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애는 늙은 대학생이 되었다. 아니 학사인 나와 달리 석사학위까지 거머쥐었다. 천재 아니면 독종이다. 중요한 것은 학위가 아니다. 1960~1970년대 한국 사회 산업화 과정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무릎 꿇고 일하면서 두 손으로 한국경제를 떠받친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살아야 했던 팍팍한 삶과 척박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싸움 속에서 그들이 민주주의를 체득하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조금도 왜곡과 과장 없이 생중계로 보여주는 이 책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 <열세 살 여공의 삶: 한 여성 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 (사) 청소년 탁틴내일 이사장 최영희 추천사 '어린 여성 노동자의 감동적 성장기' 가운데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청계천 평화시장의 소녀 미싱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의 개봉일(1월 20일)이 곧 다가온다. 신순애(69살)씨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이다.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전태일 말고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들. 그녀들의 기억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정성스레 축복해 주는 영화적 손길. 빛과 어둠 속에서 눈물도 웃음도 하나로 뒤섞이는 라스트에 이르면, 누구나 다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왜 꼭 극장에서 보아야 하는지… "라며 <미싱타는 여자들>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수많은 감독과 평론가들도 개봉 전부터 "반드시 봐야 할 영화"로 <미싱타는 여자들>을 꼽았다. 김정영 감독은 서울시 봉제역사관 디지털 영상 기록전산화(아카이빙) 작업을 위해 봉제 노동자 32인의 구술생애사를 취합하는 과정에서 70년대 '청계피복노동조합' 출신의 미싱사 여공을 만나게 된다.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씨가 그 주인공이다. 본인 스스로 평화시장 미싱사 출신이라고 밝히는 이들은 어느덧 손녀를 둔 할머니가 됐다.

세 명의 미싱사 가운데 한 사람인 신순애씨를 12일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다음은 그녀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신순애 대담하는 <미싱타는 여자들> 주연 신순애 씨

▲ 신순애 대담하는 <미싱타는 여자들> 주연 신순애 씨 ⓒ 이윤옥

 

- 요즘의 근황은 어떤가?
"지난 2018년부터 2년간은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촬영 등으로 바빴다. 지난해에는 송곡여자중학교의 '동네 어르신하고 소통하기 프로그램'에 초대되어 학생들에게 여공시절의 이야기와 쉽게 풀이한 노동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큰 반향을 얻었다. 코로나19가 사라지면 나의 경험을 학생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에 힘을 쏟고 싶다."

- 청계천 평화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언제인가?
"13살 때였다. 고향 남원에서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한 뒤에 먹고 살기 위해 청계천 평화시장에 갔다. 그때가 1967년이었다. 봉제공장의 다락방에서 허리 한번 펴지 못한 채 여린 여공들은 16~20시간씩 일하면서도 월급을 못 받을까봐 벌벌 떨던 시절이었다. '노동자의 권리'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어린 여공들은 '시다(미싱사 보조)'를 거쳐 미싱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3~4년간 배를 곯아가며 미싱일을 배워 미싱사가 되었지만,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내가 미싱에서 손을 놓은 것은 50대였으니 40여 년 미싱을 탄 셈이다."
 
- 평화시장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었다. 이른 새벽, 양은 도시락에 밥과 김치를 담아 만원 버스를 타고 청계천에 내리면 김칫국물이 쏟아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문제는 그렇게 가져온 도시락조차 시다생활 때는 먹을 시간이 없어 도로 집으로 가져간 적도 많았다. 점심 한 시간 동안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일감을 처리해 놓아야 해서 특히 고생이 컸다. 새벽별 보고 나와서 통금 직전에 집에 들어가는 생활이 지속됐다. 열세 살 어린 몸으로 감당하기에 벅찼다. 영양실조로 쓰러진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어린 마음에 화가 났던 것은 시내버스 탈 때 교복을 입은 애들은 5원이었는데 나와 같은 노동자들은 10원씩 냈다. 같은 나이라도 학생과 노동자의 버스 삯이 두 배나 차이가 나는 시절을 산 것이다. 그때 10원어치 콩나물을 사면 식구들이 종일 먹을 수 있을 만큼 큰돈이었다. 어린 여공에게는 말이다."
 
- 노조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나는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건강검진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어린 소녀들은 하루 13~14시간을 단 10분의 휴식도 없이 일했으며 휴일도 한 달에 한두 번이 고작이었다. 나는 평화시장에서 '7번 시다', '1번 미싱사' 식으로 불렸다. 이름이 있지만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던 시절이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자기 몸에 불을 질렀다. 전태일 열사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꾸고자 목숨을 던진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청계노조가 탄생했다. 청계노조에 가입하면서 내 이름 '신순애'를 비로소 찾게 됐다. 노동자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처음에는 전태일이 누군지 몰랐지만, 차차 노조를 통해 노동자로 다시 태어났고 노동조합의 열성적인 간부가 되었다."
 
