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후반 <마지막 승부>의 심은하, <비트>의 고소영, <접속>의 전도연으로 이어지는 20대 여성 배우 3명이 크게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까지 이어질 것 같았던 이 동갑내기 3인의 라이벌 구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전도연이 여러 영화를 통해 승승장구한 반면에 심은하는 2000년 개봉작 <인터뷰>를 끝으로 갑작스런 은퇴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반면 걸그룹에서는 트로이카 구도가 제법 잘 형성되어 왔다. SM엔터테인먼트가 내세운 S.E.S.와 대성기획의 핑클이 '요정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한 가운데 이들과는 다른 매력을 앞세운 또 하나의 팀이 '틈새시장'을 확실하게 공략했기 때문이다. S.E.S.와 핑클에 밀린 '3인자'로 취급되기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랑을 받으며 걸그룹의 첫 번째 전성기에 한 획을 그었던 걸그룹 베이비복스가 그 주인공이다.

2장의 앨범을 발표하는 동안 멤버 4명 탈퇴 
 
 베이비복스는 3집이 돼서야 대중들이 알고 있는 '완전체' 멤버가 구성됐다.

베이비복스는 3집이 돼서야 대중들이 알고 있는 '완전체' 멤버가 구성됐다. ⓒ 뮤직앤뉴

 
지난 1996년, 데이비드 베컴의 부인 빅토리아가 속한 영국의 5인조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가 < Wannabe >라는 곡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국내 기획사 DR뮤직에서는 노래와 춤이 모두 가능한 '한국판 스파이스 걸스'를 기획했다. 그렇게 탄생한 5인조 걸그룹이 바로 베이비복스였다.

히트곡이 탄생한 시기가 늦었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대중들이 베이비복스를 S.E.S 와 핑클의 '후발주자'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걸그룹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을 1997년으로 본다면 그 해 7월에 데뷔 앨범을 발표한 베이비복스야말로 '걸그룹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베이비복스는 채리나가 주축이 된 디바의 1집보다 앨범 발매시기가 한 달 빨랐다).

베이비복스는 1년 먼저 등장한 보이그룹 H.O.T.처럼 사회비판적인 데뷔곡 <남자에게(이 곡의 부제는 '민주주의'였다)>로 활동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베이비복스는 활동곡을 다소 가벼운 느낌의 댄스곡 <머리하는 날>로 바꿨지만 이번에는 메인보컬 차유미의 갑작스런 탈퇴라는 악재를 만났다. 결국 베이비복스는 1집 활동을 통해 '한국의 스파이스 걸스가 되겠다'는 기획의도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 채 1집 활동을 마무리했다.

베이비복스가 1집 활동을 끝내고 재정비의 시간을 갖는 사이 요정 콘셉트의 S.E.S.와 핑클이 데뷔해 가요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베이비복스는 1집에서 추구하던 반항적인 이미지를 지우고 발랄한 소녀로 변신을 시도했다. 김이지와 이희진을 제외한 초기 멤버 3명을 교체한 베이비복스는 고등학생이었던 간미연과 심은진, 그리고 데뷔 멤버로 뽑혔다가 합류가 늦어진 이가이로 팀을 재정비해 1998년 9월 2집 <야야야>로 컴백했다.

베이비복스는 2집 활동임에도 후배그룹 S.E.S.와 핑클의 '아류'란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귀엽고 사랑스런 댄스곡으로 활동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특히 막내 간미연은 이희진과 함께 고음을 맡을 정도의 노래실력을 뽐내며 베이비복스에 남성팬들을 대거 유입시켰다.

베이비복스는 주영훈이 만든 후속곡 < hange >까지 히트시키며 S.E.S.와 핑클의 뒤를 쫓는 걸그룹계의 3인자로 무난히 안착했고 베이비복스 2집은 2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1990년대 후반이 음반 시장의 마지막 중흥기였음을 고려하면 썩 대단한 판매량은 아니었지만 1집의 판매량이 5만 장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반전을 만들었다고 평가하기에 충분한 결과였다.

