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질 부리기 일보 직전의 이산. 그러나 성덕임한테는 한없이 관대하다.

승질 부리기 일보 직전의 이산. 그러나 성덕임한테는 한없이 관대하다. ⓒ MBC

 
'금사빠'가 발동이 걸렸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 나오는 이산에 제대로 빠졌다. 나는 이산을 연기하는 이준호를 덕질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다. 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는 춤추는 짐승돌 전하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서다.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서 귀신같은 알고리즘의 유튜브는 아예 멀리하고 있다. 지금은 오로지 젊은 이산의 천명과 사랑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다. 이산에 빠지기 시작한 건 이 장면에서다.
  
영조가 문짝을 걷어차다시피 동궁전으로 들이닥쳐 이산의 뺨을 내리칠 때, 그는 납작 엎드려 두려움에 떤다. 영조는 "니 애비처럼 되면 안 돼, 넌 고칠 수 있어"라며 거친 분노를 쏟아낸다. 평소에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굴다가 이처럼 사도세자와 관련된 일이나 세손이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싶으면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영조. 그는 무수리 출신 후궁 소생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병적인 의심과 세손에 대한 엄격한 잣대, 그리고 혈통에 대한 사랑까지 얽힌 복잡한 상태로 이산을 대한다.
 
영조가 이산의 대리청정 운을 떼자, 화완옹주와 그녀의 양자 정백익이 공모하여 세손이 기방에 드나들며 비행을 저지른다고 음해해서 벌어진 일이다. 자신의 밤 외출이 비밀모임인 동덕회 때문이란 걸 말할 수 없었던 이산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한다. 이 무섭고 비참한 광경을 문 밖에서 지켜본 성덕임은 그제야 모든 궁녀들이 무서워하는 잔뜩 날선 도깨비동궁의 진짜 모습인 왕세손의 무겁고 불안한 자리, 궁에서의 그의 위치를 온전하게 이해하게 된다.
 
이산이 "이루고 싶은 게 있어 참는 것이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견디는 것이다… 나에겐 언젠가 힘이 생겨. 그 힘으로 수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다"라는 울음을 눌러 담은 말에 성덕임은 "저하께서 보위에 오르는 그날까지 제가 저하를 지켜드리겠습니다" 충성을 약속한다.
 
사람의 마음 훔치는 <옷소매 붉은 끝동> 서사

나는 그만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이 짊어진 천명에 대해 절절이 쏟아날 때 나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가 버텨내야 할 고통의 무게가 짓누를 때 그래, 성덕임의 마음처럼 이산을 위로하고 지켜주고 싶어졌다. 이것이 바로 <옷소매 붉은 끝동>이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서사다. 동궁의 서고에서 세자인 사실을 모르고 만났을 때의 싸가지 없고 오만한 청년의 모습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세자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묵직한 모습을 겹쳐서 밀도를 높인다.
 
이산은 한낱 궁녀 주제에 나를 지키겠다고? 역정을 내지만 성덕임은 정말로 한낱 궁녀 주제에 그를 지키기 위해 중전을 만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재치 있게 주고받고, 화완옹주를 누를 비책까지 찾아낸다. 중전이 직접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며 조선비단의 중요성을 고취시키는 침잠례 행사 때 화완옹주는 청나라 비단옷을 자랑하다 중전한테 호되게 벌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중전은 자신의 위엄을 세우고, 영조한테는 현명한 지어미의 모습을, 그리고 세손한테는 금족령을 풀게 하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준다.
 
 정조와 의빈성씨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다

정조와 의빈성씨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다 ⓒ MBC

 
이 드라마의 생동감은 성덕임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잘 살린 덕이다. 궁 여기저기를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고개를 숙인 채 우르르 몰려다니는 무리가 아니라 궁녀 스스로 선택하는 주체적인 삶을 살겠다고 무리에서 고개를 내미는 당돌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적인 고리에만 연연하지 않고, 문제를 풀어나가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동지적인 연결고리를 추가했다.
 
