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축구인들의 빛나는 열정과 노력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자아냈다. 13일 방송된 JTBC 특별기획 다큐 <이제는 챔피언이다 축구하는 여자들>(아래 축구하는 여자들)에서는 2021 WK리그 우승에 도전했던 경주 한수원 구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여자축구의 현실과 선수들의 애환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이야기는 WK리그 우승을 놓고 경쟁중인 인천 현대제철과 경주 한수원의 라이벌전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두 팀 모두 김은숙(현대제철)-송주희(한수원) 여성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 창단 5년차인 경주 한수원은 2021 정규리그에서 2위에 오르며 1위 현대제철을 추격하는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한수원의 훈련장에서 만난 팀의 맏언니이자 국가대표 골키퍼 윤영글은 부상으로 항상 퉁퉁 부어있는 손가락을 보여주면서 "팀이 이기니까 아픈 줄도 모르겠더라"며 "결혼 반지는 왼손에 끼면 된다. 결혼반지 끼워줄 남자만 찾으면 된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JTBC 특별기획 다큐 <이제는 챔피언이다 축구하는 여자들>의 한 장면.

JTBC 특별기획 다큐 <이제는 챔피언이다 축구하는 여자들>의 한 장면. ⓒ JTBC

 
챔피언결정전에 나설 팀을 가리는 경주 한수원과 수원도시공사의 단판승부 플레이오프 경기(11월 12일)가 열렸다. 전반을 1-3으로 마쳤던 한수원은 후반 들어 대반격에 나섰다. 박예은-여민지의 연속골에 이어 외국인 선수 나히가 멀티골을 터뜨려 후반에만 4골을 몰아넣으며 승부를 뒤집었다. 5-4로 대역전승을 거둔 한수원은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성공했다. 승리의 주역인 여민지는 "축구라는 게 마음대로 잘 안 돼서 전반에 좀 당황했지만 선수들의 마음이 하나가 돼서 이길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승리의 여운이 남은 선수들은 경기 후 피자로 소소한 야식타피를 즐기며 경기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윤영글과 김혜인-박혜인-손다슬은 경주 한수원의 창단 멤버였다. 맏언니 윤영글은 "창단 멤버 29명 중 저희 4명이 남았다. 창단 처음에는 개막 7연패를 했다. 맨날 지고 골먹는 건 충격도 아니었다. 1년차부터 너무 힘들게 여기까지 온만큼 우승이 더 간절하다"고 고백했다.
 
여자축구의 투지와 눈물

아이 엄마이자 축구지도자로서 쉽지 않은 두 개의 삶을 병행중인 송주희 감독은 현재 초등학교 축구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남편 양현정씨의 후원이 든든한 원동력이었다. 양현정씨는 "아내를 보면 우리 나라 여자대표팀 감독을 최초로 여자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걸 방해하면 안 되니까. 도움을 주고 힘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며 아내의 꿈을 응원했다.
 
송주희 감독은 국가대표로서 3회의 아시안컵과 1번의 월드컵에 출전했던 1세대 여자축구선수의 간판 중 한 명이었다. 송 감독은 "제가 여자축구 1세대임에도 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것을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며 사명감을 드러냈다.
 
송 감독은 유영실 서울시청 감독과 함께 또다른 여자축구 1세대인 이명화씨를 방문하여 추억을 나눴다. 세 사람은 2003년 미국월드컵 출전권이 걸려있던 여자축구 3·4위전에서 12년 만에 일본을 처음 이기는 쾌거를 이뤄냈던 순간을 회상했다. 이명화는 당시 후반 5분 만에 우리 선수의 퇴장으로 수적열세에 몰렸다고 회상하며 "40분이 그렇게 긴 줄 처음 알았다. 저나 송주희, 황인선같은 친구들이 정말 많이 뛰었다. 그때는 정말 우리 인생에서 다시 올 수 없는 경기였다"고 그날의 감동적인 추억을 떠올렸다.
 
 JTBC 특별기획 다큐 <이제는 챔피언이다 축구하는 여자들>의 한 장면.

JTBC 특별기획 다큐 <이제는 챔피언이다 축구하는 여자들>의 한 장면. ⓒ JTBC

 
한국 선수들도 최근에는 국제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해외무대에서도 관심을 받는 경우가 늘었다. 아시안컵 본선을 대비한 여자축구대표팀의 파주 NFC 소집훈련에서 만난 이금민(브라이튼)은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국축구 안에서만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어렵고 힘든 리그에서 도전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탈리아 유벤투스의 러브콜을 받았던 박예은도 해외진출을 타진하고 있는 가운데, 동료인 윤영글은 "한국 선수들이 더 많이 성장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선수들을 상대해봐야 한다. 경쟁력은 갖추고 있지만 선수 개개인이 더 노력을 해야하는 단계"라는 생각을 밝혔다. 이동준 스포츠매니지먼트 대표는 "한국 여자축구는 이제 세계 탑 20 안에 든다. 한국 선수들은 유럽의 많은 나라 선수들을 상회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고, 아시아권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다.
 
한수원에서 활약 중인 재일교포 3세 출신 강유미의 이야기도 공개됐다. "축구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서 한국에 왔다"는 강유미는 "진짜 고생이란 고생은 다해보고 다시 일본으로 가고 싶다고 했는데도 버티고 축구만 했다"고 고백했다. 한국에 처음 올 때만 해도 한국말도 못했던 강유미는 어느덧 한국생활에 익숙해졌고 국가대표라는 꿈까지 이뤘다. 강유미는 처음 국가대표에 승선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꿈이 이뤄져서 좋았다. 국가대표가 되어 애국가를 들었을 때 뭔가 소름이 돋고 울컥하더라"고 회상했다.
 
