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네이버 인디극장 X 오렌지필름 기획전 : Time travel 포스터 네이버 인디극장 X 오렌지필름 기획전 : Time travel 포스터

▲ 네이버 인디극장 X 오렌지필름 기획전 : Time travel 포스터 네이버 인디극장 X 오렌지필름 기획전 : Time travel 포스터 ⓒ 네이버 인디극장


'네이버 인디극장 X 오렌지필름 기획전 : Time travel'은 오프라인에서 관객을 만나온 오렌지필름의 '시간'과 온라인에서 지속적으로 관객을 만나온 네이버 인디극장의 '시간'을 교차하며, 영화가 가진 '시간'을 찾고자 기획되었습니다.

관객들이 직접 선택한 작품들을 포함한 5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작품들을 3월에서 8월까지 총 5회차에 걸쳐 순차적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모든 작품은 네이버 인디극장(https://tv.naver.com/indiecinema)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독이 담긴 잔> 스틸컷 영화 <독이 담긴 잔> 스틸컷

▲ 영화 <독이 담긴 잔> 스틸컷 영화 <독이 담긴 잔> 스틸컷 ⓒ 네이버 인디극장


01.
독이 담긴 잔
소봉섭 감독


영화의 시작과 함께 바닥에 놓인 흰 그릇에 탕약이 부어진다. 이내 엎드린 남자가 냄새를 맡는 듯 그릇에 코를 바짝 대더니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조심스럽게 그릇을 집어 든 남자.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탕약의 맛을 보기 시작한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것은 이름 모를 사람의 기침 소리뿐.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식은땀까지 흘린다. 들고 있던 그릇을 조심스럽게 내려 앞에 있는 사람에게 건네는 남자. 다시 탕약을 받아 든 사람은 왕이다.

처음의 남자는 왕(조현철 분)의 탕약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마셔본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 왕을 독살하기 위해 탕약에 독약이라도 타게 된다면, 그가 먼저 이상 증세를 보이고 죽게 될 것이다. 그는 시약관(박종환 분), 왕을 위해 준비될 약을 먼저 먹도록 만들어진 사람이다.

작품은 시약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영화의 시작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선 중기, 사화 피해자들을 복권시키려 하는 왕이 있었다. 하지만 집권층 사대부는 이 정책을 강하게 반대하면서 왕을 위협했다. 독살을 막기 위해, 누군가가 먼저 왕의 음식을 먹어봐야 했다. 독살을 막기 위해, 누군가가 왕 대신 죽임 당하도록 선정되었다.

특정 시기, 실존했던 특정한 왕을 지칭하지는 않지만 조선 중기에 실재했던 사화를 소재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화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으로 왕을 암살하려는 시도들이 생겨났다는 설정 하에, 이 일을 막을 인물인 시약관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 <독이 담긴 잔>은 타인(왕)의 운명을 대신 짊어져야 하는 인물 시약관의 하루를 그려낸 작품이다. 시약관은 지난 사화 사건으로 인해 유배형이 내려졌던 한 양반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는 일을 두고 왕과 대신들이 대립하게 되자 더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병약한 왕을 조금 더 빨리 제거하기 위해 현재 조정의 권력을 쥔 대신들이 자신이 시약할 약에 독을 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소봉섭 감독의 연출작 <독이 담긴 잔>은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특정 상황 내에서 시약관이 느끼게 되는 불안을 극의 서스펜스로 활용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권력 구조가 무너져 있는 상황이나 힘이 없는 쪽의 행위가 힘이 강한 쪽의 의지를 반(反)하는 상황, 언제 세상을 떠나도 나쁘지 않은 왕의 유약함까지. 이 모든 설정이 시약관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으로 귀결된다. 굳이 이런 특정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거대한 권력의 사이에 머물게 되는 미약한 존재의 생존에 대한 갈망은 비겁하거나 초라하거나 비참해지기 마련인데, 이 작품 속 시약관의 모습이 꼭 그렇다.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왕의 승하를 알리는 듯한 곡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시약관은 아직 살아있다.
 
영화 <김장> 스틸컷 영화 <김장> 스틸컷

▲ 영화 <김장> 스틸컷 영화 <김장> 스틸컷 ⓒ 네이버 인디극장


02.
김장
이다나 감독


김장을 하는 날이다. 영주(한태은 분)네 가족이 시골 외갓집에 모두 모인다. 이미 전날부터 배추를 소금에 절여 놓고 자식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할머니 때문이다. 평소에는 명절 때도 잘 모이지 않는 가족들을 할머니가 김장을 빌미로 불러 모았다. 영주도 일손을 도우러 엄마(안민영 분)를 따라왔다. 김치통을 들고 버스를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엄마의 기사 노릇을 해 줄 사람도 필요했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김장을 시작하면서 할머니와 이모들이 투닥거리기는 했지만, 자주 볼 수 없는 아쉬움이 그렇게 튀어나오는 건가 싶었다. 영주에게 살갑지 않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마찬가지. 그저 다 옛날 시골 사람들이라 겉으로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구나 싶었다.

