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25일, 포탄이 빗발치는 흥남부두에서 한 척의 배가 필사적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60인승 미국 화물선인 그 배에는 정원의 200배가 훨씬 넘는 14000명의 피난민이 타고 있었다. 이들의 항해는 훗날 '가장 작은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오른다. 역사의 회오리를 온몸으로 맞으며 치열하게 살아낸 메러디스 빅토리호 사람들, 이들을 추적해 한 편의 방송으로 만드는 기획안은 올해 '한국 콘텐츠 진흥원 방송 제작 지원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 1년여에 걸쳐 방송 제작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를 싣고자 한다.[편집자말]
국가보훈처는 매월 '이달의 6.25 전쟁영웅'을 선정한다. 그리고 올해 12월 '이달의 6.25 전쟁영웅'으로 '레너드 라루'가 선정됐다. 한국인도, 군인도 아닌 평범한 화물선 선장이었던 그가 한국전쟁이 70주년을 맞이한 올해 12월,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레너드 라루 선장은 1950년 12월, 1만4천 명의 피난민을 싣고 흥남부두를 탈출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이 항해는 선장 '레너드 라루'의 결단이 없었다면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자 작가인 빌 길버트가 20년 전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를 인터뷰해서 쓴 내용을 보면 당시 그의 결단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적의 항해를 이끈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 '레너드 라루'

기적의 항해를 이끈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 '레너드 라루' ⓒ 로버트 러니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부두에 닿자 미 10군단 소속 존 차일스 대령은 배에 오른 뒤 레너드 라루 선장을 불러 "우리가 당신에게 피난민들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신이 자원해서 태워 줄 수는 있다. 그러니 상급 사관들과 상의하여 결정해 주기를 바란다"며 피난민 수송을 부탁했다.
 
로버트 러니는 당시 인터뷰를 통해 "레너드 라루 선장은 좌나 우로 머리를 돌린다거나 누구와 상의하는 일 없이 즉석에서 대답을 했다. '태울 수 있는 한 많이 태우고 가겠다'라고 말이다"라고 회상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무어 맥코멕 회사 소속 화물선으로 군 해양 수송부와 용역 계약을 맺은 정원 60명의 선박이었다. 그리고 배에는 이미 48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무엇보다 화물 대신 피난민을 배에 태우기 위해서는 회사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전시 상황이라 모든 것이 선장 레너드 라루의 결단에 달려 있었다.
 
그때 레너드 라루 선장의 나이는 36세,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의 나이는 22세였다. 배에 타고 있던 선원 대다수가 20대였다. 레너드 라루 선장은 대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에게 명령했다. 

"태울 수 있는 한 많이 태우고 만 명을 넘으면 내게 보고 하시오."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
 
 1950년 12월 22일,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르는 피난민들

1950년 12월 22일,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르는 피난민들 ⓒ 로버트 러니

 
그때부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피난민을 태우기 시작했다. 화물선 본연의 임무를 버리고 화물칸에 사람을 싣기 시작한 것이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한 <항해일지>에 보면 당시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
 
1950년 12월 22일
 
21:30분 승선개시, 화물 발판 사용, 제 5 선창으로 승선
23:15분 평 갑판 사용, 2,3선창 피난민 승선
 
1950년 12월 23일
 
00:00 갑판의 승강구 모두 열어 피난민 승선
03:30 2와 5 선창 완료
05:00 4선창 완료
07:00 1선창 완료
11:10 피난민 승선 완료
                                      < 메러디스 빅토리호 항해일지 중 >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가 작성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항해일지

2등 항해사 '로버트 러니'가 작성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항해일지 ⓒ 추미전

   
1950년 12월 22일 밤 9시에 시작한 피난민 승선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더 이상 탈 공간이 없는 듯했으나 사람들은 계속 배에 올랐다. 다음날인 23일 오전 11시에야 비로소 더이상 피난민을 태울 공간이 없다는 판단으로 승강구를 닫았다. 무려 14시간에 걸쳐 1만4천 명의 피난민이 승선한 것이다.  

그러나 피난민을 싣는 작업은 시작에 불과했다. 더 큰 난관은 전쟁의 바다를 헤쳐 남쪽으로 가는 일이었다. 당시 흥남 앞바다에는 많은 기뢰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기뢰 탐지기 하나 없이 바다로 나섰다. 기뢰 한 방에 배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피난민을 태우고 항해를 하기에 빅토리호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그들에게 먹일 식량도 없었고, 난방도 안 되었고, 화장실도 없었다. 무엇보다 승무원들은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고 피난민은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는데, 통역관도 없었다.
 
7600톤급 빅토리호는 크기가 작아 비교적 얕은 바다에서도 운항이 가능하며 속도도 빠른 것이 특징이다. 배는 23일 오전 11시 흥남항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새 달려 24일 낮 12시 30분 오륙도에 도착했다고 항해일지에 기록돼 있다.
 
그러나 미군은 빅토리호의 부산항 입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산은 이미 피난민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배는 하루 동안 부산항에서 대기를 한다. 그동안 피난민들에게 비상식량을 제공하고 통역관을 태운 뒤 12월 25일 다시 거제도로 향한다. 거제도에 도착한 시각은 12월 25일, 성탄절 정오.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사흘의 항해 동안 승선 인원이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5명의 새 생명이 배에서 탄생한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던 승무원들은 이들에게 한국인을 상징하는 '김치'라는 닉네임을 붙였다. 김치 1호, 2호, 3호, 4호, 5호가 메러디스 빅토리호 안에서 태어났다(관련 기사 : "내 이름은 김치 1호"... 70년 전 기적의 배에서 태어나다 http://omn.kr/1r14p).

전쟁 후 모습 감춘 레너드 라루 선장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 로버트 러니

 
전쟁이 끝난 뒤 이 위대한 항해를 이끈 레너드 라루 선장은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사가 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오대양 육대주 바다를 누비던 그는 왜 수도원으로 가 수사가 된 것일까.
  
레너드 라루 선장 곁을 오래 지킨 로버트 러니는 평생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수사가 된 선장이 머물던 수도원을 자주 방문했으며, 그가 마지막 길을 떠날 때도 곁에서 함께 했다고 한다. 
 
올해 94세인 로버트 러니를 직접 만나서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메일을 보냈고 그에게 답장이 왔다.  
 
"이 극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취재진을 만나고 싶다."


그는 자신이 소장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귀한 사진 몇 장도 함께 보내왔다. 로버트 러니는 누구도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부터 메러디스호에 관한 많은 자료를 개인적으로 모아 소장해 왔다. 그 소중한 자료와 이야기를 담기 위해 미국을 가야 하는데 올해 코로나 정국이 발목을 잡아 가지 못했다. 

위험 가득한 전쟁의 바다를 헤쳐 왔던 '위험한 항해'가 1만4000명을 구출한 '위대한 항해'로 기록되기까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극적인 이야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생명조차 담보할 수 없는 무자비한 전장의 한가운데서 피난민들이 배에 탈 수 있도록 뒤에서 치열하게 움직였던 '쉰들러 리스트'들도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저자의 개인 블로그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및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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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송작가 협회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동의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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