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타이틀

22회 전주국제영화제 타이틀 ⓒ 전주국제영화제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세상을 떠난 지 벌써 3년. 한비(강진아 분)의 기일이다. 한비가 잠들어 있는 장소로 향하는 길, 운전석에 앉은 해수(김예지 분)는 마음이 심란하다. 옆자리 조수석에는 헤어진 남자친구이자 한비의 동생인 한성(노재원 분)이 앉았고, 뒷좌석에는 그의 엄마 진경(정은경 분)이 타고 있다. 심지어 진경은 두 사람이 헤어진 사실도 아직 모르는 상황, 세 사람은 지금의 상황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한비를 만나러 가고 있는 것이다.

차 안에는 한비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해수가 같이 작업하던 유리 공예 작품도 함께 실려있다. 조각난 유리를 이어 붙여 조명을 비추면 어두운 방안을 반짝이게 만들곤 했던 작품이다. 사람들은 못쓰는 쓰레기를 주워다가 만든 물건이라고 이야기하곤 했지만, 적어도 자신들끼리는 기능을 다한 것들을 모아 만든 것이라는 의미를 붙였다. 한비의 엄마는 두 사람이 함께 작업했던 이 작품만 보면 마음이 좋아진다고 한다.

사실 그런 작품들을 바라보는 해수의 마음은 조금 다르다. 정작 좋기만 한 건 아니다. 때로는 가족처럼, 또 친구처럼 따르던 언니가 그렇게 세상을 떠난 뒤에 지금까지도 마음이 복잡하다. 때때로 한비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고, 또 함께 작업한 것들을 보고 있으면 그 때의 장면들이 생각난다. 그렇게 찾아오는 어지러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도 그렇지 못하는 것도 어느 쪽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마음을 가라앉히면 그건 또 그것대로 한비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지워지는 느낌이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한비>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한비>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2.
세상을 떠난 이를 추모하는 길을 떠나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것이다. 시간이 오래 흐르고 나면 괜찮아지는 마음도 있지만, 아직 떠나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에서는 쉬이 놓아지지 않는 감정들이 꽤 많이, 그 길 위에서 다시 떠오르곤 한다. 3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그럴만한 시간이다. 게다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한 관계의 세 사람이 그 길을 동행하고 있다. 비좁은 차 안, 폐쇄된 공간 속에서 아직 정제되지 못한 각자의 감정들이 조금이라도 건드려지면 곧 터질 준비만을 하고 있다.

영화 <한비>의 타이틀 속 이름은 극 중 세 사람과 모두 밀접한 연관이 있다. 엄마 진경의 딸이자 한성의 누나, 그리고 해수에게는 친한 언니이자 동료인 사람. 영화는 그녀의 세 번째 기일에 모인 세 사람의 모습을 따르며 존재의 상실을 겪은 이들이 세상을 떠난 존재를 기억하고자 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전체 러닝타임의 대부분은 세 사람 각자가 간직하고 있는 한비라는 인물과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기억들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갈등은 서로를 해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꺼낸 기억이 훼손되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쪽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03.
갈등의 시작은 한성과 엄마 진경으로부터 시작된다. 한비가 수목장으로 잠든 나무에서 벌레가 생기는 것이 마음 쓰인다는 진경의 말에 한성은 해충이 아니니 마음 쓸 필요가 없다고 대꾸한다. 그래도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며 한비가 생전에 벌레를 싫어했다는 말까지 꺼내는 진경. 이번에는 또 한성이 나서 누나인 한비가 벌레를 싫어하지 않았다며 말꼬리를 잡는다. 가족이었던 두 사람의 한비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이다. 딸을 낳고 기른 엄마는 엄마대로, 같은 피를 나눈 동생은 동생대로 자신의 기억이 온전하길 바라는 듯하다.

