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를 하던 남편이 TV를 켜더니 화면을 보고는 "네 사랑 나온다" 합니다. 화면으로 시선을 옮기니 MBC <무한도전>이 재방송되고 있더군요. 화면 속 멤버들은 뽀글 머리와 쪽진 머리 가발을 쓰고 있었고, 커다란 은색 양푼에는 김치가 들어 있었습니다. 1초만 보고도 김장 특집인 걸 알 수 있었어요. 지난 방송을 하도 보고 또 봐서 어지간한 회차는 바로 맞출 수 있거든요.

평소 같으면 저는 리모컨을 잡은 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인 멤버들이 매운 김치 복불복 게임을 하는 장면까지 남편이 채널을 돌리지 못하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작은 소리로 "당신 보고 싶은 프로그램 봐" 하고는 남은 밥만 열심히 먹었습니다.  

저는 MBC를 좋아했어요. 뉴스도, 시사도, 예능도 '마봉춘'이 언제나 제 으뜸이었습니다. 특히 '라디오 키드'였던 제게 MBC의 < FM 음악도시 >는 야간 자율학습을 버티게 해주는 밤 동무였고 정선희 언니가 진행하던 <정오의 희망곡>은 음습한 반지하 자취방도 참을만하게 해주는 비타민이었습니다. 그러다 <무한도전>을 만났고, 저는 이 희한한 프로그램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평균 '이하'를 자처하는 방송인들이 모여 논두렁을 달리고 에어로빅 대회를 준비하며 '엉망진창 도전'을 하는 게 웃기면서도 용기가 났어요. '그래, 사는 게 뭐 별거겠어? 저렇게 마구잡이로 도전하다 보면 뭔가는 되겠지!'

'공정 방송 사수' MBC 파업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MBC노조가 64일째 총파업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MBC사옥 현관 앞에서 열린 프리랜서 아나운서 채용 규탄 기자회견에서 손정은, 문지애 MBC 아나운서가 상복을 의미하는 검은 정장 차림으로 기자회견에 참석해 프리랜서 앵커와 계약직 기자 채용 등 사측의 비정상적인 조치를 규탄하며 김재철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날 MBC 아나운서와 기자들은 "뉴스 최종 전달자인 앵커의 생명은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정성인데, 파업 기간에 프리랜서 앵커 채용은 계약직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말 잘 듣는 인력으로 MBC를 장악하겠다는 속셈이다"고 주장했다.

2012년 4월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MBC사옥 현관 앞에서 열린 프리랜서 아나운서 채용 규탄 기자회견에서 손정은, 문지애 MBC 아나운서가 상복을 의미하는 검은 정장 차림으로 기자회견에 참석해 프리랜서 앵커와 계약직 기자 채용 등 사측의 비정상적인 조치를 규탄하며 김재철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저는 취업 생각에 막막할 때, 아르바이트를 하고 녹초가 되었을 때마다 <무한도전>을 시청하고 <정오의 희망곡>을 청취했어요. 제 20대 일부는 정오의 희망곡과 무한도전에 기대어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그래서 지난 2012년 MBC가 공정방송 사수와 김재철 사장 퇴진을 외치며 170일의 파업을 벌일 때 저 역시 시민의 한 사람으로 지지하며 응원했습니다. 

당시 MBC 내부에 여러 아픔이 있었지요. MBC의 자존심과도 같은 프로그램, < PD수첩 >에 벌어진 일이 대표적이죠. 2012년 몰아쳤던 광풍을 기억합니다. 파업 도중 해당 프로그램 소속 PD들을 향해 정직과 대기발령 등의 조치가 내려졌죠. 그리고 메인 작가들은 일시에 '전원 해고'됐고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박성제 사장님이 누구보다 잘 아실 거예요. 2012년 당시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해고의 아픔을 겪었던 대표적 해직 기자셨으니까요. 갑작스럽게 직을 잃는 고통과 좌절을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2012년 파업 이후 5년이 흐른 뒤, 2017년 11월에 전국언론노조 MBC본부가 '파업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마봉춘을 아끼던 많은 이들이 함께해 거둘 수 있었던 성과였죠. 파업에 동참하고 지지하던 방송작가들, 리포터들은 MBC의 성공을 누구보다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이른 축배였을까요, 최근 MBC에서 나오는 소식들을 보고 있노라면 착잡합니다.

