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통령'이자 1990년대 가요계 최고의 음악천재로 꼽히는 서태지의 최종학력은 중졸이다. 서태지는 중학생 시절 친구들과 스쿨밴드를 결성할 때부터 음악이라는 확실한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학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고교 진학 후 본격적으로 음악에 정진하기 위해 과감하게 자퇴를 선택했던 그에 대해 세월이 흐른 후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반면에 학벌이 높은 뮤지션들도 적지 않다. 서울대 사회학과 선후배 사이인 이적과 장기하, 서울대 응용화학부를 나와 스위스 로잔 연방 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후 제주도에서 감귤농사를 짓고 있는 루시드 폴, 프랑스에서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며 5개 국어에 능한 스텔라 장 등이 대표적이다(서울대 작곡과를 나와 안테나 뮤직의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희열은 그나마 전공을 살린 편이다).

1988년 대학가요제에 서울대와 연세대,서강대 등 명문대생들로 구성된 밴드 무한궤도가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대상을 타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무한궤도가 첫 정규앨범을 발표할 때 팀에 합류한 키보디스트와 객원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던 멤버, 그리고 키보디스트의 친구였던 베이스 주자가 뭉쳐 1990년 새로운 팀을 결성했다. 독창적인 음악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룹 공일오비가 그 주인공이다.

무한궤도를 계승한 3명의 엘리트 음악인들
 
 객원가수 제도를 도입한 공일오비는 윤종신,이장우,김돈규 등 많은 신인가수들을 배출했다.

객원가수 제도를 도입한 공일오비는 윤종신,이장우,김돈규 등 많은 신인가수들을 배출했다. ⓒ 다날 엔터테인먼트

 
대구에서 공부 잘하는 형제로 유명했던 정기원과 정석원은 각각 서울대 신문학과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기타에 흥미가 있었던 형은 갤럭시라는 교내밴드에서 기타리스트 겸 보컬로 활동했고 방에서 혼자 피아노 치면서 작곡하는 것을 좋아했던 동생은 당시 모든 대학생들의 꿈이었던 대학가요제를 준비했다. 하지만 동생은 번번이 강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에서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고 신해철과 정석원은 가요제를 통해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는데 대학가요제 대상 후 무한궤도 앨범을 준비하던 신해철이 정석원에게 영입제안을 했고 그렇게 정석원은 무한궤도의 새 멤버가 됐다. 하지만 무한궤도는 단 한 장의 앨범을 남긴 채 '전설의 밴드'로 사라졌고 정석원은 광고회사에 다니던 친형 장호일(엘범 발표를 회사에 숨기기 위해 가명으로 데뷔)과 무한궤도의 베이시스트 고 조형곤을 영입해 공일오비를 결성했다.

다른 팀들과 다른 공일오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객원가수제도'의 도입이었다. 팀에 있는 보컬의 목소리에 맞는 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만든 후 그 노래에 맞는 목소리를 찾는 신선한 방식이었다. 공일오비는 1집 앨범을 통해 윤종신과 최기식, 남성교회 어린이 성가대 등을 객원가수로 초빙했다. 솔로 앨범을 내고 활동하고 있던 신해철 역시 공일오비 1집에 객원가수로 참여해 두 곡을 불렀다.

공일오비는 1991년에 발표한 2집 타이틀곡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국내에서 최초로 슬로우 랩을 시도했다. 홍서범과 박남정, 신해철 등에 의해 국내에서 랩을 시도한 가수들은 종종 있었지만 공일오비처럼 느린 템포에 내레이션과 랩의 중간 느낌을 주는 슬로우 랩을 구사했던 가수는 없었다. 공일오비의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10년 후 브라운 아이즈가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두 번째 이야기'로 리메이크했다.

과감하게 2집의 1번트랙을 차지하고 있던 '4210301'은 놀랍게도 국가기관(환경부)의 전화번호를 노래제목으로 삼았다. 환경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왔던 공일오비가 환경 문제를 다룬 첫 번째 노래였다. 당시 살벌한 군부독재 시절이었음에도 사랑노래로 그럴듯하게 위장(?)한 가사 덕분에 사전심의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대신 노래에 영어가사가 많다는 황당한 이유로 한 동안 금지곡이 됐던 전력이 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점점 이름이 알려지던 공일오비는 1992년에 발표한 3집 < The Third Wave >(제3의 물결)를 통해 밀리언셀러(100만장 판매)를 기록하며 일약 인기가수로 도약했다. 특히 윤종신의 대원외고 동창인 김태우가 부른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젊은 세대의 연애풍토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가사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적 녹색인생'과 '먼지 낀 세상엔', 환경콘서트 <내일은 늦으리> 참여를 통해 환경 문제에 대한 비판도 이어갔다.

공일오비는 그들의 의도와는 별개로 신선한 가사와 음악으로 90년대 초반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뮤지션으로 자리 잡았다. 공일오비가 4집 앨범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대중들은 또 어떤 새로운 음악을 들고 나올지 기대했다. 하지만 공일오비는 '새로운 음악을 해야 한다'라는 전혀 새롭지 않은 생각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공일오비 4집 < The Fourth Movement >(제4악장)가 1993년 8월 세상에 선을 보였다.

