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바쁜 엄마를 대신해 날 키워준 건 할머니였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화내기보다는 감싸주는 쪽을 택한 할머니의 사랑은 내 성장의 자양분이었습니다. 내가 결혼해 아이를 낳자 엄마는 이따금씩 아이를 돌봐주면 한없는 사랑을 주고 있습니다. 나의 엄마가 우리 아이에겐 내 기억 속 할머니와 같은 모습이겠지요. 누구에게나 할머니·엄마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할머니·엄마를 떠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전해보는 건 어떨까요.[편집자말]
일찌감치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셨던 탓에 나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유치원 졸업식과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내 손을 잡아준 분도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였고 소풍 날 맛있는 김밥을 싸주신 분도 할머니였다. 당시 철없는 나는 그런 게 당연한 줄 알았고 소풍 날 엄마가 김밥을 싸줬다는 친구를 보며 의아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할머니는 당연히 존재하며 나를 챙겨 주는 분이었다.

조금은 철이 들어 할머니가 나를 위해 큰 희생을 하셨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더 이상 할머니는 우리 집에 계시지 않았다. 나보다 더 어린 사촌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기신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 할머니는 명절에나 한 번씩 뵙는 분이 됐고 내가 군에 입대한 지 이틀째가 되던 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당시 내가 할머니 장례식에 참석하면 특별휴가가 아닌 입대취소가 됐던지라 가족들은 회의 끝에 나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하셨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받기만 하고 마지막 가시는 길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할머니에 대한 나의 마음은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TV 드라마나 다큐, 영화 등에서 할머니 이야기가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우리 할머니가 생각나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나는 시작부터 끝까지 유쾌한 이야기들로 이뤄진 판타지 가족 코미디 <수상한 그녀>를 보면서도 주책맞게 한바탕 눈물을 쏟고 말았다.
 
 2014년에 개봉한 <수상한 그녀>는 <겨울왕국>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음에도 전국 86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다.

2014년에 개봉한 <수상한 그녀>는 <겨울왕국>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음에도 전국 86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다. ⓒ CJ엔터테인먼트

 
8개국에서 리메이크된 가족 판타지 코미디

개봉 당시 <수상한 그녀>(2014년 1월 22일)는 크게 주목 받는 영화가 아니었다. 일주일 먼저 개봉한 디즈니의 <겨울왕국>이 'Let It Go' 열풍을 일으키며 극장가를 선점하고 있었고 30일부터 시작되는 설 연휴 특수를 노려 박보영, 이종석 주연의 <피 끓는 청춘>과 황정민, 한혜진 주연의 <남자가 사랑할 때>가 차례로 개봉했다. 그에 비해 심은경, 나문희 주연의 <수상한 그녀>는 캐스팅부터 약하게 느껴진 게 사실이었다.

<수상한 그녀>는 욕쟁이 칠순 할머니가 '청춘사진관'에서 영정사진을 찍고 나오니 꽃처녀로 변신한다는 설정부터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수상한 그녀>는 설날 연휴 가족 관객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겨울왕국>의 아성을 무너트리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전국 860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2014년 상반기 극장가의 대이변이었다.

<수상한 그녀>에서는 두 가지의 러브라인이 나온다. 먼저 반지하밴드의 보컬이 된 오두리(심은경 분)가 잘생긴 방송국PD 한승우(이진욱 분)와 벌이는 풋풋한 멜로가 있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오말순 여사(나문희 분)를 짝사랑하던 박씨(박인환 분)의 애틋한 사랑이 등장한다. 영화를 끝까지 보면 박씨의 일편단심이 가져온 유쾌한 결말을 볼 수 있다(극장 안을 여성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으로 채웠던 바로 그 장면이다).

<수상한 그녀>는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무난한 명절용 코미디 영화라는 평가 속에 심은경의 연기는 관객들에게 이구동성으로 호평을 받았다. 심은경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70대 노인의 말투와 행동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특히 영화 속에 수록된 OST <나성에 가면>과 <하얀 나비>, <빗물> 등 과거의 명곡들을 직접 부르며 뛰어난 노래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심은경은 <수상한 그녀>로 2014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사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비단 한국 사람에게만 애틋한 게 아니다. 이 때문일까. <수상한 그녀>는 중국, 베트남,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등 아시아를 중심으로 8개 나라에서 리메이크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내가 니 할매다>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던 베트남에서는 세계적으로 20억 달러의 흥행수익을 기록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를 능가하는 흥행수익을 올렸고 2016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상영됐다.

젊어진 몸으로 손자와 추억 만든 오말순 여사
 
 오말순 여사는 젊어진 몸으로 손자인 지하와 밴드 활동을 하며 즐거운 추억들을 만든다.

오말순 여사는 젊어진 몸으로 손자인 지하와 밴드 활동을 하며 즐거운 추억들을 만든다. ⓒ CJ 엔터테인먼트

 
<수상한 그녀>에는 나문희가 연기한 오말순 여사를 중심으로 3대가 등장한다. 오말순 여사가 애지중지 키워 국립대학에서 노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대성한 아들 반현철(성동일 분)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손녀·손자 반하나(김슬기 분)와 반지하(진영 분)다. 내가 <수상한 그녀>라는 영화가 유난히 애틋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젊어진 할머니와 손자의 이야기가 영화에서 꽤 중요하게 다뤄졌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운영하는 공원 카페에서 오두리의 노래를 들은 반지하는 설득 끝에 두리를 반지하 밴드의 새로운 보컬로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 원하던 보컬을 영입한 반지하밴드는 성공적인 버스킹 공연 이후 음악방송 출연의 기회를 얻고 첫 무대에서 오두리의 풍부한 감성과 뛰어난 실력 덕분에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다. 하지만 반지하밴드의 리더 지하는 모든 밴드의 꿈인 락페스티벌 무대를 앞두고 트럭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다.

사고 당시 피를 많이 흘린 지하는 수혈이 필요했는데 하필이면 지하의 혈액형은 희귀한 RH-AB형이었다. 손자인 지하와 혈액형이 같았던 두리는 자신이 수혈을 하겠다고 나섰고 어머니의 인생을 살라던 아들의 만류에도 수혈을 강행한다(피를 뽑으면 다시 노인으로 돌아간다는 설정이 있다). 수술실에서 손자를 위해 피를 뽑으며 했던 오말순 여사의 독백 "좋은 꿈을 꿨네. 참말로 재미나고 좋은 꿈이었구먼"은 <수상한 그녀> 최고의 명대사로 꼽힌다.

오두리와 반지하처럼 할머니와의 극적 에피소드가 없는 나는 의외의 장면에서 우리 할머니가 떠올라 괜히 눈시울을 붉혔다. 두리는 자신과 한 PD의 사이를 오해하며 화를 내는 지하를 참교육(?)하고 잔뜩 위축된 지하에게 닭백숙을 먹인다. 할머니와 백숙은 영화 <집으로>에서도 할머니와 손자가 가까워지는 중요한 연결고리로 쓰였는데, 나 역시 그 장면을 보면서 어린 시절 할머니가 해주신 백숙을 맛있게 먹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영화 <수상한 그녀>를 통해 오말순 여사의 젊은 시절은 실컷 봤지만 정작 나는 우리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할머니가 7남매를 홀로 키우셨으니 오말순 여사 이상으로 고생하셨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어릴 적 나는 왜 할머니에게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지 못했을까. 세상에서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분의 빛나던 시절 이야기를 전혀 모른다는 것은 꽤나 서글픈 일이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10년 넘게 함께 살았지만 할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10년 넘게 함께 살았지만 할머니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전혀 알지 못한다.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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