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가짜다. 영화 속에서 인류가 멸망하고 지구가 박살나도 문제될 것 하나 없다. 엔딩크레디트가 오른 뒤 창문을 열면 거리엔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놀이터엔 아이들 뛰노는 소리, 화단 덤불에선 참새들이 장난치며 짹짹댄다.

마냥 가짜기만 한 건 아니다. 때로는 수많은 가짜가 모여 진짜를 빚기도 한다. 스릴러를 보고 짜릿함을 느끼고 공포물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엇나간 사랑에 절절해지고 감동적인 드라마엔 눈물을 펑펑 쏟는다. 진짜 영화는 사람을 전과 달라지게 만든다. 감정을 움직이고 마음가짐을 달라지게 한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한다. 예술이 가진 힘이다.

문제도 있다. 나아지는 때도 있지만 못해지는 때도 있다. 때로는 세작처럼 조용히 스며들어 맑은 정신을 방해하는 영화가 있다. 기분을 망치고 나쁜 생각이 떠오르며 중요한 걸 가볍게 여기게 된다. 피곤하고 불쾌한 감정을 일으키는 이런 영화는 의식하지 못하는 새 사람을 전보다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정의를 세운다는 주인공들이 제3세계 어느 나라를 찾아 총격전을 벌이는 영화가 수두룩하다. 개중엔 차를 훔쳐 타고 물건을 부수고 심지어는 사람을 여럿 쏘아 죽여도 문제되지 않는다. 가난을 소비하고 일상을 무시하며 제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깔아뭉개길 서슴지 않는다.
 
조작된 가난, 만들어진 편견

김윤진이 출연해 잘 알려진 미국드라마 <로스트> 시리즈에서 한국이 소비된 방식도 그런 경우다. 시즌2와 3에선 진수(대니얼 대 킴)의 과거가 소개된다. 진수는 가난한 어부가 홀로 키운 아들이다. 진수는 성장해 서울로 가 호텔 벨보이로 취업한다. 선화(김윤진 분)와 만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으니, 대략 1990년대 후반쯤이 되겠다.

황당한 건 이 시절 한국에 대한 묘사가 사실과 전혀 다르단 점에 있다. 진수의 아버지가 사는 남해는 베트남 어느 시골마을처럼 보이는데, 물고기를 잡는 배라는 게 작은 쪽배 수준이다. 집엔 제대로 된 가구조차 없다. 1990년대 한국 어촌의 풍경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상상으로 구현한 가난이 분명하다.

서울 호텔은 더 당혹스럽다. 진수가 취업한 호텔 사장은 면접자리에서 "여긴 최상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최상의 호텔"이라며 "자네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도어맨으로 일하게 된 진수가 일자리를 잃는 과정도 당혹스럽다. 여느 날처럼 호텔 앞을 지키던 진수에게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제 아들 소변이 급하다며 화장실을 쓰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못이긴 진수는 부자가 호텔에 들어가도록 허락하는데, 이 광경을 본 사장이 진수를 질책한다. "길에서 싸든 무슨 상관이느냐"며 "너 같은 놈들 다 그렇지 않느냐"고 호통친다.

얼마나 편견 어린 묘사인가. 만약 배경이 미국이었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설정과 대사가 아닌가 말이다. 미국 어느 호텔도 이 드라마와 같지 않고, 한국 호텔 역시 마찬가지다.

<더 로스트>를 본 사람은 저도 모르게 한국이 가난하고 낙후됐으며 서민을 벌레처럼 대하는 부자가 많은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이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단 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이유다.

태국인이 이 영화를 본다면
 
한국이 피해자이기만 한 건 아니다. 코로나19 국면에서도 435만명이 극장에 들어 올해 흥행 2위에 오른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태국을 왜곡된 시선으로 그렸다. 영화 속 태국은 경찰이 부패하고 시민은 가난에 허덕이며 범죄조직이 득세한 나라다.

대낮에 어린 아이가 납치되고 그를 구하러 갔던 어머니는 참혹하게 살해된다. 경찰은 무능을 넘어 범죄조직에 머리를 조아리는 부패한 조직이다.

영화 속 태국인은 범죄자 아니면 힘없는 서민이다. 범죄조직은 심지어 무능하기까지 하다. 인남(황정민 분)과 레이(이정재 분), 단 둘이서 태국 유명 조직과 경찰을 완전히 박살낸다. 범죄조직원 수십명과 경찰특공대가 이들 둘을 막지 못하고 죽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태국인들은 죄다 비겁하거나 나약하고 탐욕스럽다.

홍원찬 감독과 제작진은 과연 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영화 <월드워Z> 스틸컷

영화 <월드워Z>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2300만명 이빨을 죄다 뽑아버린 나라

연말을 맞아 <월드워Z>를 보다가 대사 한 줄에 한참을 멈추었다. 전 세계적인 좀비 출몰로 원인을 찾던 미군이 평택기지에 주목한다. 평택 미군기지에서 '좀비'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연락이 끊긴 평택기지로 UN조사관 제리 레인(브래드 피트 분)이 급파되는 이유다.

평택 기지엔 소수 미군이 남아 좀비와 맞서고 있다. 기지 감옥엔 북한에 무기를 몰래 팔다 붙잡힌 전직 CIA요원이 갇혀 있다. 그가 제리에게 북한에선 좀비가 출몰하지 않은 이유를 말한다. "북한은 2300만명 국민들 이를 다 뽑아버렸다"며 "북한이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2300만명의 모든 치아를 뽑아버리는 일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그 일이 바로 북한에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 같은 내용은 개봉 당시 탈북자 사이에서 논란이 됐지만 탈북자 사회를 넘어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남한이 아닌 북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국에서 관객 524만명을 모았다. 브래드 피트 영화 가운데 최고 기록이다. 세계적으로도 좀비영화 중 최고 흥행기록을 쌓아올렸다. 지금까지도 꾸준히 재관람 행렬이 이어진다. 그 안에서 북한은 주민 2300만명 치아를 죄다 뽑아버리는 막돼먹은 국가로 박제됐다.
 
 영화 <월드워Z> 스틸컷

영화 <월드워Z>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불순한 의도"엔 "불편하다"고 답하자

전 세계가 좀비에 초토화되는 와중에 일부 국가만이 방역에 성공한다. 자유주의 세계에선 이스라엘이 거의 유일한 좀비 청정국이다.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에 철저히 대비하게 됐다는 교훈이 인상적으로 다뤄진다.

그 이스라엘에 위기를 불러오는 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도적 차원에서 장벽을 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이들은 마이크를 틀고 노래를 불러 좀비가 장벽 너머로 침투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 연출에 불순한 의도가 없었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순진한 사람이다.

혹자는 영화란 어차피 거짓이고, 이 정도는 허용된 창작의 자유라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 나라, 한 문화, 한 민족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면 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과연 <월드워Z> 제작진은 그런 노력을 기울였는가.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비난받고 깔아뭉개진 이들의 명예는 어디서 어떻게 만회될 수 있을까.

북한이 자국민 2300만명의 이를 죄다 뽑아버렸다는 내용의 영화가 대단한 흥행을 했음에도 비판적 논의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무례한 이들에 대항하여 최소한의 자존심과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 민감해져야 한다.
 
 영화 <월드워Z> 포스터

영화 <월드워Z>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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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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