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랜드> 메인포스터 영화 <랜드> 메인포스터

▲ 영화 <랜드> 메인포스터 영화 <랜드> 메인포스터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든 여자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다고 한다. 여자에게 타인이란, 그저 자신이 어떤 과거로부터 빨리 회복되기만을 바라는 존재다. 본인은 아직 웅덩이 속에 침잠해 있는데, 그 기억 속에서 빠져나올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데, 그녀를 지켜보는 이들은 하루 빨리 꺼내려고만 하는 것 같다. 그럴수록 여자는 훨씬 더 깊은 곳으로 자신을 숨기고자 하고, 결국에는 와이오밍주에 있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이전에 머물던 노인이 세상을 떠나고 1년이 넘게 한번도 손을 댄 적 없는 낡고 허름한 산장에서 세상과 단절하고 홀로 살아가려는 이디(로빈 라이트 분). 자신을 찾는 동생의 전화가 걸려오자 핸드폰까지 마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그녀는 자신이 산장까지 운전해 온 트레일러까지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세상에 이골이 나 있다. 처음의 의기양양하던 모습과 달리 이런 생활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도시 여자라는 것이 문제라면 큰 문제랄까. 숲 속 저 멀리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 소리와 밀렵꾼들의 총소리에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은 물론이고, 요령 없는 톱질에 도끼질은 훨씬 더 어설프기만 하다.
 
영화 <랜드> 촬영장면 영화 <랜드> 촬영장면

▲ 영화 <랜드> 촬영장면 영화 <랜드> 촬영장면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02.
배우 로빈 라이트의 첫 장편 영화 연출작이자 출연작인 <랜드>는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힘들어진 이디가 깊은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기 위해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영화다. 이미 몇 편의 단편 영화와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10개 에피소드를 연출한 경험이 있는 그녀는 자신이 연출한 첫 장편 영화에서 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는 일에 도전했다. 정서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고립된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관객들이 감정적 동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첫 장편 연출작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이디 역할을 감독인 로빈 라이트가 직접 연기한다는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 <머니볼>, <모스트 원티드 맨>, 그리고 최근의 <원더우먼>까지 꽤 오랫동안 연기를 이어온 매력 있는 배우지만, 첫 장편 연출작임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결정. 로빈 라이트 역시 처음에는 감독으로만 작품에 참여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한 달 내로 작품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타이트한 일정에 스케줄 문제까지 겹치자 하는 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결과부터 이야기 하자면, 그만큼 더 완숙하고 편안한 느낌의 영화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03.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다른 영화들이나 재난 영화와 달리, 이 작품에서 주인공 이디는 꽤 빨리 위기에 처한다. 가족과 관련된 물건이나 기억이 남은 장소들로부터 멀리 도망쳐 온 그녀이지만 산 속에서도 삶을 이어나가는 장면 장면마다 성인 남성과 남자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것이다. – 영화의 초반부에서 이 두 남자에 대한 설명은 거의 나오지 않지만, 직감적으로 두 남자가 남편과 아이임을 알 수 있다. – 동생을 향해 자신은 왜 혼자 살아남게 되었냐고 울부짖던 그녀의 회상 장면은 두 사람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괴로워하는 이디의 모습과 더불어 가족에게 과거에 분명히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과거의 일로 심리적으로 괴로운 것과 별개로 생존은 그녀가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다. 산장에 들어오면서 통조림 같이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비상 식량을 준비해 오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홀로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나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들을 시도해 보지만 무엇 하나 쉽지 않다. 내리치는 천둥번개와 비바람, 쏟아지는 폭설과 그로 인한 추위는 그녀를 점점 지치게 만든다. 여기에 산을 떠돌던 불곰까지 그녀의 산장에 나타나 그나마 조금씩 정리해 두었던 보금자리와 비상 식량을 모두 박살내 버리고 만다. 무엇이든 해서 살아남는 일이 가장 위급한 상황이다.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인상적인 부분은, 생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을 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남편과 아들의 모습이 잠시 잊혀졌다는 것이다.

