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의 한 장면.

다큐멘터리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의 한 장면. ⓒ 전주국제영화제

 
성소수자 자녀를 위해 지난 4년간 거리에서 싸운 엄마들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어느 날 갑자기 성소수자임을 고백한 자식을 이해해 보려고 하는 과정에서 더 나아가 그들이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받는 폭력과 차별을 인지하고 '투사'가 되어버린 엄마들이다. 

이들이 출연한 영화 <너에게 가는 길>은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화제작이었다. 성소수자 부모 연대 소속인 비비안과 나비, 이들의 가정을 파고들고 나아가 아이와 함께 거리에서 투쟁한 역사를 담은 이 영화는 지난 5일 시상식에서 다큐멘터리상을 받았고, 심사위원 특별언급에 올랐다.

시상식 전 전주 영화의 거리 내 한 카페에서 연출자인 변규리 감독, 그리고 주인공인 비비안과 나비를 만났다. 첫 영화 출연, 게다가 주인공이라니. 두 엄마는 "일단 감개무량하다"라고 심경을 밝혔다.

사적 아픔을 공개하기까지

성소수자 인권 운동 단체인 연분홍치마의 제안이 시작이었다. 처음엔 성소수자 부모모임 홍보영상을 제안받았다던 변규리 감독은 "직접 부모님을 만나게 되면서 성소수자 자녀를 둔 부모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며 "자신들의 얘기가 카메라에 담기는 게 심적으로 힘들 수도 있는데 현장을 찾은 절 마치 가족처럼 챙겨주셨다"고 말했다. 

"어쨌든 되게 사적인 얘기일 수 있고, 사적인 공간이 다 노출되고, 자식과의 이야기들이 공개되는 게 어려운 일일 수 있잖나.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출연 계기에 대한 질문이 많이 나왔다. 사실 다른 부모님도 많이 활동하고 계시는데, 나비님과 비비안님이 워낙 캐릭터가 매력적이셨다. 두 분은 자식과 관계 맺는 방식이 많이 달랐는데 그게 흥미로웠다. 나비님은 표현을 잘 안 하시는 분이고, 비비안님은 표현에 능하시고. 또 두 분 다 자신의 직업이 있는 분이셨다. 전업 주부를 폄하하는 게 절대 아니고, 일하는 여성의 위치에서 가족을 생각하는 모습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변규리 감독)

"그러고 보면 우린 준비된 배우 아닌가 싶다(웃음)." (나비) 

"카메라에 날 온전히 드러내는 게 어렵긴 하다. 아이와 관계 등을 솔직하게 보일 수 있는 게 다큐의 매력이기도 하다. 영화에 나오는 저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다,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시게끔 만드는 영화이길 바랐다. 서로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부모와 자식이 나오잖나. 여전히 자식이 어렵거든. 난 그렇다. 이 영화로 단 1명에게라도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감개무량하다." (비비안)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출연진인 비비안(왼쪽),과 나비님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출연진인 비비안(왼쪽)과 나비님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분홍치마

 
비비안은 항공사 소속으로 공항에서 근무하고, 나비는 수십 년간 소방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먼저 이런 일을 겪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아직 아니더라도 내 일이 되었을 때, 이웃에서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그런 부분에 생각을 할 수 있게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영화 출연의 의미를 전했다.

어려운 상황이 올 때마다 시니컬하게 받아들이는 나비의 대사에 관객들은 크게 웃기도 했고,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며 꾸역꾸역 자식과 함께 현장을 나가는 비비안의 모습에 울기도 했다. 변 감독이 말한 두 사람의 서로 다른 개성이 공감을 크게 얻는 분위기였다.

변규리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활동 초기 극소수였던 성소수자 부모모임 회원이 지금은 100여 명 이상으로 크게 늘었지만 함께 활동하던 부모 회원 몇몇은 사라지고 없는 현실을 전하며, 객석에서 함께 눈물을 흘린 일이었다. "영화라는 결과물을 생각하진 않았고, 일단 기록 차원에서 중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다"며 나비는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을 전했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2018년 제1회 인천퀴어축제 당시 집단 린치 사건이다. 

"경찰이 있었는데도 피켓을 뺏고, 우리에게 나가 죽으라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뭘까. 상상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자기들이 알지 못한 세상,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니 그런 혐오 행동을 할 수 있는 거겠지. 영화가 중요한 게 그런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게 하지 않나. 전 결국 혐오나 옳지 않은 주장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언젠간 옳은 길로 가겠지. 다만 그 혐오의 시간이 길어지면 지치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을 건데 그게 안타깝다. 사람들의 관심이 더욱 필요하다." (나비)

투사가 된 엄마

나비가 언급한 인천퀴어축제가 바로 많은 성소수자 자녀의 부모들이 투사로 거듭나게 하는 계기였다고 한다. 단순히 자식을 부모 입장에서 잘 이해하면 되는 문제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이들이 훨씬 강하고 거친 사회적 폭력에 노출된 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사회가 뭔가 잘못되어 있구나. 단순히 내가 이해해서만은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고 비비안과 나비는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고백한다.