그저 세자의 위안이 되어주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특유의 총명함으로 제조상궁의 눈에 띄었고, 사건을 풀어나가며 중전의 신임을 얻고, 홍덕로와는 여러 차례 부딪히며 긴장감을 유발하고, 자신을 거둬준 혜빈홍씨와의 인연, 영조와 독대할 때는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며 위기를 벗어나는 등 중요 인물과 관계망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능동적인 인물로 살아났다. 그러니 성덕임은 누구와 어떤 일을 벌이든 자유롭다. 망아지처럼 어디를 뛰어다니든 자연스럽고 밉살스럽지 않다. 보통의 경우라면 세자 옆에서 얼쩡거린다고 미움 받을 텐데 까칠하고 예민한 세자의 시중을 들기 힘들어하는 선배 나인들이 제발 세자 시중을 들어달라며 떠다미는 형국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스토리텔링의 힘을 제대로 보여준다. 드라마의 서사 뿐 아니라 성덕임이 주변과 관계를 맺는 바탕에는 이야기의 힘이 작용하고, 세자와의 인연 역시 책이 매개가 되는 등 인문학적인 요소를 매력적으로 배치해 그럴듯한 정조의 배경이 만들어진다. 워낙 그런 인물 아닌가. 책 좋아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왕. 물론 활쏘기도 잘했지만. 성덕임이 금족령으로 방 안에 갇힌 세자를 위로하는건 <시경>의 구절을 읽어주는 것이다. 창호문을 사이에 둔 채 그림 같이 앉아 서로 주고받으며 읊는 시는 그대로 이산과 성덕임의 은유다.

"북풍은 차갑게 불고 눈은 펄펄 쏟아지네. 사랑하여,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손 붙잡고 함께 떠나리."
 
 금족령을 받아 방안에 갇힌 세자한테 시경의 구절을 읽어주는 성덕임

금족령을 받아 방안에 갇힌 세자한테 시경의 구절을 읽어주는 성덕임 ⓒ MBC

 
이 드라마는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삼아 큰 줄기를 끌어가면서 이면에 숨겨져 있는 과정을 상상력으로 덧입혔다. 정조와 의빈성씨의 역사적 사실은 비껴갈 수 없을 것이다. 정조는 성덕임이 14세 때 승은을 내렸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현왕비인 효의왕후가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정조는 이를 받아들이고, 15년이나 기다려 다시 한번 승은을 내렸지만 이번에도 거절해 그녀의 시종을 꾸짖어 결국은 허락을 받아낸다. 정조는 못말리는 로맨티스트였다. 이야기를 어떻게 변주할지 궁금하다.
 
모든 캐릭터가 각각의 존재감이 돋보이는데 아쉬운 인물은 홍덕로다. 이름이 홍국영이다. 항아님, 하고 궁녀한테 정보를 캐는 역할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의 야망을 알면서도 이산이 기댈 수밖에 없는 중요한 존재, 왕에 즉위하고 나서는 정조의 오른팔로 군림하며 세도정치를 펼쳤던 강력함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사랑의 서사와 정치의 서사가 호흡을 맞춰 팽팽하게 당겨지고 갈등이 깊어져야 이 드라마가 산다. 홍덕로는 곧 자신의 누이를 원비로 들이길 권할 것이고, 이산은 정치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고뇌와 번민이 깊어져야 사랑의 폭도 깊어진다. 이야기는 천길 낭떠러지를 파고 들어가야 제맛이다.
 
아직 회수하지 않은 떡밥도 몇몇 흩어져 있다. 어릴 적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 친모인 영빈의 조문 때 만난 특별한 인연과 영조가 읽지 말라고 했던 금서 <사기>를 읽다가 걸린 이산을 구해준 퍼즐까지 맞춰진다면! 게다가 성덕임의 오라버니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 위기감을 조성할지 모른다. 갈 길이 멀다.
 
나는 이산이 좋다. 좀체 틈을 보이지 않는 완벽주의 세손저하지만 얼마나 솔직한가. 혼낼 때는 혼내고, 고마울 때는 "덕임아, 수고했다"라고 한다. 궁금한 건 바로 직접 물어보고 승질도 바로바로 부린다. 걱정하고 배려해주는 세심함도 갖췄다. 용서도 잘한다. 내가 신경쓰는 것은 오직 나의 사람 뿐이다, 질투하고 염려하는 모습도 풋풋하다. 푸른색 곤룡포를 입은 자태는 단정하고, 웃는 모습은 어찌나 예쁜지. 목소리는 낮지만 힘이 있고 또랑또랑하다. 지난회 말미를 장식한 목욕신에서의 복근 노출은 좀 심했다. 섹시함까지 겸비한 세손저하라니. 정녕 다 가졌소그려.
     
위안이 된다. 그간 가지고 있던 정조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내려 한다. 끝없이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왕위에 올라 그가 꿈꾼 개혁은 비록 미완으로 끝나고,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았지만 그토록 빛나는 사랑과 세상을 향한 열망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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