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더 파더> 메인포스터 영화 <더 파더> 메인포스터

▲ 영화 <더 파더> 메인포스터 영화 <더 파더> 메인포스터 ⓒ 판씨네마(주)


01.
딸이 구해주는 간병인을 자꾸 내쫓는 노인이 하나 있다. 이번이 세 번째. 노인은 자신을 돌보던 간병인이 시계를 훔쳐갔다는 거짓말로 딸 앤(올리비아 콜맨 분)에게 해명하지만, 딸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금방 거짓이 들통나지만 그녀의 아버지, 80대 노인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 분)는 적반하장, 시치미를 뚝 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노인은 틈만 나면 딸이 집을 노리고 자신을 어디론가 보내려는 낌새를 느꼈다며 자신은 절대로 자신의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악다구니를 쓴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자신을 돌보러 온 새 간병인을 보고는 그녀의 마음을 얻기라도 하겠다는 듯 행동한 것이다. 대낮부터 술을 권하며 익살스런 농담을 건네는 것은 물론, 80대 노인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유연한 몸놀림으로 탭댄스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자신의 술잔을 한 번에 비우며 남성미를 과시하려는 행동도 보였다. 이쯤 되니 어떤 것이 진짜 노인의 모습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다. 이 영화 <더 파더>말이다.
 
이 작품은 자신의 일상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노인 안소니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던 그는 치매로 인해 자신의 기억에 혼란을 느끼기 시작하고 온전하던 세상을 의심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는 물론, 현실의 구조, 자신과 함께하는 이들과의 관계까지도 잃어버린 채 의심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의 기억에 맞서 끊임없이 몸부림친다.
 
문제는 그의 변화가 단순히 그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를 돌봐야 하는 딸 앤은 물론, 그의 남편인 폴(루퍼스 스웰 분)의 삶까지 모두 흔들어 놓는다. 안소니는 작은 인기척만 들려도 딸 앤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연약하고 작은 노인이지만, 지금 자신이 어디에서 지내고 있는지, 또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 자신을 돌보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도 때때로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의 기억 하나가 주변의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영화는 그런 그의 삶과, 그를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를 모두 아우르며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 <더 파더> 스틸컷 영화 <더 파더> 스틸컷

▲ 영화 <더 파더> 스틸컷 영화 <더 파더> 스틸컷 ⓒ 판씨네마(주)


02.
영화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이 영화가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 시작은 2012년의 파리에서부터다. 플로리안 젤러라는 극작가가 집필한 <더 파더>라는 희곡이 한 편 상연된다. 밀도 높은 심리극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작품은 '지난 10년간 가장 호평을 받은 작품(the most acclaimed new play of the last decade)'이라는 평을 받으며 큰 관심을 얻었다.

이에 2014년에는 프랑스의 토니상이라 불리는 몰리에르 어워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이듬해인 2015년에는 영국의 웨스트 엔드(West End)에서 초연을 시작했고, 이어 2016년에는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도 처음 선을 보이게 된다. 당시 타이틀 롤을 맡았던 배우 프랭크 란젤라에게는 토니상과 올리비에상의 남우주연상까지 안기며 세계에서 가장 널리 상연된 프랑스 연극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정확히 8년 뒤인 2020년, 미국 선댄스 영화제에서 이 영화 <더 파더>가 세계 최초로 공개된다. 원작의 스토리를 완성시킨 바 있었던 플로리안 젤러가 직접 연출을 맡으며 더 화제가 되었다. 영화 <위험한 관계>(1988)로 제61회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어톤먼트>, <토탈 이클립스> 등 화제작의 각본을 도맡아 온 각본가 크리스토퍼 햄튼이 각색을 도왔다. 특히, 크리스토퍼 햄튼의 경우 다양한 연극과 뮤지컬에 참여하며 현재까지 토니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수상하며 무대에 대해에서도 높은 이해도를 갖고 있어 플로리안 젤러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었다고 한다.
 
03.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스릴러 같다. 연극 무대가 그랬던 것처럼 내러티브를 쌓으면서 관객이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고, 관객이 캐릭터와 가깝게 느끼기를 바란다. - 플로리안 젤러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와 같은 내용이 중요한 까닭은, 플로리안 젤러 감독이 두 작품 모두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도 '같지만 다른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존의 무대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플로리안 젤러와 크리스토퍼 햄튼이 가장 고민한 부분이 바로 '같지만 다른'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지점이었다고 한다. 원작의 본질적인 내러티브들은 유지하되 고스란히 옮긴 것처럼 보이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이는 두 사람이 인테리어와 소품에 심혈을 기울인 까닭이기도 하다. 관객들을 안소니와 같이 혼란의 미로 속으로 밀어 넣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아파트라는 공간을 통해 인간이 겪는 혼란 그 자체를 시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화에서는 특정 지점마다 텅 빈 공간을 보여주며 환기를 시키는데, 이는 연극에서의 막(Act)을 구분하는 것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을 보면서 관객들이 주의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중요한 지점이다.
 