조금 늦게 삼촌네 가족이 도착하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거실에 모두 모여 배추에 속을 넣는데, 삼촌이 자리를 비운 큰이모의 남편(이황의 분)을 힐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가 죄지은 게 있으니까 저러는 거지. 켕기는 게 있으니까 닥치고 있는 거지. 누나, 가만히 있을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영주가 와 있잖아. 쟤 속이 어떻겠어. 이게 말이나 되냐고. 내가 차에서 내리는데 심장이 다 철렁하더라니까." 작은 이모가 나서 할머니 핑계를 대며 삼촌의 입을 막아보려 하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큰 이모는 불편한 표정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집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특히, 영주와 관련한 일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영주는 처음부터 쭉 불편했던 것 같다. 삼촌의 차인 줄 알았는데 큰이모 내외의 차가 할머니 집으로 들어올 때도 그랬고, 거실에서 할아버지와 큰이모의 남편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도 그랬다. 배추에 속을 넣던 큰이모가 살가운 척을 하며 간을 보라던 때에는 싫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고, 김장 비닐을 찾으러 창고에 혼자 갔을 때는 누군가 창고 문을 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삼촌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고 만다. "어떻게 여기 둘이 같이 올 생각을 다 했대?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만져 놓고."

이 영화 <김장>을 연출한 이다나 감독은 상처를 제때 제대로 덮지 못했을 때, 멀쩡해 보이는 땅 표면과 달리 황폐하게 말라가는 표면 그 아래의 모습을 김장에 비유하고자 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각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가족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장치로도 활용되지만,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한 가족의 모습을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그저 땅 속에 묻히기만 한 김장에 빗대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모른 척하는 조부모, 아닌 척하면서 남편을 두둔하는 큰이모. 집안의 평화를 내세우며 일을 감추기에 급급한 작은이모와 정작 당사자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삼촌까지. 가족은 모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영주를 아프게 절이고 무친다. 당당한 가해자와 눈치를 보는 피해자. 이 썩은내 나는 간극 속에서 영주는 여전히 홀로 아프고, 시시때때로 터져나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집 밖에서 혼자 구덩이를 파던 영주는 작은 결심을 한다. 그리고 끝내 가족들이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더이상 이 집에서 김장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명절에도 가족들이 모일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대신에 영주의 아픔은 조금 덜어질 것이다.
 
영화 <사창리> 스틸컷 영화 <사창리> 스틸컷

▲ 영화 <사창리> 스틸컷 영화 <사창리> 스틸컷 ⓒ 네이버 인디극장


03.
사창리
오세인 감독


"윤석씨, 진짜 좋았어요. 원래 배우보다 훨씬 좋으신 것 같아요."

윤석(이준창 분)은 영화 촬영 현장이 처음이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처음이라는 뜻이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도 전에 오케이와 컷 사인이 번갈아 떨어진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연기를 잘 한단다. 사실 그는 근처 군부대에서 복무 중인 군인이다. 일병. 아직 갈 길이 멀다. 사실 윤석은 오늘 아침에 외박을 나왔다가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당했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말이다. '일말 상초'(일병 말기, 상병 초기의 줄임말로 이 시기 군대에서 이별을 많이 한다는 의미에서 생겨난 신조어-편집자 말)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았나 보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 옆을 지나던 한 영화과 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자신을 선영(안희은 분)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갑자기 스케줄을 펑크 낸 배우 대신에 실연을 당한 군인을 연기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아마도 선영은 윤석의 처지를 한눈에 알아본 듯 하다. 여기까지가 윤석이 지금 카메라 앞에 서기까지의 이야기다.

여자친구와의 이별에 예정에 없던 촬영까지. 정신없이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도 윤석은 눈길이 가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만든 선영, 바로 그녀다.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이자 선배 혹은 감독들로부터 지적과 호통을 당하는 사람. 어쩌면 군대라는 조직 내에서 아직 일병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윤석에게는 전우애 혹은 동질감을 느낄 법한 장면일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완전히 풀린 기수가 아니라면, 그 역시 아직 그런 모습의 생활을 하고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런 안쓰러운 마음이 전부는 아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촬영장이 어색할 자신을 돌봐주는 그녀에게서 약간의 위로를 느끼지 않았을까. 실제로 윤석은 그녀의 잡일을 남몰래 도우며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자 노력한다.

영화 <사창리>는 시종일관 결코 가볍지 않은 톤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면서도 그 코드만큼은 분명히 코미디에 닿아 있고자 노력하는 작품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무게감은 영화 촬영장에서 발생하는 권위주의적인 장면들과 이제 막 헤어진 남녀의 관계를 통해 획득한다. 다소 경직될 수 있을 법한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공감과 실소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한데, 사실 이들 모두는 후반부의 전복을 위한 철저한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특히, 선영과 감독(문수영 분)이 만들어내는 반전과 이에 대응하는 윤석의 행동은 묘한 공감과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 정도로 흥미롭다. 이 내용을 어떻게 후반부까지 숨겨놓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 작품 속에는 문자 그대로 우스운 상황, 그러니까 재미있는 상황 말고도 이상해서 우스워지는 상황도 몇 차례 등장한다. 가령, 첫 번째 이별보다 두 번째 이별에 더 슬프고 억울해 하는 듯한 윤석의 모습이랄까.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 것은, 영화 속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어떻게 완성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영화 네이버인디극장 오렌지필름 기획전 독립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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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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