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역"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종착역"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필름다빈

 
1_소녀들, 모험을 떠나다
 
사진동아리 "빛나리" 부원인 중1 여학생 시연, 연우, 소정, 송희 넷은 여름방학 과제로 '세상의 끝'을 지도교사가 준 일회용 필름카메라로 찍어오라는 미션을 받는다.

네 소녀는 뜻밖의 추상적인 과제 앞에서 당황스럽다. 중1 여름방학을 맞이한 14살 아이들에게 종말을 연상케 하는 세상의 끝이란 가당찮은 일인가. 끙끙 머리를 쥐어짜던 넷 중 한명이 아이디어를 꺼낸다. 지하철 종착역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서울의 강북 소재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가장 먼 전철역은 1호선 최남단 신창역이다. 이제 소녀들의 여정이 시작된다.
 
<종착역>과 세상의 끝 vs 14살 중1소녀들. 참 특이한 조합이다. 아이들은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입시체제의 말단에 편입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아직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에 익숙하진 못하다. 교사들은 아직 어리니 커피도 자꾸 먹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툭탁거리곤 한다. 궁금한 게 너무나 많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 세계. 그 '세계의 끝', 미지의 땅 신창역으로 소녀들은 출발한다.
 
인터넷에서 지하철 노선도를 검색해본다. 대체 신창역이 어디에 붙어있지? 서울지하철 1호선은 이렇게 보니 엄청나게 길다. 아이들은 아마도 의정부 아래, 외대 위쪽 중간쯤 어느 동네에서 출발할 테다. 1호선은 구로역에서 몇 갈래로 나뉜다. 서울이 초행인 이들이라면 1호선 구로역이나 2호선 영등포역 같은, 지상화되고 복잡한 환승역에서 헤매거나 낭패를 겪던 경험이 적지 않을 테다. 소녀들 역시 구로역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아마 이 나잇대 아이들이 어른들과 동반하지 않고 혼자 또는 친구들과 함께 다닐 수 있는 행동반경이란 게 구 단위 경계 정도 아닐까. 그나마 광역시 급 대중교통체계가 발달한 지역에 국한될 테다. 시군 단위라면 행정구역을 벗어난다는 것조차 상상하기 어렵다(반세기 전만 해도 시골 동네 14살 아이들의 세계는 '마을'을 벗어나기 힘들었을 테다).
 
다시 지도를 찾아본다. 신창역은 구로역에서 인천 방향으로 빠지지 않고 안양과 수원, 오산, 송탄, 평택을 지나 천안과 아산을 넘는다. 온양온천을 지나면 비로소 신창역. 충남 아산시 신창면. 전철로 3시간은 족히 걸린다. 과연 14살 소녀들에겐 세계의 끝이라 할 만하다. 아이들의 여정이 시시해 보인다면 자신의 14살적 추억을 떠올려보자. 영화 속 네 소녀들 마냥 지하철 환승역 여러 곳을 직접 돌파하고 시골 마을버스를 골라 타가며 어딜 가본 적이 과연 있었던가.
 
2_좀 낯설게 다가오는 모험영화
 
"종착역"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종착역"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이렇게 '썰'을 풀어나가면 <종착역>은 소녀들의 모험전기물처럼 상상될 법하다. 물론 14살 아이들은 난생처음 소소한 위기들을 경유한다. 부모님들 발칵 뒤집혔을 게 눈에 선하다. 하지만 '클리셰'의 전형처럼 등장하게 마련인 나쁜 어른들은 (다행히도) 눈에 띄지 않는다. 시골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할머니 외엔 소녀들의 여정에 타인은 거의 등장조차 않는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시골 개와 고양이, 벌레들 뿐.
 
대신에 어쩌면 아이들로서는 짧은 생에 처음으로 겪는 또래들만의 여정이 펼쳐진다. 지하철 종점 신창역에 도착하지만 그곳은 여느 전철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소녀들은 옥신각신 갑론을박하지만 결국 폐역사가 된 신창역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과감히 전진한다. 그 순간부터 단편영화의 호흡으로도 충분할 것 같았던 이야기는 (14살 아이들로선) 종잡을 수 없는 망망대해로의 표류처럼, 흡사 다른 차원의 이세계 물 같은 시공간으로 그들을 이끈다.
 
말로만 듣다보면, 모험물의 기본 전개 구조를 따르는 것 같지만 영화에는 충격적인 사건이나 극단적 설정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길을 잃는다거나 폭우가 느닷없이 퍼붓는다거나, 마실 물이 떨어지고 화장실을 찾지 못한다거나, 휴대전화를 분실하거나 배터리가 떨어지는 등의 위기일발은 연속된다. 낯선 곳에서 아이들에게 닥친 이런 소소한 돌발 상황은 충분히 비상 국면에 해당된다. 소녀들은 머리를 짜내보지만 생면부지의 시골에서 아이들의 지식과 임기응변은 별 효과가 없다.
 
그런 도중에도 아이들은 일회용 필름카메라로 꾸준히 사진을 찍는다. <종착역>은 아날로그 감수성을 그 순간마다 분출하듯 뿜어내려는 의지로 가득해 보인다. 소녀들의 휴대전화 카메라가 아마 싸구려 필름카메라보다 훨씬 칼같이 또렷하고 선명한 화질일 게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이점으로, 찍은 사진을 바로바로 확인하는 것도 가능할 테다.