프로그램의 피날레는 현대제철과 한수원의 2021 WK리그 챔피언결정전이었다. 10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8년 연속 통합우승에 빛나는 여자축구의 절대강자 현대제철을 상대로 한수원은 1차전을 종료 직전 얻어낸 페널티킥에 힘입어 극적인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2차전에서도 전반을 실점없이 잘 버텼지만, 결국 후반 5분 만에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현대제철 최유리에게 결승골을 헌납하며 무너졌다.
 
현대제철은 통합 9연패의 대업을 이뤄냈다. 김은숙 현대제철 감독은 "내년에는 또 누가 우승할지 모른다. 항상 어느 팀이든 이 자리에 있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 발전해가는 것"이라며 최선을 다한 양팀 모두에게 경의를 표했다.
 
아쉽게 패한 한수원 선수들은 눈물을 흘렸다. 송주희 감독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 1위도 승자고 2위도 승자다. 오늘을 즐기자. 경기는 끝났다"면서 상심한 선수들을 위로했다. 한수원 박예은은 눈시울을 글썽이면서도 "올해 이렇게 져서 마음 아픈 거 기억하고 더 잘 준비해야 할 동기가 생겼다. 우승할 때까지 두들겨볼 생각"이라며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다짐했다.
 
꽃다발을 든 한수원 선수들은 패배로 주눅든 모습이 아니라 활짝 웃는 얼굴로 기념 촬영을 하며 한 시즌의 대장정을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패배도 승부와 성장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요즘 세대의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여자축구는 유명하지 않으니까 하지말라고 반대"
 
 JTBC 특별기획 다큐 <이제는 챔피언이다 축구하는 여자들>의 한 장면.

JTBC 특별기획 다큐 <이제는 챔피언이다 축구하는 여자들>의 한 장면. ⓒ JTBC

 
최근 축구대표팀의 미국전 선전, 지소연-조소현-이금민 등 유럽파 여자 스타들의 활약, 여성풋살을 소재로 한 예능 방송 <골때리는 그녀들> 등의 영향으로 여자축구를 향한 주목도가 차츰 높아지고 있다. 사실상 <축구하는 여자들>의 주인공 팀으로 등장한 경주 한수원은 최근 4년간 3차례나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한 신흥강호이자 국가대표 여민지-윤영글 등을 보유하며, 최근 같은 방송사의 축구예능 <뭉쳐야찬다>에도 상대팀으로 특별출연하는 등 차츰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다. 

<축구하는 여자들>은 여자축구가 남자축구와는 또다른 색깔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인기종목 취급을 받던 예전에 비하여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팬들도 조금씩이나마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이날 방송에서는 아직까지 열악한 여자축구의 현실과 어두운 그림자도 보여줬다. 방송인이자 남자축구 국가대표 출신인 안정환과 이동국은 이구동성으로 "여자축구팀이 더 많이 생겨야 한다. 기초가 튼튼해야 축구가 발전하는데, 현재 여자축구는 초중고팀이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저변 확대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초등학교 축구 지도자인 장동진 감독은 재능있는 유소년 여자축구 선수를 구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이유를 밝혔다. "부모님들 입장에서는 여자애들이 힘든 운동을 한다고 하니까 반대가 심하다"는 것. 이천초교 시절 장동진 감독의 지도를 받았던 한수원 소속 김상은과 서지연 선수도 처음 축구를 시작할 때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고 고백했다. 장 감독이 지도하는 초등학생 문희은양이 "부모님이 남자축구는 유명한데, 여자축구는 유명하지 않으니까 하지말라고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지금도 해체위기에 놓이거나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여자축구부가 부지기수다. 장동진 감독이 이끄는 초등학교는 인원이 없어서 올해초에 열린 대회에 불참할 수밖에 없었다고. 장 감독은 "최소한의 선수 수급 문제나 재능있는 아이들을 발굴하는 게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며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손봉순 한수원 축구단장은 "부모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운동을 시키는 것은 모험이다. 꿈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그 길이 갈수록 좁아지면 불안하다"고 분석했다. 손 단장은 "내년에는 유소년 축구단 창단도 기획 중이다. 한 지역에서 중고교-대학까지 선수단에 편입해서 같이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도록 노력 중"이라는 구상을 밝혔다.

송주희 한수원 감독은 소속팀 성적을 넘어 구단의 운영주체인 경주시와 함께 유소년-유소녀들의 축구환경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고민하고 있었다. 홍상현 대학 여자축구 감독은 "순환 구조가 이뤄져야 한다. 좋은 선수들을 배출하고 상위 리그나 프로팀에 진출하면서 여자축구 전체 수준도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재능있는 선수들을 조기에 발굴하고, 유망주들이 단계별로 체계적인 성장을 거쳐 안정적인 진로까지 모색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특히 송주희 감독은 WK리그에서 가장 바꾸고 싶은 것으로 '여자축구에 대한 인식'을 거론한 장면은 주목할 만하다. "리브랜딩(Re-branding)이라고 한다. 여자축구는 '재미없다, 힘들다, 관중이 없다'같은 인식을 벗어나, 여자축구도 다채롭고 좋은 퍼포먼스와 경기력으로 재미를 인정받는 인기 스포츠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송주희 감독은 준우승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제게 우승은 하나의 과정이다. WK리그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 여자축구가 인기스포츠가 되는 게 제가 바라는 최종 목표"라는 소망을 드러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구성원들의 뜨거운 열정과 저마다의 비전, 여기에 여자축구에 대한 대중의 작은 관심과 박수갈채가 뒷받침될 때 우리의 여자축구가 지금보다 한뼘 더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며 시청자들에게 진한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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