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태종 이방원>은 1회부터 고려 멸망 4년 전에 있었던 1388년 위화도회군을 조명했다. 이성계(김영철 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왕명을 거부하고 요동(만주)이 아닌 개경으로 군대를 유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에 따라 우왕(임지규 분)과 최영 장군(송용태 분)이 이성계 가족들의 신병에 위협을 가하고 이성계 식솔들이 긴급 대피하는 장면들이 방영됐다.
 
 KBS 1TV <태종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

 
고려 멸망의 원인이 된 위화도회군은 우왕의 요동출병 명령에 기인했다. 우왕의 명령은 표면적으로는 신흥 최강국인 명나라의 외교적 압력 때문이었다. 명나라는 이전 패권국인 몽골(원나라)이 차지했던 철령 이북의 고려 땅을 자신들이 차지하겠다고 나섰다. 자신들이 몽골의 지위를 계승했다는 억지 명분을 내세우며 철령위라는 행정구역을 임의로 설치했다. 이성계에게 출병 명령이 떨어진 표면적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오로지 그런 이유만으로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를 내보낸 것은 아니다. 이성계는 우왕·최영을 도와 그해 상반기에 이인임 정권을 무너트리고 공민왕의 아들인 우왕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런 직후에 우왕·최영이 이성계를 최강국 명나라와의 전쟁터로 내몰았다. 토사구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할 만한 조치였다.

당시 명나라는 양자강(양쯔강) 쪽의 남경(난징)에 도읍을 두고 있었다. 명나라가 북경(북평·베이징)으로 천도한 것은 1421년이다. 그래서 1388년 당시 명나라의 주력 병력은 주로 남쪽에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도 명나라가 고려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또 고려를 치려면 만주의 여진족부터 상대해야 했다. 명나라는 고려보다 여진족 군소집단들의 발호 가능성을 더 우려했다. 여진족이 과거에 금나라를 세워 중국 한족을 억누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령위 설치에 대한 고려의 맞대응이 명나라와의 전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이는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을 추진한 핵심 동기가 명나라의 침공 가능성에 대한 공포심에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요동정벌을 통해 만주로 영향력을 팽창하려는 목적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주주 이성계'를 위험한 데로 내몰려는 동기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굳이 시도하지 않아도 될 군사행동을 강행했다가 쿠데타를 유발하고 왕조 멸망까지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왕과 최영의 자충수였다고 평가해도 과하지 않다.

우왕의 출병 명령과 이성계의 배신
 
 KBS 1TV <태종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

 
우왕의 출병 명령과 이성계의 배신은 몽골에서 명나라로 패권이 교체되는 원·명 교체기를 배경으로 했다. 1368년 명나라 건국으로 몽골이 중국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쫓겨난 것에 불과했다. 중국 북쪽의 초원지대는 여전히 몽골족이 장악했다. 그래서 원·명 교체로 인한 진동이 계속됐고, 이것이 일본·오키나와뿐 아니라 한민족에도 영향을 줬다. 그런 상황에서 1388년의 사건들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대격동의 시기에 우왕이 요동정벌을 추진하지 않았고 이성계가 5만 대군을 지휘하게 될 기회도 없었다면, 고려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을 통과하고 훨씬 오랫동안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국가의 명멸은 아무 때나 일어나지 않고, 대개의 경우에 국제질서 교체를 배경으로 일어난다. 규모를 갖춘 국가일수록 이 패턴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가 원·명 교체기의 혼란을 극복했다면 그 다음 교체기까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판단을 뒷받침하는 것 중 하나는 고려왕조의 기대수명이다. 기원전 202년에 건국된 한나라 이래로 중국 역대 왕조들의 평균 존속 기간이 64.8년인 데 반해,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한민족의 평균수명은 상당히 길었다. 조선왕조만 5백년을 넘긴 게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가야 같은 나라들도 그랬다. 고구려·백제·신라는 그 기간을 훌쩍 뛰어넘었다. 최장수국인 신라는 991년간 존속했다. 이는 한민족 민중들을 통제하는 왕실과 지배층의 메커니즘이 잘 작동했음을 뜻한다. 이는 한민족의 사회진보가 지체된 원인 중 하나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민족 왕조들의 평균수명이 길었기 때문에, 건국 470주년인 1388년 당시의 고려인들이 볼 때에 이 왕조는 얼마든지 더 생존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실이든 아니든 세상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힘과 의미를 낳는다. '고려는 100년밖에 못 갈 것'이라는 관념이 퍼져 있었다면, 반란세력이 이를 활용해 고려왕조를 조기에 멸망시켰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고려왕조에서는 그런 관념이 확산되지 않았다.
 
