김 선생은 나이가 들어 국회의원이 되고 권력 앞에서 고개 숙이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김 선생은 엄석대가 쌓아 올린 견고한 성에 균열조차 낼 엄두도 내지 못하며 답답함이 극에 달할 때 엄석대의 악행들을 시원하게 응징하면서 관객들에게 묘한 쾌감을 선사했다. 

후반부 최민식이 연기한 김 선생이 관객들에게 사이다를 선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반부 신구 배우가 연기한 최 선생이 관객들에게 물 한 모금 없이 고구마를 다량으로 섭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교사의 모델이나 다름 없었던 최 선생은 학급의 대소사를 엄석대에게 일임하며 엄석대의 악행들을 부추겼다. 평소 인자한 이미지의 신구 배우가 연기했던 몇 안 되는 악역(?)이었다.

엄석대 패거리(?)의 동굴파티에 초대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라는 퇴폐적인(?) 가사의 노래 <댄서의 순정>을 불렀던 여학생 역은 아역 배우로 활동하던 김윤정이 맡았다. 1992년 고현정의 뒤를 이어 이온음료의 광고모델로 선발되기도 했던 김윤정은 1996년 13대 뽀미언니로 활약했다. <뽀뽀뽀> 이후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김윤정은 지난 2019년 SBS 예능 프로그램 <불타는 청춘>에 출연하며 오랜만에 시청자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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