04.
두 배우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 <더 파더>의 중심에는 역시, 치매를 겪는 80대 노인 역을 완벽히 수행해 낸 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있다. 그는 1992년, <양들의 침묵>에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남아있는 나날>, <닉슨>, <아미스타드>, <두 교황> 등의 작품에서 호연을 펼치며 지난 2003년에는 헐리우드 명예의 전당에까지 헌액된 바 있다.

원작자이자 감독인 플로리안 젤러마저 자신의 연극을 스크린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안소니 홉킨스 밖에 떠올리지 않았고, 그것이야말로 영화 <더 파더>의 시작점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안소니 홉킨스는 이번 작품에서 하나의 캐릭터 안에서 어린아이에서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한 남자의 일생 모두를 완벽히 연기해 낸다.
 
한편, 안소니 홉킨스의 그런 압도적인 연기를 이끌어 내는 것은 그의 곁에서 함께했던 딸 앤 역의 올리비아 콜맨이다. 전작이었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 : 여왕의 여자> 속 여왕 앤 역을 맡으며 그 해 오스카에서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던 그녀. 역할에 대한 뛰어난 몰입과 놀라운 연기력에 현장의 스태프들은 물론, 안소니 홉킨스마저 후배의 재능에 '정말 뛰어난 배우'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 <더 파더> 스틸컷 영화 <더 파더> 스틸컷

▲ 영화 <더 파더> 스틸컷 영화 <더 파더> 스틸컷 ⓒ 판씨네마(주)


05.
영화 <더 파더>는 분명히, 나이 듦과 인생에 관한 통찰을 담은 묵직하고 힘 있는 서사로 관객들의 울림을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아버지의 이야기로만 국한되지 않고 나약해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자신의 삶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딸의 이야기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데에는 앤의 배역과 함께 이를 연기한 올리비아 콜맨이라는 배우의 연기가 큰 역할을 했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하나 있다. 저녁 식사 직전에 앤과 폴이 자신에 대해 나누고 있는 이야기를 안소니가 우연히 듣게 되는 장면이다. 폴은 치매에 걸린 안소니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 있는 것도, 그 일로 인해 여러 계획이 취소되고 앤의 모든 신경이 그에게로 쏠려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폴은 어쨌든 안소니가 환자라며, 환자는 간병인이 아무리 잘해도 점점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대화가 그쯤 되었을 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소니가 부엌으로 들어온다.
 
안소니가 부엌에 들어온 뒤에도 폴은 그를 위해서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앤에게 강변한다. 그 사실을 앤도 알고 있지만 쉽게 수긍할 수는 없다. 아버지 본인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식사가 끝날 때쯤 안소니는 부엌을 나선다. 그런데, 조금 전 식사를 시작하기 직전에 앤과 폴이 자신에 대해 나누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아마도, 그의 치매가 표현된 방식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부엌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안소니는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고 만다.
 
06.
그동안, 배우 줄리안 무어의 호연이 돋보였던 <스틸 앨리스>나 노인 치매와 함께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투영했던 <조금씩, 천천히 안녕>처럼 알츠하이머나 치매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꾸준하게 제작되어 왔다. 다만, 그 중에서도 이 영화 <더 파더>가 돋보이는 것은 치매를 겪는 환자를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을 통해 그 인물을 직접 경험하게끔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장면이 바로 대표적이다. 플로리안 젤러 감독은 이에 대해 '관객이 미로 속에서 손으로 벽을 더듬어 길을 찾는 기분을 느꼈으면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관객들이 80대의 노인이 되어 치매에 걸린 자신의 처분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딸 부부 내외의 대화를 직접 듣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각 지점마다 주어지는 영화적 표현들로 인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러닝 타임 속에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또 변화하는 상황들 속에서 마치 스스로가 안소니가 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린 듯한 시네마적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영화 <더 파더>에는 수십 년 동안 모든 순간을 물들였던 관계가 갑자기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변하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보여주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모든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자식이 부모의 보호자가 되고, 부모가 자식에게 의존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에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보편적인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 앞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들의 아버지였던 사람. 더 나아가 어머니의 삶까지도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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