하지만 굳이 필름카메라를 네 명의 손에 쥐어준 건 영화의 분위기 전개를 위한 장치다(담당교사가 처음에 사진동아리지만 영화를 보는 게 활동이라며 보여주던 흑백 고전영화의 정서와 이어진다). 영화 중간 중간 아이들이 찍었던 사진들은 마치 그 순간을 바로 현상해 사진첩에 끼워둔 것처럼 정지화면으로 끼어든다. 그 순간엔 어떤 음악도 소리도 방해하지 않는다. 온전히 시각 이미지를 위한 찰나다. 대개 엔딩 크레디트에나 쓰일법한 연출이 수시로 화면을 침범하며 <종착역>만의 정적인 감성과 정갈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3_14살 소녀들, 노년과 죽음을 논하다
 
"종착역"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종착역"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아이들은 하루 여정의 끝에서 자신들만의 캠핑을 시작한다. 작은 반목과 의견대립이 네 소녀 사이에서 종종 일어나곤 하지만 14살이란 나이는 아직은 그러다 화제가 전환되면 금시 까르르 할 수 있을 때다. 아이들이 비와 어둠을 피해 찾아든 피난처는 텅 빈 마을회관. 세상의 끝에서 헤매는 14살 아이들에게 마실 물과 화장실, 지붕과 마루를 제공해주는 고마운 곳이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대개 수학여행이나 청소년 캠프에서 밤을 지새우며 싱숭생숭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던 순간을 재연한다. 시골 노인들의 공간에서 그 자리를 차지한 아이들은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에서 출발해 나이 들어감에 대해 서툰 상상을 거듭하던 끝에 자신들의 조부모 세대에 대한 각자의 기억과 체험을 공유한다. 부모 세대가 직접적으로 자신들을 통제하며 부딪치는 데 반해 조부모 세대는 일정한 거리감과 비-일상성을 가진 존재다.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만 만나게 되는, 14살 손녀들에게는 사이가 나쁘지 않다면 용돈 주시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하던 무제한 애정을 주는 그런 존재. 아이들은 각자의 조부모 상을 공유한다.
 
특이하게도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이들 공통으로 추상적이다. 한국전쟁 참전용사로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계신다는 공유지점에 서로 흡족해하는 소녀들에게 이제 기성세대들은 직접체험이건 이식된 간접경험이건 생생한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형식적 교과서 내용으로만 접하게 되는, 일종의 탈-역사화 된 세대의 탄생과정을 목격하는 느낌이다. 반면에 할머니와 손녀들의 관계는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의 체험이다. 용돈을 주고 자고 가길 권하며 예뻐해 주시던 경험들을 아이들은 하나둘 꺼낸다.
 
4_세대적 흐름 속에서 조금은 다른 결
 
근래 한국 독립영화에서 젊은 창작자들은 감독 자신들의 유년기와 청소년기 체험을 투영한 자전적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중이다. 이런 경향은 극, 다큐멘터리, 애니, 실험 등 장르를 넘어 '20/30' 창작자들 전반에서 두드러진다. <종착역>에서도 그런 영향력은 지배적 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 세대의 독립영화에서 두드러졌던 사회적 소재 경도는 그저 배경으로 활용되거나 탈각되는 추세다. 그 빈자리를 자전적 영상 에세이(혹은 일기장) 서술이나 미학적 실험이 채운다.
 
<종착역>은 그런 현황으로 보면 명백히 요즘 유행하는 경향의 작품으로 분류될 법하지만 삶의 출발점에 선 아이들과 '세계의 끝' 폐쇄된 역사와 텅 빈 마을회관의 풍경으로 표상되는 늙음과 죽음의 이미지를 대면시키는 강렬한 대비에는 가볍지 않은 통찰이 엿보인다. 요즘 곧잘 등장하곤 하는 소년소녀 모험 물과는 차별화된 정적 구성과 필름사진의 조화는 이 영화를 그저 탈정치/사회화된 요즘 독립영화 창작 풍토로만 치부하지 못하게 만든다.
 
자전적 경험과 본인의 기억을 바탕에 둔 젊은 창작자들이 선보이는 근래 독립영화들은, 당대 문학적 경향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는 중이다. 깨어질 듯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과 동 세대에게 어필하는 문화적 코드가 넘쳐나지만 사회현실에 대한 반영이나 객관화된 기억의 재구성보다는 자기 위로에 보다 경도되는 특질들. 그러다 보니 유/청소년기를 다루는 작품들의 경우에도 특정세대 공통의 경험을 형상화하기보단 자기 체험을 토로하는 방식에 가까운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편향에 대해 <종착역>은 두 (생물학적) 남성감독이 영화 속 주인공 4인방과 최대한 일치하는 나이대의 배우들을 공들여 캐스팅하고, 시나리오를 최소화하는 대신 네 배우에게 기본 상황만 설정한 후 자연스러운 대화를 유도했다고 한다. 그런 리얼리즘적 전개를 통해 감독의 실제 개인적 체험을 영화 이해를 위해 접하지 않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형태로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종착역>은 유행하는 흐름과 비슷해 보이지만 뭔가 좀 다른 결의 작품으로 몇몇에겐 두고두고 기억될 만하다.
 
<작품정보>
 
종착역 Short Vacation
2020|한국|드라마
2021.09.23. 개봉|79분|전체관람가
감독 권민표, 서한솔
주연 설시연, 배연우, 박소정, 한송희
제작 (주)타이거시네마,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DGC)
배급 필름다빈
 

2021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 감독상-키즈 포커스 경쟁
2021 무주산골영화제 나봄상(감독상)
2020 타이베이영화제 상영작
2020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2021 베를린국제영화제 상영작
종착역 권민표,서한솔 감독 필름다빈 타이거시네마 단국대학교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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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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