지난해 MBC 보도국 아침 프로그램인 <뉴스 투데이>에서 9년을 일했던 두 작가가 동시에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아버지 상중에도 매일 출근하고, 방송사에 상주하며 일했던 작가들은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3월, 중앙노동위원회가 해고된 두 방송작가의 노동자성을 인정했습니다. 방송작가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은 첫 번째 사례였죠. 저는 두 작가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6일, 기사가 나왔더군요. MBC가 중앙노동위원회의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결정의 기저에는 어떤 고민이 있었을까요. 지난달 20일 열린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에서 나온 얘기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언론 기사에 따르면 이사회에서 MBC 라디오 PD 출신 김도인 이사는 이렇게 얘길 했더군요.

"이 사람(방송작가)들을 근로자로 인정하면 MBC가 작가들을 쓰는 방식, PD와 작가의 일 배분 등 모든 게 다 달라져야 한다. MBC가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대외적 명분 때문에 이 사람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면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 올 것이다"

MBC라서 더 안타깝습니다
 
MBC 파업 첫날, 사장실앞 피켓시위 언론노조 MBC본부 김연국 위원장과 조합원들이 파업 첫날인 4일 오전 MBC상암 사옥 14층 사장실앞에서 김장겸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체포영장이 발부된 김장겸 사장은 이날 새벽 6시 출근해 보도국을 돌며 근무중인 직원들을 격려하고 기념촬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노조 MBC본부 김연국 위원장과 조합원들이 파업 첫날인 2017년 9월 4일 오전 MBC상암 사옥 14층 사장실앞에서 김장겸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저는 MBC 박성제 사장님께 묻고 싶습니다. MBC가 매일 출퇴근하며 책상에 앉아 근무한 작가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대외적 명분' 때문인 걸까요? 외부의 시선이나 개입이 없었다면 '상근하는 프리랜서'의 부조리함은 언제까지 이어졌을까요? 이제라도 방송작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시대가 주는 소명 아닐까요? 사각지대의 노동, 인권, 복지를 살피는 MBC의 카메라는 왜 방송 제작 인력만 피해 가는 걸까요? 그렇다면 MBC 구성원들이 겪어낸 그 지난한 투쟁과 파업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요? 성역 없는 보도, 외압 없는 취재를 위함은 아니었던가요?

억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MBC만의 문제는 아니니까요. 방송가가 대표적인 '비정규직 백화점'이라는 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MBC라서 그렇습니다. 만나면 좋은 친구였고, 제 20대의 일부를 지탱했던, 라디오라는 세계를 만나게 해 준 마봉춘이니까요. 기나긴 탄압에도 버티며 '시민의 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던 방송사였으니까요. 

비감한 마음에 MBC 홈페이지를 들어가 이곳저곳을 떠돕니다. <뉴스데스크>의 '소수의견'이라는 코너가 눈에 띄네요. 작은 목소리를 크게 보도한다고요. 가장 최근에 올라온 소수의견은 늘 해고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 요양보호사의 이야기였습니다.

기사 제목이 이렇더군요. "일 시킬 때만 '필수 노동자'... 해고는 아무 때나" 혹시 그거 아시나요? MBC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하던 방송작가가 들고 있던 패널에는 "일할 때는 동료 작가, 자를 때는 부품 취급"이었습니다. 기사 제목과 90% 의미가 일치하지요. 방송작가를 고용하는 MBC와 요양보호사를 고용하는 요양시설은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닮아 있나요? 

해고된 방송작가들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원직 복직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MBC와 긴 싸움을 시작하게 되겠지요. 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이 과정을 지켜보게 될 겁니다. 당분간은 TV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무한도전 재방송을 해도 편하게 보기는 힘들 것 같네요. 오래된 친구를 잃은 것처럼 제풀에 서러운 날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relaxed)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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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와 밤이 있는 한 낭만은 영원하다고 믿는 전직 라디오 작가. 책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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