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을 연출한 이인의 감독.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을 연출한 이인의 감독. ⓒ 시네마달

 
모든 영화엔 시작과 끝이 있다. 등장인물이 다양한 방식으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펼친다. 그렇게 창작자가 구성한 세계에서 관객은 저마다의 감동을 안고 돌아가곤 한다. 이런 흐름에서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조금 독특해 보인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있음에도 오히려 영화의 말미 등장인물은 그제야 기지개를 켜고 자신들과 주변을 향해 발을 내디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시작에 대한 이야기'라고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세 청년이 주인공이다. 독립 다큐멘터리스트 민규(은해성), 피겨 스케이팅 선수 출신의 유학파 한나(오하늬), 해외 입양아로 프랑스에서 자란 뒤 친부모를 찾으러 한국을 찾은 주희(이서윤)이 만나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관계에 대해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영화는 그리고 있다.

이들이 만나는 계기는 다큐멘터리 때문이다. 실향민 할머니와 사는 한나, 입양 경험이 있는 주희는 민규의 카메라에 담기거나 그 바깥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사이사이엔 콜트 콜텍 기타 노동자의 투쟁이 담겨 있다.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주요한 사건이고, 동시에 현재진행형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의 힘

극영화에 다큐멘터리가 중심 소재인 방식인데, 다름 아닌 이인의 감독이 쌓아온 경험이 녹아 있다. 올해로 18년 차 영화인인 그가 우연히 경험했던 독립 다큐멘터리 현장과 사람들, 거기서 깨달은 것들의 종합판이 이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2002년 생계형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 이후, 어떤 회의감들이 몰아치던 때였다.

"상업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다큐멘터리 현장을 접했고, 이 이야기를 구상하게 됐다. 당시 콜트 콜텍 노동자 분들의 다큐를 찍던 감독님과 친해서 도와드리러 갔다가 그 세상을 알게 된 거지. 그전까지 투쟁과 노동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난 뮤지션인 이장혁을 주인공으로 한 <이장혁과 나>라는 다큐를 찍고 있던 때였다. 그러다가 (콜트 콜텍 노동자인) 인근이 형, 재춘이 형 등을 알게 됐다. 신세계였다."

그가 신세계라 표현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지금까지 영화를 놓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상업영화 제작사에 소속돼 시나리오를 쓰다 좀처럼 개봉 기회를 얻지 못했던 그는 다큐멘터리를 몸으로 겪으며 "치유를 많이 받았다"며 "힘든 순간이 지금도 이어지곤 할 때도 현장에서 단둘이라도 연대하는 모습, 해결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투쟁하는 그분들 모습에 영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인지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엔 유독 감독의 실제 경험이 곳곳에 녹아 있다. 주인공 중 하나인 민규는 이인의 감독 일부를 반영한 것이며, 영화 제목 또한 실제로 실향민 관련 다큐를 만들 때 감독이 한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의 한 장면.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의 한 장면. ⓒ ini film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의 한 장면.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의 한 장면. ⓒ ini film

 
"저의 30대 초반은 일종의 슬럼프였다. 극영화로 말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다고 느끼던 때였다. 영화사에 소속되면 작가를 소모시켜 버리곤 하거든. 좋은 작가가 되려면 인터뷰도 하고, 자료조사도 하고 현실을 잘 겪어야 하는데 다큐를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 그 이후론 픽션 작업할 때도 다큐 찍듯이 접근하곤 했다. 외국 영화학교에선 실제로 극영화에서도 그런 식으로 가르친다고 하더라.

콜트 콜텍 다큐를 촬영지원 이후 이것저것 중단편 다큐를 많이 했다. 남북 이산가족 실향민 아카이빙 작업을 6개월 정도 하며 전국을 돌아다닐 때인데 영화에 등장하는 앵두 할머니의 모델이 된 분을 만났다. 이산가족이 되기 전 북에서 남편분과 사실 때 밤에 같이 한글을 공부하던 기억을 말씀해주셨는데 그게 제 기억에 오래 맴돌았다. 사람의 관계도 단계가 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전쟁 때문에 가장 좋은 시절에 관계가 가나다라는 시작점에서 멈춘 거 아닌가 생각했다. 영화 속 민규와 한나도 일종의 썸을 타잖나. 세대는 다르지만 모두 관계의 시작점에 있다는 의미다."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극영화 감독

부당 해고 노동자, 실향민과 입양아 이야기 등. 하나같이 무거운 소재다. 한 가지만 다뤄도 녹록지 않을 텐데 이인의 감독은 한 영화 안에 그것도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정성 있게 담아냈다. 실제로 다큐 현장을 뛰며 배우고 느낀 것, 그리고 영화 출연에 흔쾌히 응한 배우들의 힘으로 보인다.

"보통은 전부 무거운 소재라 그중 하나를 택하기 마련이잖나. 세 이슈 모두 제가 다큐로 참여했던 적이 있고, 실제로 결과물은 진지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근데 이걸 픽션으로 푼다면 최대한 무게를 덜어내 편하게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민규와 한나의 관계를 설정해 영화가 너무 보기 힘들지 않게 한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사실 2008년 홍대 클럽인 빵에서 이어지던 수요문화제에서 얻은 거다. 일종의 문화투쟁인데 공연 중간에 멘트를 넣어 무슨 토크쇼를 하듯 진행하더라. 기존 투쟁은 뉴스에선 좀 부정적이고 폭력적으로 소비해오지 않았나. 실제로 투쟁에서 현장 대치는 뉴스에 잠깐 나오는 사실일 뿐이다. 대부분의 투쟁은 지루한 기다림의 연속이거든. 

