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랑에 관한 논의에서 특별히 이성애와 동성애를 구분하여 설명하지 않는 듯하다. 또한 이성애가 정상이고 동성애가 비정상이란 재래의 시각이 현실에서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공론의 장에선 사라진 듯하다. 특히 영화에서는 '퀴어영화'라는 분류가 유효한지 의문이 들 정도로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에 차별적인 시선이 없어졌다. 혹은 없어지고 있다. 그냥 사랑, 또는 로맨스 영화로 뭉뚱그려도 무방하지 싶다.

2015년에 이어 2021년에 국내에 재개봉한 영화 <캐롤>도 마찬가지다. 다른 수식어 없이 로맨스영화라고 소개해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비차별'이 일관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시선에선, 또 관객과 공유하는 기본적 정서에선 차별이 느껴지지 않지만, 영화 내에서는 차별이 작동한다. 그것은 이 영화가 미국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1921~1995)의 소설 <소금의 값>(The Price of Saltㆍ1952)을 원작으로 했기 때문일 수 있다.

사랑은 질병이다

하이스미스의 데뷔작 <낯선 승객>은 1950년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에 의해 곧바로 <열차 안의 낯선 자들>(1951)이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영어 원제는 'Strangers on a Train'으로 소설과 영화가 같다. 1955년에 발표한 <재능있는 리플리>는 '리플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여러 차례 영화화하거나 영화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나중에 제목이 <캐롤>로 바뀌는 <소금의 값> 또한 1950년대에 발표한 소설이다. 생활고에 시달려 백화점 장난감 가게에서 일하던 중 한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된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 원작소설과 영화가 다루는 시대가 2차 세계대전 직후의 1950년대이고 실화에 바탕하였다는 사실이 영화 속의 보기에 따라 공공연한 '차별'의 근거가 된다. 두 여성의 사랑을 솔직하게 그려냄으로써 당대의 통념을 깬 작품이란 평가 자체가 원작소설의 태생적 한계를 명확하게 지적한 셈이다. 그 한계는, 한계의 극복이란 형태로 영화로 그대에 옮아온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원작을 재해석해 1950년대 시대적 분위기를 영화에 고스란히 담아내며 "다른 사회적 배경과 다른 연령대의 두 여성 간 감정을 통해 예기치 못한 사랑의 단면을 그리고 싶었다"고 언급한 데서도 사랑을 바라보는 다른, 혹은 불편한 관점이 영화에 불가피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예고한다.

이 불편한 관점은 극중 대화에서 첨예하게 표출된다. 시부모가 주인공 캐롤(케이트 블란쳇)에게 "요즘 의사의 진료를 잘 받고 있느냐"고 묻자, 캐롤이 "의사가 아니라 심리치료사"라고 강하게 반박한다.

'심리치료사'로 언급한 영어는 'psychotherapist'로 엄격하게는 단어에 '치료'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진료이든 심리치료이든 식탁에서 이들이 직접 호명하지 않으며 거론한 주제는 캐롤의 동성애 성향이었고, 캐롤 외의 사람들은 그것을 의사가 개입해서 고쳐야 하는 '질병'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사랑은 질병이 된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라 물리적인 현상의 사실적인 설명이다.

캐롤은 이러한 당대와 당대인의 통념에 맞춰 자신의 성적 취향을 '조정'하려고 하면서도 치료의 대상(질병)으로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럼에도 일종의 타협으로 심리치료를 받는 데서 캐롤이 처한 폭력적 상황과 자아의 분열, 그리고 어떻게든 타개하여 현실에 적응하고자 하는 간절한 노력이 그려진다.

타자에 의해 자신이 부인되는 상황에 직면하여 캐롤은 그러한 자기파괴를 받아들이면서도 자기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모순된 감정과 대처를 보인다. <캐롤>은 확실히 사랑영화이지만, 전적으로 사랑영화라고 하기는 힘들다. 그 이유는, 캐롤과 테레즈(루니 마라) 사이의 사랑이 영화의 주요한 흐름이면서 동시에 캐롤이 사랑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장벽을 넘어서는 모습이 결코 작지 않은 비중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 제목은 '테레즈'가 아니라 '캐롤'이어야 했다.

 
 영화 <캐롤> 스틸 이미지.

영화 <캐롤> 스틸 이미지. ⓒ CGV아트하우스

 
불륜이 아니라 사랑

불륜이 사랑이냐 아니냐는 물음은 무의미하다. 불륜은 일부일처제란 제도적 강제와 통념에서 벗어난 애정관계를 지칭하며, 미시적으로는 사인(私人) 간의 약속 위반을 뜻한다. 따라서 불륜은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 동성애 또한 그렇다.

동성애는 질병이기 때문에 병을 고치면 되지, 그것이 일부일처제의 근간을 흔들 제도적 위협은 아니라고 판단하였기에 그들이 '관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캐롤은 병이 든 것이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게 그들의 인식이다. 남성의 혼외정사는 문제삼지 않는 가부장제는 주로 여성의 혼외정사를 단죄하는데, 영화 <캐롤>에서 보듯 1950년대 미국에서 여성 사이의 정사를 정사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단죄가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캐롤에게는 예일대 출신 의사의 값비싼 치료가 제공된다. 병든 여인을 버리지 않고 가정으로 되돌리는 자애로운 치유의 풍경이다.

사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논리적 적합성을 갖는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현재에 이르는 아주 짧은 기간에 존속하고 있는 일부일처제라는 제도는 부계 혈통이 검증되는 '번식'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포유류인 인간에게 임신과 출산을 통해서 모계가 언제나 자동으로 확증되기에 부계 번식의 확보는 일부일처제와 '불륜'의 배제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번식이 개입하지 않은 사랑인 동성애는 애초에 일부일처제의 관심사가 아닐 수 있다. '관대'할 수 있는 이유인 셈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제도에 국한하고 개인의 감정에서는 전혀 다른 파문을 일으키곤 한다.

극중 캐롤이 진정한 사랑을 발견했음에도 잠시 가정으로 돌아간 이유는 아이 때문이었고 캐롤의 시가에서 그를 받아 준 주요한 이유 또한 아이 때문이었겠지만, 캐롤은 자신을 속이고 사는 것이 스스로에게나 딸에게나 좋지 않다고 자각하고 마침내 가정을 떠나 독립한다. 그러곤 테레즈를 찾아가 사랑을 회복한다. 가부장제 질서를 뒤흔드는, 공인받지 못한 여러 사랑의 경로에서 동성애는 상황에 따라 더 쉬운 탈출구를 찾아낼 수 있는데 영화 <캐롤>이 그 사례에 해당한다. 이러한 예외 상황이, 일부일처제·가부장제와 다른 제도적 억압이 결부되어 함께 작동하는 동성애에 대한 전면적 혐오를 무화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모든 걸 내던질 수 있는 사랑"을 표방한 영화 <캐롤>의 백미가 마지막 장면이라는 데에 대체로 의견이 모이는 듯하다. 확신과 불안의 교차를 감당하며 우아함으로 기다림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드디어 기대한 기다림이 실현되었을 때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케이트 블란쳇이란 배우의 연기가 빛을 발한 순간이다. 27일 개봉.
 
덧붙이는 글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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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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