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편집자말]
"폭행 아니에요. 사랑이에요." (9회, 예슬)
 
한국 최고의 로스쿨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주고 있는 JTBC 드라마 <로스쿨>. 지난 9회 방송분에서 오랫동안 데이트폭력에 시달려온 예슬(고윤정)이 이 말을 내뱉었을 때, 나는 소름이 돋았다. 신체적 폭력과 정서적 학대, 위증 강요와 몰카 동영상 유포 협박 등 온갖 폭력이라는 폭력은 다 저지른 남자친구를 '사랑'한다며 걱정하는 예슬의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안쓰러웠다.
 
돌아보니 이 드라마에서 이런 감정을 일으킨 인물은 예슬만이 아니었다. 무표정한 강솔B(이수경)를 볼 때도 나는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솔B는 딸을 판사로 만들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는 어머니의 조종을 받는다. 그녀는 엄마의 집착에 숨 막혀 하면서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거짓말까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해낸다. 말을 듣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어머니 앞에서 솔B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두 인물이 겪는 일들이 어쩌면 드라마의 큰 줄기인 살인사건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결코 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 당하는 폭력은 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표정을 잃고 죽은 듯 살아가게 했을 것이다. <로스쿨>이 보여주고 있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 그 실체를 해부해 본다.
  
 한국 최고의 로스쿨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면들을 보여주고 있는 JTBC 드라마 <로스쿨>

한국 최고의 로스쿨에서 벌어진 사건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면들을 보여주고 있는 JTBC 드라마 <로스쿨> ⓒ JTBC

 
사랑이 폭력이 될 때
 
사랑은 많은 이들에게 살아가는 힘이 되어 준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노래들은 삶의 에너지인 사랑을 찬양해왔다. 때문에 '사랑'은 종종 '폭력' 혹은 '공격성'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정신분석에서는 사랑과 공격성을 동전의 양면 같은 것으로 규정한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사랑을 갈망하지만, 삶은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인간의 조건 속에서 사람은 사랑과 생의 에너지 '에로스'와 죽음과 파괴, 폭력의 에너지인 '타나토스' 사이에서 늘 위태롭게 줄타기를 한다.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순간 상대방을 독점하고 통제하려는 공격성이 자라난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평등'이 깨졌을 때 사랑은 폭력으로 변질된다.
 
그 대표적인 관계가 바로 부모-자녀 관계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가장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이라 여겨져 왔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녀들은 부모에게 전적으로 생존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는 평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부모는 아이를 통제하고 길들이는 강자의 위치에, 아이는 이런 부모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는 약자의 위치에 놓인다. 더욱이 부모가 심리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면, 결핍된 욕구들이 자녀에게 투사된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를 더욱 강하게 소유하고 통제해 이를 충족시키려 한다.
 
솔B와 그 어머니는 이런 권력 관계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판사 집안에서 자랐지만 판사가 되지 못한 솔B의 어머니는 남편 강주만 교수(오만석)를 통해 그 꿈을 이루려 하지만 이마저도 좌절된다. 그러자 이제 이 결핍된 욕구와 열등감을 딸인 솔B에게 고스란히 투사한다. 그녀는 딸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루면서 판사로 만들려고 하고,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무섭게 다그치고 자살 위협까지 서슴지 않는 괴물이 되고 만다.
 
예슬과 남자친구는 연인 사이에서 평등이 깨어졌을 때 벌어지는 일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관계에서 남자친구는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강자다. 그는 예슬보다 신체적인 힘도 세고 부와 권력을 지닌 가족이라는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이런 자신이 예슬보다 우월하고 강하기 때문에 그녀를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소유물인 예슬이 자신을 제치고 로스쿨에 먼저 입학한다. 그에게 이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자신이 예슬보다 우월함을 증명해야 하는 그는 예슬을 물리적으로 통제한다. 일거수일투족을 불법으로 촬영하고, 의견 충돌이 있을 땐 신체적 폭력을 가해 자신이 강한 존재임을 각인시키려 한다. "왜 남의 여자 꼴을 너님이 챙기세요"(6회) "너 같이 새끈한 여자랑 즐긴 영상"(8회) 등 그가 내뱉은 대사엔 예슬을 소유물 취급하고 깎아내리려는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왜 이들은 벗어나지 못할까
 
 
 <로스쿨>의 예슬은 데이트폭력의 피해자지만, 폭력의 고리를 끊는 길은 힘겹기만 하다.