당나라 역사서인 <신당서>의 고구려 열전에 따르면, 서기 668년에 고구려를 상대로 최종 침공을 개시하기 전에 당나라 신하 가언충은 고종황제에게 '고구려가 900년 되기 전에 망한다는 예언이 퍼져 있으므로 건국 900주년인 금년에 고구려를 쳐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건의는 당 고종의 승인을 받았고, 고구려는 그해에 멸망했다. 이처럼 '이 나라는 얼마쯤 갈 것'이라는 사회구성원들의 관념은 적대세력의 활용 여하에 따라 나라의 안보에 실제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고려 말에는 그런 부정적 관념이 확산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한민족 왕조들이 대체로 장수했기 때문에, 이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려왕조의 수명이 길 수밖에 없었다. 고려왕조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은 이 왕조를 안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기대수명이 높더라도 체력이 약하면 '바이러스'의 침공 앞에서 쓰러질 수도 있다. 국제질서 교체기 때는 이런 바이러스들의 활동이 왕성해진다. 그래서 기초체력이 약한 국가들은 교체기 때에 많이 무너진다.

외교력과 군사력 갖춘 고려 왕조
 
고려왕조는 외교력과 군사력이 강했다. 외부의 침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주는 이 2대 요인을 비교적 튼튼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것이 국제질서 교체기마다 고려를 지켜주었다. 고려는 한족 송나라(북송)의 패권이 거란족 요나라로 넘어갈 때도, 요나라의 패권이 여진족 금나라로 넘어갈 때도, 금나라의 패권이 몽골족 원나라로 넘어갈 때도 잘 버텨냈다. 환절기마다 바이러스의 침투를 잘 막아냈던 것이다.
 
송·요 교체기, 요·금 교체기, 금·원 교체기 때 고려는 유연한 외교력을 발휘했다. 저무는 태양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고 신흥 강대국과 과감하게 손을 잡았다. 그러다가 신흥 강대국이 너무 과도하게 행동하면 그들과 기꺼이 전쟁을 벌였다.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도 그런 과정에서 나왔다. 세 차례 교체기 때 고려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유연한 외교력과 탄탄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는 기초 체력이 튼튼한 나라였다.
 
거기다가 14세기의 고려는 위기관리능력도 양호했다. 이 점은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지배층이 1368년 직전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개혁군주 공민왕이 대리인인 신돈을 앞세워 추진한 핵심 사업 중 하나는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세력을 중앙정계에 안착시켜 구세력인 권문세족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유교적 교양을 갖춘 이 새로운 그룹은 대체로 중소 규모의 지주였다는 점, 연줄이 아닌 실력(과거급제)을 통해 정계에 진출했다는 점, 개혁의 의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적임자들이었다. 공민왕은 아이러니하게도 불교 승려인 신돈을 앞세워 유교 사대부들을 새로운 사회주도세력으로 끌어올렸다. 훗날 이 사대부들은 고마움도 모르고 신돈을 '요승'으로 배격했다.
 
신돈이 공민왕을 대리해 국정을 이끈 기간은 1365년부터 1370년이다. 이 기간 초반부에 신돈은 권문세족을 약화시키고 신진사대부를 강화시켰다. 1368년 원·명 교체 직전에 고려왕조 지배층의 컬러가 바뀌었던 것이다. 그렇게 역사무대에 등장한 신진사대부들은 1392년에 조선을 세웠고 이들의 후예들이 조선왕조 5백년을 이끌었다. 이는 신돈과 공민왕이 새로운 세력을 잘 감별해 냈음을 의미한다. 그런 세력이 요동출병 명령과 위화도회군이라는 돌발 사태를 계기로 이성계 편에 가세했던 것이다.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원·명 교체 직전에 지배층이 바뀌었다는 것은 고려왕조가 위기관리능력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시대 상황에 맞게 대처법을 구사할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왕조의 기대수명도 높고 기초 체력(외교력·군사력)도 좋고 거기다가 위기관리능력도 좋았으니, 요동출병 명령과 위화도회군이라는 돌발 변수가 없었다면, 고려왕조가 원·명 교체기의 위기를 극복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고려왕조의 멸망 연도가 1392년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인임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직후에 정권의 공신을 요동으로 내보내려 했던 것은 우왕과 최영의 패착이었다. 이들을 도와 이인임 정권을 몰아내는 데 기여한 이성계로서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왕과 최영의 패착이 고려 멸망을 초래한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규모가 있는 국가들은 국제질서 안정기보다는 국제질서 교체기에 대체로 명멸하는 패턴을 감안하면, 고려가 송·요 교체기, 요·금 교체기, 금·원 교체기에 이어 원·명 교체기까지 버텨냈다면 이 나라의 수명이 17세기 명·청 교체기까지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명·청 교체 전에 일어난 1592년 임진왜란이 조선·명나라 대 일본의 전쟁이 아니라 고려·명나라 대 일본의 전쟁이 됐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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