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탄적일천> 포스터

<해탄적일천> 포스터 ⓒ (주)에이썸 픽쳐스

 
허우 샤오시엔, 차이밍량과 함께 대만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불렸던 에드워드 양의 데뷔작이 무려 39년 만에 개봉을 앞뒀다. 네 번째 작품 <고령가 살인 사건>이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를 휩쓸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나 그의 첫 작품은 한국에 선보인 적이 없었다. <해탄적일천> 이야기다.

영화는 한 여자가 여성으로 완성되기까지의 이야기다. 1960~1970년대 대만 사회를 배경으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고단함을 그렸다. 자녀의 결혼 상대자를 가장이 정하는 강압적 분위기와 사회진출이 쉽지 않은 상황 등이 자연스레 비춰진다. 일견 기 드 모파상의 걸작 <여자의 일생>을 대만판 영화로 보는 듯한 인상까지 남는다.

<해탄적일천>은 13년 만에 대만에 온 피아니스트 탄웨이칭에게서 시작한다. 호텔에서 연습에 매진하던 아침, 웨이칭에게 메모 한 장이 도착한다. 메모를 보낸 이는 린자리, 대만에서 대학교를 다닐 적 알고 지낸 동생이다. 자리를 만난 건 그녀의 오빠 덕분이었다. 그와 웨이칭은 대학시절 연인이었으나 끝내 헤어지고 말았다. 남자는 병원장인 아버지가 점지한 여자에게 장가를 갔고 웨이칭은 도망치듯 유학을 떠났던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고국에서 웨이칭은 그의 동생 자리를 만난다.
 
 <해탄적일천> 스틸컷

<해탄적일천> 스틸컷 ⓒ (주)에이썸 픽쳐스

 
13년 만의 만남, 무슨 얘기가 오갔을까

웨이칭과 자리는 한적한 카페에서 만난다. 오랜만이지만 보고팠던 얼굴, 서로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결혼은 했느냐고 묻는 웨이칭에게 자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웨이칭은 다시 묻는다. "그럼 집에서 정해준 상대야?" 자리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자리는 오빠와 다른 선택을 했다. 사랑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랐던 오빠의 불행한 삶을 보고 그와 같은 결정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리는 비오는 어느 날 밤 집을 나와 애인인 더웨이에게 향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더웨이와 혼인신고를 하고 살림을 합친다. 그렇게 부부가 된 것이다.

이야기는 자리의 회상으로 옮겨간다. 더웨이와의 행복할 것만 같았던 삶이 어떻게 망가지게 됐는지를 영화 내내 보여준다. 더웨이는 가까이 지내던 친구의 부름으로 대기업에 자리를 얻는다. 바람둥이였던 친구가 대기업 회장의 딸을 꾀어낸 덕분에 그와 함께 기업을 운영하는 요직을 차지한 것이다.

더웨이는 바쁜 일상 속에서 조금씩 자리에게 소홀해져 간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술자리와 여성들의 유혹, 떨어져가는 체력, 그런 그에게 똑같은 애정을 요구하는 자리의 태도 따위가 모두 그가 변해가는 이유가 된다. 자리는 실망하고 또 실망하며 조금씩 무너져간다. 분명히 처음엔 그렇지 않았건만, 자리에겐 더웨이가 모든 것이고 더웨이에겐 그저 집에 있는 안사람일 뿐이다.
 
 <해탄적일천> 스틸컷

<해탄적일천> 스틸컷 ⓒ (주)에이썸 픽쳐스

 
흔한 사랑 대신 한 여성의 완성을 그리다

에드워드 양은 영화를 그저 남녀의 흔한 사랑이야기로 만들지 않았다.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의 힘이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것이 파괴하는 아까운 것들을 가능한 선명히 잡아내려 한다. 자리의 용기와 순수와 사랑이 악의 없는 것처럼 보였던 무심한 것들에 어떻게 집어삼켜지는지를, 그녀의 오빠의 나약함과 고지식함과 순종적인 태도가 또 어떻게 파괴됐는지를 말이다.

대만과 한국의 사회상이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적지 않아 살펴보는 즐거움도 크다. 오랜 일제강점기를 겪고 일본풍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만사회의 단면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가부장적 분위기와 옛 여성들이 놓였던 차별적 상황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 모든 고충 속에서 영화는 끝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해탄적일천>은 에드워드 양과 크리스토퍼 도일의 첫 영화란 점에서 영화사적 의미도 크다. 주지하다시피 크리스토퍼 도일은 왕가위의 대표작 <중경삼림> <화양연화>를 촬영한 아시아 최고의 촬영감독으로, 이 영화가 그의 첫 작품이다. 영화팬이라면 이 영화의 뒤늦은 개봉을 놓쳐선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