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벌써 12월 말이라니...'라는 말이 무심결에 튀어 나오는 요즘입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신음한 2020년이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위로를 받았던 순간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외출이 어려운 상황이라 영화나 드라마, 노래 등 대중문화들이 많은 힘을 줬을 듯한데요. '2020 날 위로한 단 하나의 OO'에선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 순간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쇼미더머니 시즌9>의 한 장면

<쇼미더머니 시즌9>의 한 장면 ⓒ 엠넷

 
조마조마했다. 내가 좋아하는 방송 프로그램들이 제작을 중단할까 봐 코로나로 인해 내 인생이 '노잼'이 될까 봐 가슴이 타들어갔다.

나는 방송을 통해 많은 자극을 받고 힐링을 하는 유형이다. 감동적인 드라마, 무대, 사연들... 그 안에서 인생의 즐거움과 의미를  찾는다. 어떤 정신과 의사의 조언보다 드라마 속 대사에 위로를 받고, 찡한 방송 사연을 보며 인생 맛을 느끼며, 치열한 경연대회를 보며 도전과 열정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일상은 멈춰도 방송은 멈춰지지 않길... 최대한 안전을 기하며 아무 사고 없이 촬영이 진행되어 주길... 나의 정신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방송제작팀을 위해 나는 빌고 또 빌었다(보고 있나? 방송 관계자).

특히 <쇼미더머니>의 시즌9이 진행될 것이냐 말 것이냐는 나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오염된 일상에 피톤치드를 뿌려주는 힐링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쇼미'의 첫방이 확정되자, 나는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트로트 열풍에 밀려 예전만큼 화려한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그 서막이 올랐다. 쇼미 관계자여, 방구석 1열에서 맥주에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대며 응원에 열을 올리는 의리파 열혈 시청자가 있다는 걸 절대 잊지 마시길...

이번 시즌 유독 나를 쇼미에 빠지게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내 11살 아들이다. 쇼미더머니 시즌 초반에는 젖병 물고 겉싸개에 둘둘 말려 쿨쿨 잠만 자던 녀석이 이젠 나와 같이 관람을 하며 랩에 대해 인생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들과 나눈 꽤나 특별한 경험
 
 <쇼미더머니 시즌9>의 한 장면

<쇼미더머니 시즌9>의 한 장면 ⓒ 엠넷

 
나를 잡아먹을 듯한 초4병 질환자의 눈빛이 공감과 소통의 눈빛으로 바뀌는 그 놀라움! 꽤나 특별한 경험이었다. 같은 음악에 대한 다른 해석, 각자 응원하는 래퍼에 대한 의견, 천재성과 노력성에 대한 고찰, 아쉬운 대로 초4 아들과 진지하게 담론을 나누었다. 코로나로 멀어진 마음의 거리를 좁혀준 쇼미, 만세, 만세, 만만세! 였다.

이번 쇼미는 순한 맛이었다. 사실 나는 독하고 매운맛을 더 좋아하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순한 맛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물론 쇼미의 관전 포인트는 출연자의 피 튀기는 경쟁, 물불 가리지 않는 우승 본능, 헉! 할 만한 디스전!인데... 이번 출연 래퍼들은 다들 생긴 것도 순딩 순딩해선 가사도 어쩜 그렇게 건실한지... 욕설과 자극적인 내용이 나오면 시청을 고려하려 했으나 이번 시즌은 아들과 함께 보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올해는 지원자들의 실력차가 컸다. 스윙스의 출전이 반칙이니 아니니 하는 설전은 이번 회차의 (아들과 나 사이에) 가장 큰 이슈였다. 하지만 그 외엔 엎치락뒤치락하는 결과 없이 우승길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그중 내 동공을 번쩍 뜨이게 한 래퍼가 있었으니~그의 이름은 원슈타인. 나는 매회 그의 랩에 푹 빠져 허우적 댔다. 나의 덕질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파면 팔수록 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노숙을 하는 한이 있어도 음악을 해야겠다는 다부진 결심을 하고 힙합판에 뛰어들었다고 하는 그의 패기! 뽀글 머리에 능수능란한 무대매너, 티 없이 맑은 눈빛을 하고 랩을 내뱉는 그는 마치 사냥따윈 관심 없는 세렝게티의 한 마리 사자 같았다.

특히 그의 감성 어린 음악은 딱딱하게 굳은 내 마음을 스르르 녹여주었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의 랩 가사는 촌스러운 시골 처자인 내가 서울에 갓 상경해서 느꼈던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적외선 카메라'라는 곡은 사랑에 눈이 멀었던 오래전의 나를 만나게 했으며 칠린호미, 릴보이와 함께한 'Freak'은 집안일을 하다가도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흥얼거리는 '작업 권장 송'이 되었다.  

그의 옛날 음원을 찾아 듣고 인스타 라이브를 시청하며 무한 하트를 날렸다. 그 순간만큼은 코로나고, 육아고, 일이고, 다 잊게 해주는 유일한 기쁨이었다. 심신이 너덜 해진 아줌마의 맘에 생기를 불러일으킨 원슈타인. 비록 최종 파이널에 오르진 못했지만 영원히 내 맘 속 원픽이었다.

쇼미를 보면 인생이 만져지는 것 같다
 
 <쇼미더머니> 시즌9에 출연한 원슈타인의 모습.

<쇼미더머니> 시즌9에 출연한 원슈타인의 모습. ⓒ Mnet

 
아들은 릴보이와 스카이 민혁을 응원했는데,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스타일과 가치관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때때로 원슈타인의 패배 원인을 분석해 내 복장을 뒤집어 놓기도 했는데... 아들이라도 내 스타에 대해 험담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밤 11시 파이널 생방 시청 금지를 내세워 나의 스타를 지켜냈다. 아들은 파이널 무대에서 손수 #0011을 눌러 투표하는 성의까지 보였고 결국 아들의 한 표가 더해진 릴보이의 우승으로 <쇼미더머니>는 막을 내렸다.

쇼미를 보면 인생이 만져지는 것 같다. 매 순간 선택당해야 하는 삶,  노력이 재능 앞에 무너지는 삶, 구닥다리 인생도 뒤집기 한 판을 꿈꿔볼 수 있는 삶, 하지만 이변은 없는 삶...  축축하고 미끄덩대는 삶의 표면을 헤집고 들어가면 꿈과 희망 같은 게 닿을락 말락 할 때도 있다. 나는 그 경계에서 희망에 더 가까이 닿을 수 있도록 젊은 래퍼들의 꿈을 절대적으로 응원한다.  

시즌 9까지 오는 동안 나도 쇼미도 함께 늙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이 나쁜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더 많은 삶의 노하우와 인생 서사가 담겨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이제 내년 <쇼미더머니> 시즌10을 기다린다. 그땐 부디 코로나가 뿌리 뽑히고, 공연장에서 꽥꽥 소리를 지르며 스웩 넘치는 그들이 무대를 직관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는 바다.  

기다릴 게 없는 금요일 밤, 허전해질 일만 남은 내가 푸념처럼 말했다.

"이제 무슨 재미로 살지?"

아들이 답했다.

"엄마, 고등 래퍼가 남았잖아!"
"!!!"


나의 힙합 테라피는 계속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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