주인공을 청년으로 잡은 것도 실제로 제가 만난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들을 떠올려서였다. 서로 제작비가 없으니 사무실을 공유하며 품앗이를 했거든. 한 분이 작품 찍으면 다같이 가서 도와주곤 한다. 작업이 없을 땐 사회인 야구 촬영이나 결혼식 촬영 아르바이트 등을 한다. 사실 민규와 한나 이야기도 당시 저와 제 여자친구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사회에 나오긴 했지만 아직 자릴 못 잡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수입이 안 되는 그런 고민들이 많던 때였다."


세 배우에 대해서도 감독은 감사의 말과 함께 특별한 인연을 전했다. 오랫동안 작품으로 함께 해 온 배우 장준휘가 캐스팅 디렉터 역할을 맡았고, 그의 추천으로 은해성과 오하늬를 캐스팅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연기 경험이 전무했지만 입양인 감성을 잘 전달함과 동시에 프랑스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이서윤 배우 또한 함께 하게 됐는데 이 세 사람이 알고 보니 이미 서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는 게 감독의 설명이었다. "서로 캐스팅 된 걸 배우들이 나중에 알고 깜짝 놀랐다"며 이인의 감독은 말을 이었다.

"해외입양의 절반 이상이 미국이고 나머지가 프랑스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쪽이다. 우리 작품은 프랑스로 입양간 친구를 모티브로 해서 캐스팅을 진행하는데 촬영 두 달을 앞두고도 안 구해졌다. 몇 백 명 오디션을 봤을 거다. 미국 입양으로 시나리오를 바꿔야 하나 고민하는 시점에 오하늬 배우가 아는 동생이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 온 모델이 있다며 추천해줬다. 근데 연기 경험이 전혀 없대서 거절했지. 

정말 급해졌던 순간에 영화 <그리다>를 같이 한 박재영 감독이 자기 아내의 사촌 동생이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 왔다고 해서 무조건 보겠다고 했다. 형부 부탁으로 억지로 나오셨더라. 근데 그분과 너무 하고 싶어서 우리가 엄청 설득했다. 배우로 활동할 생각이 전혀 없는 분이었는데 영화 속 주희 감정을 잘 이해하겠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하게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하늬 배우가 원래 소개해주려 했던 바로 그 배우였다."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이서윤-오하늬-은해성, 성장하는 청춘들 이서윤, 오하늬, 은해성 배우가 19일 오전 열린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시사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은 차가운 현실 속, 세 청춘이 만나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청춘 성장 드라마다. 기자간담회는 코로나19 확산 방지 지침 및 권고에 따라 상영관 스크린을 통해 송출되며 진행됐다. 28일 개봉.

▲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이서윤-오하늬-은해성, 성장하는 청춘들 이서윤, 오하늬, 은해성 배우가 19일 오전 열린 영화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 시사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관계의 가나다에 있는 우리는>은 차가운 현실 속, 세 청춘이 만나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청춘 성장 드라마다. 기자간담회는 코로나19 확산 방지 지침 및 권고에 따라 상영관 스크린을 통해 송출되며 진행됐다. 28일 개봉. ⓒ 시네마 달

 
"해외입양 문제 친생부모의 노력 필요해"

캐스팅 과정에서 영화화되기까지 영화는 말 그대로 지난한 과정을 겪었다. 2014년에 완성된 시나리오는 정부 산하 제작지원, 투자제안에서 번번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이인의 감독은 "박근혜 정권 때였는데 콜트 콜텍 이슈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며 "정권이 바뀌자마자 지원을 받게 돼 만들게 됐다. 만 6년을 기다린 셈"이라고 설명했다.

"제가 생각보다 나이고 좀 있고, 영화한 지도 20년 가까이 돼가는데 요즘 보면 새삼 영화감독이 된 기분이다. 물론 작업은 계속 해왔지만, 상대적으로 관객분들을 만날 기회는 적었거든. 극장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게 제겐 처음이라 요즘은 행복하다." 

인터뷰 말미 이인의 감독은 해외입양 문제에 대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이번 영화론 다 못 담아낸 입양 문제의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이 영화를 만든 목적 중 하나기도 하다. 해외입양인들이 친생부모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근데 호적 자체가 잘못된 경우가 많아서 만남이 성사되는 경우가 많진 않다. 1970년대에 미국 입양법이 바뀌어서 부모가 있는 경우 입양이 안 됐다. 한국입장에선 빨리 아이를 보내야 하니까 보육원 등에서 부모가 있음에도 호적을 바꿔 고아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나이와 이름도 원장들이 마음대로 바꾸기도 했다.

이처럼 호적이 잘못돼서 못 찾는 경우가 많다. 매년 1500명에서 3000명 가까이 해외입양인들이 부모를 찾아 한국에 오는데 찾는 비율이 4%도 안 된다. 현재는 아동권리보장원이라는 국가기관에서 입양 관련 일을 처리하고 있다. 해외입양인들이 여기에 DNA를 등록하는데 문제는 친부모가 DNA를 등록 안 하면 아무 소용 없다는 점이다. 일종의 죄책감 때문에 등록을 못하시는 건데 1970, 80년대 해외입양은 엄밀히 말하면 국가가 주도한 거였다. 누구나 입양 보낼 수 있게 해놓고 그 뒷감당은 이제 와서 부모가 하는 현실이다.

해외입양인 분들이 할 일은 다 한 거고, 이젠 한국에 있는 친생 부모님이 노력하셔야 한다. 기관에 전화하시고 DNA 등록하시면 된다. 친생 부모의 잘못이 전혀 아닌데 사회적 편견이 남아있어서 소극적인 것 같다. 비밀보장이 된다. 전화 한 통이면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니 꼭 부탁드린다. 이런 문제에 대해 김대중 정권 때 딱 한 번 사과한 이후 제도적으로 아직까지 바뀐 게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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