이소선과 신순애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 (앞줄 왼쪽),뒷줄 두번째 오른쪽에서 두번째 흰옷 차림이 신순애((1979.8.4 아카시아 야외교육) 여주, 아카시아는 청계노조 회원들의 친목단체다

▲ 이소선과 신순애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 (앞줄 왼쪽),뒷줄 두번째 오른쪽에서 두번째 흰옷 차림이 신순애((1979.8.4 아카시아 야외교육) 여주, 아카시아는 청계노조 회원들의 친목단체다 ⓒ 신순애

 
- 노조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이 있었다면?
"노조 탄압이다. 당시 노조활동은 '빨갱이'로 낙인찍혀 활동이 쉽지 않았다. 청계노조는 1960~1970년대 참혹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고자 전태일 사후에 결성되었지만, 당국의 감시가 노골적으로 이뤄져 간부였던 내게는 항상 형사들이 따라붙었다. 자취하던 처녀 때부터 결혼한 이후까지 줄곧 감시대상이 되어 운신의 폭이 없었다. 형사들로부터 나의 노조간부 사실을 귀띔 받은 집주인은 수시로 방을 빼도록 강요했고 그때마다 셋방을 옮겨야 했다. 특히 1983년부터 1985년까지는 최악의 시간이었다. 노조 경력 때문에 취직이 안 돼 재단사를 하던 남편과 함께 집에서 재봉틀을 들여다 놓고 하청일을 받아다 일을 했다. 그 와중에도 감시는 계속됐고 2년 동안 무려 18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했다. 노조 간부로 뛴 것을 처음으로 후회하기도 했다."
 
- 뒤늦게 대학교 진학을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2006년, 53살 때 성공회대학에 NGO특별전형으로 사회과학부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중퇴인 나는 2003년에 초등검정고시, 2004년에 중등 검정고시 자격을 땄다. 두 딸아이를 둔 엄마로서 애들의 사춘기를 걱정하여 스스로 성교육 프로그램을 받고자 '탁틴내일'에 나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청소년 상담을 맡게 되었다. '탁틴내일'은 여성과 아동, 청소년이 스스로 중심이 되어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꿈을 현실화하고, 봉사로서 사회를 더욱 건강하고 밝게 변화시키는 장이 되고자 1995년 3월 1일 창립한 여성과 아동, 청소년을 위한 사회단체다.
 
그때 청소년들이 학업을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부터 공부해야 겠다는 각오가 생겨 대학에 도전했다. 내친김에 대학원 과정도 마쳤는데 지도교수님께서 한국에는 생애사(生涯史)와 관련된 논문이 없지만, 유럽에는 자신의 체험을 담은 논문이 많다며 독려를 해주어 계속 공부를 하게 되었다. <열세 살 여공의 삶: 한 여성 노동자의 자기역사쓰기>(2014.한겨레출판)란 책은 나의 석사논문을 토대로 대중을 위해 쓴 책이다."
 
노동교실  연소근로자 위안잔치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 노동교실  연소근로자 위안잔치(1976.12.19), 앞줄 오른쪽 첫번째가 신순애

▲ 노동교실 연소근로자 위안잔치 전국연합노조 청계피복지부 노동교실 연소근로자 위안잔치(1976.12.19), 앞줄 오른쪽 첫번째가 신순애 ⓒ 신순애

 
-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의 인연에 대해 말해달라.
"이소선 여사를 저는 어머니라 부른다. 이소선 어머니는 아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버리고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로의 삶을 사신 분이다.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투쟁하고 감옥에도 함께 가셨다. 청계노조에서 투쟁을 할 때마다 경찰들이 무장 진압복을 입고 권총을 차고 쳐들어오곤 했는데 그때 무섭고 두려움에 떨던 우리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든든한 철갑옷이 되어 주신 분이다. 그런 담대한 어머니가 계셨기에 저는 두려움을 참고 투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처녀 때 셋방 주인이 나를 미행하는 형사들로부터 언질을 받고 나에게 방을 빼라고 했을 때 "순애야 창동 우리집으로 퇴거부터 해라"라고 다독여 주시는 등 평생을 노동자 편에 서서 살갑게 챙겨 주셨다."

- 김근태치유센터에 기부한 '박재익·신순애 부부 장학금'은 무엇인가?
"김근태기념치유센터는 (사단법인) 인권의학연구소의 부설기관으로 인권피해자의 치유지원사업을 주로 담당하는 곳이다. 지난해 '국가폭력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하여 받은 돈을 모두 기부했다. 나는 1977년 노조활동 중 '노동교실 되찾기 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에서 1년여를 살았고, 재단사였던 남편은 1980년 합수부에 끌려가 1달 넘게 고문 등을 받은 전력이 있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다가 국가권력으로부터 받은 고문과 탄압을 겪은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귀한 용처라고 여겨져 주저 없이 기부했다. 노동자 출신 남편 박재익은 남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며, 항상 나를 후원하는 후원자의 삶을 살아왔다."

열세 살, 한참 부모님의 사랑 속에 맘껏 뛰어놀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성장해야 시기에 먼지 풀썩이는 청계천 평화시장의 다락방에서 허기를 달래며 수출 산업의 일꾼으로 뛰었던 그녀. 척팍한 현실 속에서 노동교실의 야학을 다니며 문자를 독해하고 노동자의 권리에 눈떠갔던 소녀 신순애를 우린 기억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우리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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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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