두 번째는 엄마 진경과 해수의 갈등이다. 한비의 이름이 순한글로 된 이름인지 한자로 지어진 이름인지에 대한 문제. 해수는 여태까지 한비의 이름이 우아할 한에 갖출 비자를 쓰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한비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라며 말이다. 여기에 엄마 진경이 선을 긋는다. 한비의 아빠가 직접 지어준 이름인데다 한비는 한자가 없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단다. 진경은 조금 전보다 조금 더 격앙된 목소리다. 딸에 대한 기억으로 아들과 말다툼을 하게 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딸의 친구에게까지 이런 대우를 받으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자신이 한비의 엄마라는 자존심. 그런데 어떻게 너한테 그런 말을 했겠느냐며 해수의 기억까지 의심하는 듯한 말로 쐐기를 박는다.

이렇게 직접적인 갈등까지는 아니지만, 한비의 죽음은 한성과 해수 사이의 관계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영화에서 그 지점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변에 놓인 정황이 그렇다. 어쩌면, 세 번째의 기일까지 두 사람과 함께 한비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던 것은 다 같이 가면 한비가 좋아할 것이라던 한성의 제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중간에 해수가 떠올렸던 한비와의 대화. 그 중에서도 마음에 안 들어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다른 게 좋아질 거라던 한비의 말처럼 해수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해온 것 같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세 사람의 무게 중심에 한비라는 인물을 놓고, 그들이 각각 한 번씩 부딪히게 만드는 이다영 감독의 연출은 그 방향이 잘못이나 비난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하는 기억을 어찌할 수 없는 존재들의 안타까움, 그것에 부정당하지 않기 위한 존재들의 몸부림을 보여주기 위함이랄까. 서로의 부딪힘 이후에 남는 묵직한 적막이 되려 더 깊은 슬픔과 애도의 마음이 되어 전달되는 것 같다.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한비> 스틸컷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한비>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4.
우리가 함께 만든 빛들은 여전히 내게 머물러 있는데, 나는 오랫동안 볼 수 없었어. 언니 없이 그 빛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아니, 바라봐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미안해. 혼자가 되어도 빛을 잘 간직할 수 있도록 가만히 바라봐 줘. 보고싶어. 한비에게 해수가.

극 중 다섯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 해수의 독백, 한비에게 보내는 편지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 또한 동일한 맥락이다. 해수의 입장에 한정해서 생각한다면, 이번 동행은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에 더해 과거를 끊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비의 가족과 함께하는 추모 의식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다. 실제로 해수는 마지막 편지를 쓴 뒤에 진경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한성에게 정확한 선을 긋는다.

이 과정은 한비의 죽음 이후 혼란스러웠던 자신의 마음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과정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기억이 조금씩 지워지는 것 같은 기분(첫 번째 독백), 내가 기억하는 게 언니인지 나인지 헷갈리는 마음(네 번째 독백), 언니 없이 그 빛들을 바라볼 수 있을 지 확신이 생기지 않는 마음(다섯 번째 독백)들로 가득했던 내면과 주변을 모두 말이다. 명확하지 않았던 것들을 모두 걷어내고 오롯이 추모의 대상에 대해서만 마음을 쓸 수 있도록.

생전에 한비와 함께 했던 작업이 기능을 다한 것들을 모아 새로운 빛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면, 이제 해수에게 필요한 것은 그 빛을 어떻게 잘 기억하고 간직할 것인가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행위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지난 시간의 창조적 행위들이 단순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영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지금부터의 창조적 행위들은 추모의 영역에까지 닿게 될 것이다. 이제 정말로 혼자 남게 된 해수에게.

05.
사람들이 잘 때 눈동자를 양 옆으로 움직이는데 버릴 기억을 고르기 위해서래. 그래서 그걸 따라서 눈동자를 굴려보는거야. 천천히 나의 속도에 맞춰서. 아무리 눈동자를 굴려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도 있는데, 나는 그걸 잘 껴안고 살아가 보려고 해. 그럼, 우리 다음 전시도 잘해보자. 해수에게 한비가.

영화가 들려주는 그녀의 마지막 대답이다.
영화 전주국제영화제 한비 이다영 강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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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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