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림> 포스터

영화 <크림> 포스터 ⓒ 알토미디어

 
같은 이야기도 달리 찍으면 새로운 영화가 된다. 로맨틱코미디도 그렇다. 만국 공통의 기승전결을 가진 흔한 장르가 되어버린 지 오래라지만 국경을 넘을 때마다 전과는 전혀 다른 신선함을 내보이곤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한 것처럼 보이려 연기할 남자를 구하고, 그와 사이좋은 부부마냥 흉내를 내다가는, 마침내 정이 들어 진짜 사랑을 하는 이야기는 말만 들어도 식상하다. <결혼하고도 싱글로 남는 법> <프로포즈> <댄서의 순정> <어린 신부> <라스베가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 <어쩌다, 결혼> 등 비슷한 설정의 영화가 한 둘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 영화가 죄다 시시하냐면 그건 또 아니다. 멀리서 보면 비슷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관객을 잡아둘 매력이 슬며시 떠오르는 작품이 여럿이다. 그런 작품엔 공통점이 있다. 안전한 구성과 참신한 설정이 그것이다. 비슷한 구성이 주는 안정감과 그럼에도 식상해지지 않으려는 참신함이 적절히 조합될 때 좋은 상업영화가 나오는 것이다.

때로 어떤 이야기는 국경을 넘는 것만으로도 참신한 영화가 되곤 한다. 나라마다 그 문화가 천차만별이니 비슷한 이야기도 달리 보이고는 한다.
 
 <크림> 스틸컷

<크림> 스틸컷 ⓒ 알토미디어

 
낯선 문화가 낯선 영화를 만든다

로맨스를 생각해보자. 어느 나라에선 손끝 하나 건드리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또 어느 나라에선 단숨에 키스를 하고 초면에 그 이상까지 가기도 한다. 썸을 타고, 정식으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각 단계별로 나눌 수 있는 감정과 스킨십도 천차만별이다.

어느 나라는 남녀의 관계에 개방적이고 또 어느 나라는 정해진 이성 외엔 소통하는 게 금지되기도 한다. 종일 휴대폰을 붙들고 연락을 하는 게 의무인 사회가 있고 며칠쯤은 연락 없이 지내도 문제되지 않는 곳도 있다. 남녀상열지사는 만국공통의 소재라고 하지만 그걸 풀어가는 방식이 천차만별인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크림>은 한국 관객에겐 적잖이 참신하게 다가온다. 남녀의 관계가 진전되는 속도 뿐 아니라 이를 연출하는 리듬까지 대단히 전격적이다. 흔한 로맨틱코미디의 구성에도 참신한 설정을 여럿 두고, 한국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속도감으로 후려치니 충분히 신선하게 볼 만한 영화다.
 
 <크림> 스틸컷

<크림> 스틸컷 ⓒ 알토미디어

 
1억3000만원 노린 위장사기단

이야기는 이렇다. 홀로 케이크가게 '크림'을 운영하는 중년여성 도라(케레케스 비카 분)는 당장 남편이 필요하다. 그녀가 온 애정을 쏟고 있는 가게를 살리려면 부부 자영업자에게 주어지는 지원금을 타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진흥원이 개최하는 부부 자영업자 콘테스트 1등 상금은 9만5000유로, 한화로는 1억3000만 원에 달한다. 비싼 재료를 쓰는 탓에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도라의 가게가 단숨에 부활할 기회다.

문제는 도라가 독신녀란 점이다. 얼마 전 마음을 다 준 남자에게 뻥 하고 차인 도라는 결혼은커녕 애인도 없는 신세다. 진흥원엔 남편과 아들이 있다고 뻥까지 쳐놓았지만 어떻게 콘테스트에 참여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도라가 빼든 비책은 가짜 가족이다. 그녀의 가게를 빌려 쓴 인연이 있는 사내 마르시(마트라이 라즐로 분)와 옆집 사는 아역배우 라시카(기아르마티 에릭 분)에게 도움을 요청해 위장 가족을 구성한다. 그렇게 국가지원금을 따기 위한 사기단이 구성된다.

위기가 없으면 영화가 아니다. 진흥원이 연 4박5일 간의 대회엔 한때 도라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남자도 있다. 대회 내내 도라는 그가 눈에 밟혀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옛 연인을 앞에 두고 갈팡질팡하는 도라의 곁엔 그녀의 매력을 알아본 마르시가 있다. 그가 도라의 마음을 열고 성큼성큼 다가온다.
 
 <크림> 스틸컷

<크림> 스틸컷 ⓒ 알토미디어

 
영화팬 설레게 하는 설정도 볼거리

여느 로맨틱코미디가 그렇듯 영화는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들의 감정선을 따라 유쾌하게 전개된다. 할리우드 영화에만 익숙한 이라면 좀처럼 만나지 못했을 동유럽 스타일이 물씬 밴 캐릭터들을 만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과 육중한 집 전화를 함께 쓰고, 최신 장비를 활용하면서도 가족이 있는지는 찾아내기 어려운 동유럽의 독특한 문화를 지켜보는 맛도 쏠쏠하다.

영화 팬이라면 도라의 가게 속 디저트와 집기에 붙은 이름들이 남다른 인상으로 다가올 듯하다. 가게의 모든 디저트와 도구엔 케이트 윈슬렛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먼, 티모시 샬라메와 아미 해머 같은 이름이 붙었다.

영화 초반 한 손님이 디저트 레드포드를 주문하자 굳이 바바라 스트라이샌드를 꺼내주는 대목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레드포드만 시켰지만 바바라는 늘 함께 해야 한다는 도라의 고집이 곧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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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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