04.
극한의 추위와 배고픔 속에 쓰러진 이디가 죽어가는 동안 그녀가 머물던 산장으로 두 남녀가 찾아온다. 사냥을 하러 산 속으로 들어갈 때는 피어 오르던 연기가 산을 빠져나올 때는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찾아온 미겔(데미안 비쉬어 분)과 알라와(사라 던 플레지 분)다. 지금 금방 죽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이디의 몸 상태에 두 사람, 특히 미겔은 극진한 정성을 다한다. 혼자 깊은 산 속 이 산장까지 들어온 이유가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사람에 의해서 목숨을 구하게 된 이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왜 자신을 돌봐 주느냐는 말에 미겔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지나는 길에 있었으니까."

다만 그런 몸상태로도 병원에 가길 거부하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이디가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궁금할 법도 하다. 어떤 연유로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이유로 죽기 직전의 상황에까지 놓이게 되었는지 말이다. 어쩌면 이 지점이 사람과 만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던 이디가 미겔과 알라와 두 사람을 그나마 가까이 하게 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 이전에 그녀가 보였던 행동들이 삶에 큰 미련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태도에 그녀는 단지,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명확한 답은 될 수 없지만,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어떤 변화가 시작된 것 같다.
 
영화 <랜드> 스틸컷 영화 <랜드> 스틸컷

▲ 영화 <랜드> 스틸컷 영화 <랜드> 스틸컷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05.
영화의 중반부에서는 평소 사냥을 즐기는 미겔로부터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배우기 시작하는 이디의 모습이 그려진다. 처음에 이 산 속에 들어온 이유가 단순히 문화로부터 스스로 단절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살아가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지점이 중요한 것은 이다의 시점이 과거에서 현재로, 또 현재에서 미래로 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야기 했듯이 이디의 가족에게는 과거 어떤 사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그로 인한 주변의 시선과 시쳇말들이 그녀를 괴롭혀왔다. 사람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현재를 잘 살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함이 아니라, 과거에서 벗어나고 현재를 피하기 위한 의미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시점이 변화하면서 그녀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배워나가는 것은 현재를 가꿔 나가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이 된다. 그것만이 이 곳에서의 생존을 약속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영화 <랜드>가 이디의 모습을 투영하는 방식이 성장보다는 적응에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06.
그녀가 미겔로부터 살아남는 법을 배워나가는 동안에는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던 두 사람, 남편과 아들의 잔상이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사건으로 미겔과 처음 다투고 난 뒤에 숨겨두었던 작은 상자 속 가족 사진을 꺼낼 때 까지다. 그제서야 이디는 모아두었던 사진을 산장의 벽 한 쪽에 붙이기 시작하는데, 그녀의 적응 메커니즘은 여기에서도 이어진다. 앞서의 적응이 육체적인 생존에 있어 필요한 자연적 요인에 대한 것이라면, 이 지점에서의 생존은 정신적인 생존, 즉 경험적 요인에 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역시, 미겔과의 교류가 큰 역할을 한다.

"이렇게 뜸했던 적이 없었는데…"

미겔 역시 이디와 유사한 경험을 과거에 한 적이 있었던 인물이다. 아내와 딸이 8년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그녀에게 먼저 털어놓는데, 이 때도 이디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내 밝히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이디의 표정과 눈길을 꼭 봤으면 좋겠다. 그녀의 행동을 통해 이디 또한 미겔과 유사한 경험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그는, 결과적으로 이디의 환경적 요인과 경험적 요인 모두, 아니, 그녀가 세상에 다시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디 또한, 자신도 모르게 미겔이란 사람에게 점점 인간적으로 의지하게 되어갔고, 결국에는 사람들을 피해서 산으로 들어왔다던 처음의 말과 달리 어느새 남자를 기다리게 되는 처지가 되고 만다.

07.
이후의 결말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을 것 같다. 영화의 모두라고 할 수 있는 커다란 스포일러가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영화 <랜드>의 연출이 정직하고 고전적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영화 내내 숨겨왔던 그녀의 이야기를 마지막에서야 터뜨리는 방식도 그렇다. 89분, 요즘으로 치면 꽤 짧은 분량의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이지 않나.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변주없이 스트레이트하게 풀어나가는 방식이 오히려 더 좋았던 것 같다. 조금씩 변화해 나가는 미겔의 모습을 담아내기에도 말이다.

"나는 당신 덕에 살고 싶어졌어요."

그녀의 마지막 말이다. 모두를 떠나고 싶어했던, 세상의 남은 모든 것을 등지고 싶어했던 그녀의 말이 이런 모습이어서 다행이다.
영화 랜드 로빈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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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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