<로스쿨>의 예슬은 데이트폭력의 피해자지만, 폭력의 고리를 끊는 길은 힘겹기만 하다. ⓒ JTBC

 
이처럼 분명한 폭력인데도 불구하고 예슬과 솔B는 이 폭력적인 관계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도대체 왜 이들은 이런 폭력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사랑을 가장한 가해자의 메시지가 내면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해자가 오랫동안 주입해온 '나는 너를 사랑해. 이건 다 너를 사랑하기 위해 벌어지는 일이야'라는 메시지는 피해자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된다. 때문에 피해자들은 자신을 조정하려는 가해자의 메시지를 자신의 목소리로 이해한다.

6회 "나 엄마가 원해서 판사 되려는 거 아니에요. 법복 입고 저 사진 바꿔버릴 거예요"라는 솔B의 대사는 그녀가 자신과 어머니를 동일시하고 어머니의 욕망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내사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정신적 신체적 폭력을 당해왔고, 그 폐해를 온몸으로 겪은 예슬이 "폭력 아니에요. 사랑이에요"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내포된 의존과 인정의 욕구 역시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폭력으로부터 피해자들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기제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머니의 자궁에서 느꼈던 온전한 합일감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이런 욕구는 종종 연인관계 초기 즉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 충족되곤 한다. 아마도 예슬은 남자친구와 사랑에 빠졌을 때 이런 기쁨을 느꼈을 것이고 이를 마음 깊이 새겼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가 변질된 후에도 남아 있는 이 행복한 느낌은 남자친구의 폭력성을 직시하는 걸 방해하고 만다. 솔B 역시 마찬가지다. 솔B의 마음엔 어릴 적 자신을 돌봐주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 그리고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내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욕구들은 어머니의 부당한 요구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한편, 심리학자들은 친밀한 관계에서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합리적 신념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밝혀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의 폭력에 시달려온 피해자들은 '내가 좀 더 노력하면 가해자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예슬이 내가 남자친구에 잘하고 남자친구가 로스쿨에 입학하면 상황이 나아지겠지라고 기대를 품는 것은 바로 이런 심리적 기제라 할 수 있다. 솔B 역시 자신이 노력해 판사가 되면 어머니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가해자가 변할 것이라는 이런 믿음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이정은은 2007년 발표한 논문에서 이런 피해자들의 심리를 단호하게 '이타적 망상(altruistic delusion)'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사랑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면
  
 <로스쿨>의 강솔B 엄마는 학교 기숙사에 불쑥 찾아와 딸의 일상을 일일이 통제하려 든다.

<로스쿨>의 강솔B 엄마는 학교 기숙사에 불쑥 찾아와 딸의 일상을 일일이 통제하려 든다. ⓒ JTBC

 
그렇다면 이 폭력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현실을 직시하고 '이타적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자신 마음대로 조정하려 드는 가해자들은 대체로 나르시시스트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 말로는 '자기애적 성격'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일종의 성격 패턴으로 잘 변하지 않는다. 심리적인 변화에는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노력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데 불행히도 문제행동이 성격패턴으로 굳어진 경우에는 자신의 성격에 문제가 있음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이들이 변할 것이라는 기대는 내려놓는 게 좋다. 가해자는 변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다음으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믿는 것이다. 가해자로 인해 조종되고 있는 생각과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진실한 마음을 구분하고 후자를 선택할 용기를 내야 한다. 드라마 속 예슬은 남자친구에게 폭행을 당하면서도 그 사실을 숨기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애써왔다. 아마도 이는 남자친구가 가끔 속삭여주는 사랑의 달콤함에 속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8회 예슬은 마침내 자기 자신의 마음을 선택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건 남자친구의 협박이었음을 간파한 것이다. "제가 두려운 건 몰카에 찍힌 동영상이었습니다"라고 용기있게 말함으로써 그녀는 폭력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폭력적인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나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이다. 솔B의 경우 어릴 적에는 어머니 없이는 생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스스로의 힘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성인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힘을 믿고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은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 비로소 어머니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용기있게 자신의 마음을 선택했던 예슬 역시 남자친구가 크게 다치자 사랑과 폭력을 다시 헷갈려 하고 있다. 나 자신을 지키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음을, 폭력을 행사하는 애인의 사랑 따위는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직시할 때 진정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번 주 방송될 10회부터 예슬의 재판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예슬의 곁에는 로스쿨 동료들이 함께 하고 있다. 또한, 냉철하고 능력 있는 양종훈 교수(김명민)가 직접 변호인으로 나섰다. 이들의 응원에 힘입어 예슬이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지켜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보이는 솔B 역시 내면의 양심을 선택할 수 있기를 응원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여전히 '사랑의 가면을 쓴 폭력'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전해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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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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