'복고'로 반전 일으키며 연속 밀리언셀러
 
 새로운 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뒤집은 공일오비 4집은 3집에 이어 10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새로운 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뒤집은 공일오비 4집은 3집에 이어 10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 다날엔터테인먼트

 
1993년 여름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와 신승훈의 '널 사랑하니까', 김수희의 '애모', 부활의 '사랑할수록' 같은 역대급 명곡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던 해다. 여기에 노이즈, 잼, 듀스, EOS 등 서태지와 아이들의 기세에 눌려 미처 데뷔하지 못했던 신인들도 차례로 데뷔하면서 경쟁이 매우 심했다. 하지만 음악으로 승부하는 공일오비에게 앨범 발매 시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일오비가 4집에서 추구한 음악은 바로 '복고'였다. 타이틀곡 '신 인류의 사랑'은 7~80년대를 연상케 하는 복고적인 사운드에 공일오비 음악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건반 소리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파격적인 구성의 곡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공일오비 객원가수 최고의 비주얼로 꼽히는 김돈규가 적극적으로 TV 활동을 하면서 <가요톱텐> 골든컵까지 수상했다(물론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정석원은 TV 무대에 거의 출연하지 않았다).

4집 객원가수 김돈규와 2집부터 객원가수로 참여하고 있는 이장우는 친구 사인데 두 사람은 4집에서 '어디선가 나의 노랠 듣고 있을 너에게'(이장우)와 '세월의 흔적 다 버리고'(김돈규)를 부르며 맞대결(?)을 벌였다. 윤종신으로 대표되는 생활밀착형 찌질 가사는 사실 정석원이 '원조맛집'이라 할 수 있는데 이장우와 김돈규는 두 발라드 곡을 통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공일오비의 찌질한 감성을 표현했다.

3집의 '현대여성'을 통해 일부 여성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비판했던 정석원은 4집에서 '그의 비밀'과 '남자들이란 다'를 통해 남자들의 비겁함을 꼬집었다. '그의 비밀'에서는 3집 '적 녹색인생'에서 수준급의 저음을 선보였던 정연욱이 객원가수로 나서 매력적인 목소리를 들려줬다. 참고로 정연욱은 업타운으로 활동했던 정연준의 친동생으로 1996년 솔로앨범을 발표해 윤종신이 가사를 쓴 '동창회에서'로 활동했다.

3집까지 환경문제를 다뤘던 공일오비는 4집에서 '제4부'를 통해 황색언론에 대한 비판에 나섰다. 해당 노래는 언론을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 이은 '제4의 권력기관'이라고 비꼬며 '약속을 어긴 무책임 뒤엔 차가운 비웃음뿐'이라는 가사로 가짜뉴스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공일오비 4집은 3집에 이어 2연속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고 공일오비를 서태지와 아이들, 넥스트와 함께 젊은이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그룹으로 만들었다.

다양한 음악적 실험으로 90년대를 풍미
 
 공일오비는 가끔 있는 TV 활동도 그나마 매체에 익숙한 장호일이 도맡아 출연한다.

공일오비는 가끔 있는 TV 활동도 그나마 매체에 익숙한 장호일이 도맡아 출연한다. ⓒ KBS 화면 캡처

 
4집 이후 베이시스트 조형곤이 유학을 위해 팀을 탈퇴하면서 형제 그룹이 된 공일오비는 1994년에 발표한 5집 앨범에서 리메이크곡 '슬픈 인연', '단발머리'를 전면에 내세우며 또 다른 실험에 도전했다. 특히 '단발머리'는 장호일이 프로듀싱했던 신인드룹 솔리드의 이준이 랩, 김조한이 비트박스, 정재윤이 음악 전반에 걸쳐 참여하는 등 후배들과의 협업이 돋보인 곡이다(물론 솔리드 1집은 대중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5집까지는 그나마 대중의 기호를 따라가던 공일오비는 1996년에 발표한 6집에서 인더스트리얼, 헤비메탈, 테크노, 일렉트로니카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실험하며 대중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신했다. 이 결과 공일오비 6집은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 중 가장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했지만 높은 완성도로 평론가들과 마니아들에게 가장 극찬을 받는 앨범이 됐다. 공일오비는 6집 앨범을 끝으로 잠정 해체됐다.

공일오비 해체 후 캐나다로 유학을 간 정석원은 2001년 귀국 후 신인가수 이가희의 앨범을 프로듀싱했지만 대중적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듬 해 프로듀싱을 맡은 박정현 4집이 대중성과 완성도라는 2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90년대 음악천재' 정석원의 건재를 알렸다. 박정현과 윤종신,이승환 등의 앨범에 참여하며 작곡가로 활동하던 정석원은 2006년 해체된 지 10년 만에 공일오비라는 이름으로 컴백했다.

공일오비 7집 앨범에는 당시 신예였던 래퍼 버벌진트와 홍대여신 요조, 케이준, 신보경 등을 비롯해 박정현, 다이나믹듀오, 클레지콰이의 호란, 유희열 등 화려한 객원가수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어느덧 40대를 바라보는 아재가 된 공일오비의 새 음악은 완성도에 비해 젊은 대중들에게는 큰 관심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공일오비는 2010년대에도 꾸준히 싱글앨범을 발표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공일오비의 리더 정석원은 생전에 음악적 견해차이 때문에 고 신해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일오비 5집 <바보들의 세상>이 신해철을 향한 디스곡이라는 소문이 있었을 정도. 하지만 정석원은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호일, 그리고 무한궤도 멤버들과 신해철의 빈소를 찾았다. 그리고 2015년 윤종신의 신해철 추모 싱글 <고백>의 편곡 및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수익금 전액을 신해철의 유족에게 기부했다.

장호일은 뮤지션이나 기타리스트보다는 <서세원쇼>나 <불타는 청춘>에 출연하는 예능인의 이미지가 강하고 정석원은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결격사유인 '병역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4집까지 활동했던 조형곤은 작년 7월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공일오비가 90년대 젊은이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신선한 음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그룹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지금까지 <응답하라 1990년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새로운 연재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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