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연모>의 정지운(로운 분)은 세자 이휘(박은빈 분)가 공주라는 사실을 모른 채 애틋한 감정을 품었다. 이휘 역시 스승 정지운에게 깊은 감정을 갖고 있다. 이들 사이의 감정은 외형상으로는 세자와 사대부 청년의 것이지만, 실제로는 공주와 사대부의 것이다.
 
우리 시대 남성들 사이에는 공주에 대한 환상 같은 게 존재하지만, 적어도 조선시대 사대부 남성들의 경우에는 분위기가 다소 달랐다. 공주에 대한 로망을 품는 사대부들도 당연히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공주와의 사랑이나 결혼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우선, 왕실과의 국혼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대단했다. 정치적 풍파에 휩쓸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음력으로 인조 1년 윤10월 27일자(양력 1623년 12월 18일자) <인조실록>은 사대문 가문들이 왕실과의 혼인을 기피하자 한성부에서 파견된 시각장애 무속인들이 가가호호 방문하며 점을 치는 방법으로 처녀들을 색출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양반 가문들이 왕실에 시집보내지 않으려고 딸들을 숨기자, 점쟁이들을 집집마다 파견해 처녀들을 찾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국혼에 대한 조선시대 분위기
 
 KBS 사극 <연모>

KBS 사극 <연모> ⓒ KBS

 
정조의 손녀이자 순조의 딸인 명온공주의 남편을 간택할 때 지원자가 17명이었던 사실, 정조의 증손자인 헌종의 왕비를 뽑을 때 지원자가 12명이었던 사실, 고종의 왕세자인 이척(훗날의 순종황제)의 세자빈을 뽑을 때 지원자가 25명이었던 사실 등은 국혼에 대한 조선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자료다. 전국적으로 지원을 독려한 끝에 나온 숫자가 그 정도였으니, 왕실과 엮이는 것에 대한 그 시대의 정서를 느끼고도 남을 만하다.
 
사대부 가문들은 왕후 간택이나 세자빈 간택보다 부마 간택에 특히 더한 거부감을 품었다. 이들은 남자들이 공주의 남편이 되고자 과거시험 응시하듯 지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이 시대 사대부들은 남성 중심의 유교 윤리를 특별히 중시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 제9권은 "우리나라 국혼에는 한데 모아놓고 직접 고르는 규정이 애초에 없었다"면서 공개심사 형식의 간택 절차가 생겨난 계기를 조선 태종 이방원 때의 사건에서 찾는다.
 
이 사건에 등장하는 이속(李續)은 명문가인 연안 이씨의 일원이자 전 지춘천군사(知春川郡事)를 지낸 사대부였다. 지금으로 치면 춘천시장을 지낸 명문 사대부였던 것이다.
 
<성호사설>에 따르면 정권 후반부인 1417년에 이방원은 사윗감을 찾고자 이속의 집에 무속인을 파견했다. 그런데 손님과 바둑을 두던 이속은 왕실에서 사람이 나왔는데도 바둑을 멈추지 않았다. 무속인이 왕명이라며 방문 목적을 설명하자, 그는 간단하게 거절을 표시했다. 요즘 말로 바꾸면 "결혼은 끼리끼리 해야죠"라는 식의 말이었다.
 
어떻게 들으면 왕실을 높이는 표현이 될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들으면 왕실을 거부하는 표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표현을 써가며 단칼에 거부한 것이다. 그것도, 바둑을 둬 가며.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방원은 격노했다. 이방원은 분노를 참지 않았다. 이속의 집을 몰수하고 그 자녀의 혼사길까지 막아놓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이방원이 내린 왕명이 '앞으로는 신랑 후보들을 대궐에 모아놓고 직접 고르라'는 것이었다고 <성호사설>은 말한다. 부마를 선발하는 '공개 오디션'이 이렇게 생겨났다고 설명한 것이다.
 
태종 17년 9월 2일자(1417년 10월 11일자) <태종실록>은 이속이 바둑을 두면서 했던 문제의 발언을 "만약 권 궁주의 딸이 결혼하는 것이라면 나의 아들이 있지만, 만일 궁인의 딸이라면 내 아들은 없다"라는 말로 소개했다. 이속이 안사돈 될 사람의 신분 고하를 문제 삼으면서 '안사돈 될 사람이 궁인이라면 나는 아들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속이 정확히 어떻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속이 했다는 '결혼은 끼리끼리 해야죠'라는 말이 국혼에 대한 사대부들의 거부감을 반영하는 사례로 후대에까지 전해졌다는 점이다. 발언의 사실 여하를 떠나, 사대부들이 <성호사설>에 실린 대로 이 사례를 이해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사대부들의 반감

사대부들은 이속이 국혼을 거절해 보복을 당했으며, 불쾌감을 느낀 이방원이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자 공개 심사 방식의 간택 제도를 만들었다고 이해했다. 사대부들의 기를 꺾어놓고자 그런 식의 간택 제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시대에까지 전해졌다는 것은 사대부들의 반감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 이이의 관점을 소개한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별집 제12권에서도 그런 반감을 읽을 수 있다. 이 책 제12권은 부마 간택에 대한 이율곡의 반대론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여자 한 사람을 위해 국내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모아놓고 간택하니 예법의 근본정신에 극히 어긋난다"고 말한다.
 
공주와의 국혼은 또 다른 이유에서도 거부감을 낳았다. 공주들이 남편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에게 고분고분하게 대하지 않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행동하기보다는 자기 아버지의 시선으로 시댁 가족들을 대하는 일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지은 <조선 국왕의 일생>은 2008년 일본에서 발굴돼 정병설 서울대 교수의 번역으로 소개된 <기이재상담(紀伊齋常談)>이라는 사료를 근거로 "선조의 부마인 신익성이 정숙옹주와 첫날밤을 맞았는데, 잠자리에 들자 옹주가 부마를 아래에 눕게 했다"고 설명한다. 그런 뒤 "신익성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으나 옹주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고 덧붙인다. 부부가 된 뒤에도 명령을 들으며 살아야 하는 부마들의 생활을 반영하는 이런 이야기 역시 국혼에 대한 사대부 청년들의 거부감을 키워주는 데 한몫을 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왕조시대 사대부 남성들이 공주와의 결혼에 대해 부담감 내지는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드라마 <연모>의 정지운이 처음부터 상대방이 공주인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을 갖도록 만든다. 그랬다면 정지운은 공주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 때문에라도 쉽사리 다가서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공주인 줄 몰랐기 때문에 호감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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