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같이 사는 사람이 주말농장을 경영한 적이 있다. 농장을 만들고 제일 먼저 심은 몇몇 식물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미나리'였다. 구덩이에 물을 가두어 미나리꽝(미나리를 심은 논)을 만들었다. 그렇게 심은 미나리는 날이 쓸쓸해질 때까지 끊이지 않고 공급된 우리집 먹거리였다. 

왜 하필 물만 주면 지천으로 피어나는 '미나리'였을까? 영화 <미나리>에서 배우 윤여정이 분한 순자는 하고많은 '식물' 중에 왜 미나리를 가져갔을까. 115분의 러닝타임이 끝날 무렵 깨달았다. '물'과의 전쟁을 벌이는 아칸소 농장에서 그저 물가에 던져놓기만 해도 쑥쑥 자라는 미나리만큼 제이콥(스티븐 연 분)네 가족이 꿈꾸는 이상향을 잘 그린 식물이 또 있을까.

영화는 정이삭 감독의 어린 분신 같은 데이빗(앨런 김 분)의 시선에서 진행된다. '제이콥'네 이야기라지만 정작 강인하게 아칸소에 뿌리를 내리는 미나리처럼 여겨지는 건 모니카, 순자, 앤이 보여주는 여성 3대다. 아칸소 개울에 던져진 미나리 씨앗처럼 본의 아니게 아칸소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그리고 그곳에서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사는 강인한 그녀들의 모습에서 고달픈 여성사를 목도하게 된다. 
 
 미나리

미나리 ⓒ 판씨네마


모니카, 엄마의 자리 

한복을 입고 얼굴을 붉히며 '사랑해 당신을'을 부르던 시절의 모니카(한예리 분)는 순자의 말대로 '사랑' 없으면 죽고 못살 것 같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아칸소까지 남편을 따라 온 모니카에게는 그 시절이 꿈결 같다. 

캘리포니아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일했던 남편이 '새로운 꿈'을 찾기 위해 둥지를 튼 '아칸소 농장'엔 모니카가 꿈꾸는 삶은 없었다. 아니 이제 모니카에게는 꿈꾸는 게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병아리 똥구멍만 보며 평생을 살 수 없다며 남편은 황무지 같은 아칸소 농장을 사들였다. 아직 엄마 손이 필요한 두 아이들, 심지어 작은 아이는 심장에 이상이 있어 늘 모니카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아이들을 번듯하게 교육시킬 수 있는 환경, 건강이 불안한 작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병원으로 달려갈 수 있는 환경이었으면 좋겠다는 기본적인 모니카의 소망은 아이들에게 뭐라도 해내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남편의 '꿈' 앞에 무색해진다. 

<미나리>는 종종 모니카의 얼굴을, 모니카의 시선을 클로즈업한다. 아칸소의 농장을 바라보며 '황망'해하던 그녀의 시선은 바퀴가 달린 트레일러 집으로, 무리해 농장 일을 벌이는 남편으로 이어진다. 그런 모니카의 모습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아칸소 농장에 던져진 미나리 씨앗이 겹쳐 보인다. 
 
 미나리

미나리 ⓒ 판씨네마

 
남편의 말처럼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만 해도 그들은 미지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일구어 보자며 의기투합했다. 그로부터 10년, 남편은 아이들 앞에 번듯한 아버지가 되겠다며 꿈을 좇아왔는데 정작 모니카는 그 남편이 들여다보기 싫다는 병아리 똥구멍 보는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일을 벌이는 남편을 믿을 수 없어 자신이 '가족'을 책임지겠다고 한다. 그걸 위해서 이제 기꺼이 아칸소를 떠날 결심까지 한다.  

물론 영화는 '해체' 직전의 가족을 더 극적인 사건으로 '봉합'한다. 위기의 순간 가족은 다시 하나가 되지만, 아마도 그 이후로도 모니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순자, 할머니의 자리 

정작 10년을 벌어 자신의 친가를 도운 제이콥이지만 아칸소에 와서는 모니카의 어머니 순자에게 도와달라 손을 내밀었다. 모니카가 외동딸이라지만 순자는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될 때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그 여성이 자신을 도와달라는 딸의 한 마디에 이역만리 아칸소로 온다. 

궁색하다는 딸의 겸연쩍은 한 마디에 순자는 쿨하게 바퀴 달린 집이 신기하다고 대꾸한다. 한국 냄새가 난다면서 자신을 밀어내는 손주 침대 옆자리에서 궁색하게 잠을 청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딸이 직장을 나간 사이 '집'을 지킨다. 

<미나리>는 철없는 손자 데이빗과 할머니 순자의 해프닝으로 채워진다. 그 속에서 다 늙어서도 엄마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순자'의 속내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저 할머니를 골탕먹이려 오줌을 먹이는 손주의 지독한 장난도 괜찮다는 쿨한 할머니가 있을 뿐이다. 

자신의 몸 하나도 건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딸네 집에 보탬이 되고 싶었던 '엄마' 덕분에 또 다른 엄마 모니카는 버텨낼 수 있었다. 
 
 미나리

미나리 ⓒ 판씨네마

 
그리고 엄마 모니카를 버티게 해 준 또 한 명은 그녀의 딸 앤(노엘 조 분)이다. 한참 또래 아이들과 뛰어놀 때의 아이는 든든한 누이가 되어 병약한 동생을 지켜낸다. 

영화는 제이콥 가족의 아칸소 정착기이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불모지에 터전을 잡으려는 무모한 제이콥과 병약한 데이빗이라는 두 남자의 불안한 삶의 빈틈을 메워주는 세 여성의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순자가 가져온 미나리 씨앗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칸소'에 던져진다. 그들의 삶은 주체적인 것이 아니었다(아니 그들이 '가족'을 선택했다는 의미에서는 '주체적'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강인하게 버텨낸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제이콥과 데이빗의 '생존'을 위한 '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들의 자기희생적 기반 위에서 '가족'은 자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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