"그때 사람들에게 맞은 기억이 아직도 떠오른다.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우리도 그때에 비해 많이 성장했지만 동시에 혐오세력도 목소리를 더욱 내기 시작하더라. 처음 활동을 시작했을 2017년 이후 1년 동안은 매일 울면서 스스로를 다잡고 극복하다가, 어느 순간 앉아서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퍼레이드 때 아이들에게 '니네 부모는 이 사실을 아냐'라고 막 욕하던 사람들도 있었잖아. 내가 소리쳤지. '우리가 부모다!'라고. 그 이후로 어디서 누군가 기자회견이라도 하면 자꾸 관심을 갖게 되더라." (비비안)

"'응, 우리 퀴어 부모'라고 팻말에 적기도 했잖아(웃음). 나만 이해하면 되고 사람들이 좀 도와주면 해결될 일이라 생각했는데 거대한 혐오의 광기를 보니 중요한 사회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한결(나비의 아들)이도 유튜브 활동도 하면서 자신에 관해 얘기하고 그랬는데 그 이후 운영을 안 하게 됐다." (나비)


영화는 민감할 수 있지만 래디컬 페미니스트, 속칭 급진 페미니즘 문제도 짚고 넘어간다. 성소수자인 한 학생이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했다가 학내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반발과 혐오로 끝내 입학을 포기한 사건이 언급된다.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그들처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제가 활동하는 연분홍치마가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모토가 있기도 하고. 그분(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이해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비님은 그들을 보면서 믿었던 땅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했을 정도로 절망했었다. 어떤 법을 반대하는 건 서로 논의하면 될 일이지만,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살지 말라고 하는 건 정말 아니지 않을까." (변규리 감독)

"페미니즘이나 인권이라는 건 소수만 잘살자, 여자만 잘살자는 게 아니잖나. 균형을 잡자는 건데 마치 자신들이 피해를 보는 듯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놀다 보면 깍두기가 있잖나. 좀 모자라도 같이 끼워서 어울리게 하는 문화가 있었다. 역시 상상력의 부족이 아닐까 싶다. 소수자로 살며 힘들다는 걸 느꼈다면 다른 사람의 소수자성, 약자성도 공감해야지. 마치 페미니즘 판에서 본인들이 더 피해를 입는다고 하는 게 너무 안타깝다. 그럴수록 우린 더 얘기해야 한다. 안 하면 소수자의 이야기는 지워지고 분리되니까." (나비)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출연진과 변규리 감독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 출연진과 변규리 감독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분홍치마

 
좋은 엄마가 될 가능성

자식의 커밍아웃으로 부모의 삶 또한 크게 바뀌었고, 그것은 긍정적 변화라고 나비와 비비안은 입을 모았다. 서로 대처 방법은 달랐지만, 기존의 친구와 지인 중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 있는 동시에 새롭게 연대하는 사람들 또한 생겼다는 게 큰 수확 중 하나라고 한다.

"아이가 공격받을까봐 차마 난 친척이나 지인에게 말 못 했는데 아이가 친가를 찾아다니며 말을 했다. 할아버지와 관계가 좋았기에 처음엔 커밍아웃하고 할아버지가 싫어하지 않을지 걱정하더라. '걱정 마라, 싫어하면 내가 가서 상을 엎어 버리겠다' 이랬다(웃음). 그런 두려움에서 보호해주고 싶었다. 가족에게 얘기하는 게 두렵냐고? 우리 아이는 그런 세상에서 얼마나 더 두려웠겠나. 아이 잘못도 아닌데 말이지." (나비)

"저도 커밍아웃 받고 1년 안에 대부분의 가족에게 말했다. 처음엔 내 친구들에게 말을 못하겠더라. 근데 계속 내 얘길 하니 외로움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친척, 가족, 친구들에게 차례로 말했다. 이 영화 예고편이 나왔을 때 친척 단톡방에 공유했더니 아무 말이 없어서 상처를 받을 뻔했는데 그들 입장에서도 낯설 수 있으니 이해하려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는 연락이 끊겼다. 이런 일에 굴하지 않고 관련 소식이 있을 때마다 공유하는 중이다(웃음)." (비비안)

"회사에 아주 꼰대 상사가 있는데 하루는 내 팔찌를 보더니 그게 뭐냐고 묻더라. 당당하게 말했지. 자식이 트랜스젠더고, 나는 그의 엄마라고." (나비)


비비안과 나비는 결코 자신이 훌륭해서가 아닌, 자식으로 인해 자신들이 변했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너에게 가는 길>이란 영화를 통해 세상에 숨어 있는 또다른 소수자들이 힘을 나누고 연대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화 자체가 어색했던 주연 배우들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조금은 된 것 같기도 하다. 엄마에 활동가 정체성이 더해졌잖나. 다큐 작업을 하며 생애 구술사도 많이 했는데 스스로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시작은 예준이가 좀 편하게 사는 사회를 위한 거였는데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지금이다. 다큐 작업이 제겐 그래서 소중했다." (비비안)

"동감한다. '미운 퀴어 새끼'(한 예능 프로를 빗댄 표현)가 부모의 스승이 됐다. 한결이 아니었으면 제가 이런 변화를 겪을 수 있었을까. 사람이 나이가 50이 넘어서 세계관이 바뀌긴 정말 힘들잖나. 이 영화를 보시면 일단 보는 것 자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줄 것이다. 게다가 재밌기까지 하다." (나비)

"<너에게 가는 길>이란 제목이 성소수자에게 가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긴 한데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성소수자 당사자나, 혹은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고민하는 분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가족이란 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나.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 이해를 시도했을 때 가족이라는 틀을 돌아보고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변규리 감독)
너에게 가는 길 비비안 나비 변규리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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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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