하지만 베이비복스는 2집 활동을 마무리할 때 즈음 또 하나의 악재를 만났다. 바로 팀의 맏언니 이가이의 '나이조작 사건'이었다. 1968년생 이가이는 무려 10살을 속여 1978년생으로 베이비복스 활동을 했다. 이에 팬들은 크게 실망했고 결국 이가이는 2집 활동을 끝으로 베이비복스에서 탈퇴했다.

베이비복스는 데뷔 후 2장의 앨범을 내는 동안 무려 4명의 멤버를 교체했을 정도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가이 탈퇴 후 소속사에서는 당시 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윤은혜를 영입했다. 

섹시 콘셉트로 고유의 색깔 찾은 3집 앨범

베이비복스는 2집 활동을 통해 1집의 부진을 만회했지만 이는 먼저 인기를 얻은 후배그룹 S.E.S.와 핑클의 이미지를 철저히 벤치마킹한 결과였다. 베이비복스는 자신만의 색깔을 찾지 못하면 어렵게 얻은 인기가 금방 사라질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베이비복스는 3집 앨범을 통해 S.E.S.와 핑클이 할 수 없으면서도 대중들이 좋아할 만한 색깔을 찾았다. 베이비복스가 찾아낸 차별화 전략은 바로 '카리스마'를 겸비한 댄스곡이었다.

베이비복스 역시 2집에서 귀엽고 깜찍한 콘셉트로 활동을 했지만 이미 국민 요정 이미지를 완벽하게 장착한 S.E.S.나 핑클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베이비복스는 상대적으로 이미지 변신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았다. 이에 따라 베이비복스는 1999년 여름 3집 앨범을 발표하며 '슬픈 발라드 전문 작곡가' 김형석이 쓴 강렬한 댄스곡 < Get Up >으로 컴백했다.

2집의 <야야야>를 통해 검증된 '발랄한 댄스곡'을 버린 베이비복스에게 < Get Up >은 큰 모험이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집 활동 당시 귀여운 막내에 머물렀던 간미연은 노래의 시작과 끝을 맡는 베이비복스의 에이스로 등극했고 원년멤버 김이지와 이희진도 걸그룹 3년 차의 원숙한 섹시미를 발산했다. 언니들 사이에서 뭔가 해보기 위해 애써 섹시해 보이기 위해 노력하던 윤은혜의 귀여움도 < Get Up >의 인기에 한 몫 했다.

베이비복스는 후속곡 역시 강한 느낌의 댄스곡 < Killer >로 선택했다(지금은 베이비복스 버전이 훨씬 유명하지만 사실 < Killer >의 원곡자는 <소원>, < Heaven >으로 유명한 남자가수 김현성이다). < Killer >에서 가장 돋보였던 멤버는 단연 사자머리로 파격적인 변신을 했던 심은진이었다. 심은진은 메인보컬이 아님에도 < Killer >에서 당당히 센터 자리를 차지해 후렴구를 불렀고 총을 쏘는 듯한 강렬한 걸크러시 안무는 남녀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 Killer > 활동 당시 군부대에서 베이비복스의 인기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당시 일부 군부대에서는 음악방송에 베이비복스가 나오면 마치 '전투준비태세'라도 발동된 것 마냥 개인정비나 전투체육 따위를 멈추고 모든 부대원이 내무반(지금의 생활관)의 TV 앞으로 집합하는 이른 바 '베복 타임'이 유행했다는 전설이 떠돌곤 했다.

베이비복스 3집의 유일한 발라드 넘버 < Missing you >도 잔잔하게 사랑을 받은 명곡이다. < Missing you >의 뮤직비디오에서 막내 윤은혜는 불치병에 걸린 소년과 우정을 나누는 애절한 연기를 선보이며 청순한 매력을 마음껏 뽐냈다. 당시 팬들은 윤은혜에게 '리틀 성유리'라는 닉네임을 붙여 주기도 했다. 성유리는 당시 남자팬들에게 '청순가련의 대명사'로 꼽히던 가요계 최고의 요정이었다.

베이비복스는 3집의 성공을 통해 S.E.S.와 핑클의 뒤를 쫓는 '3인자'이 아닌 독자적인 매력을 통해 또 다른 팬층을 공략하는 데 성공한 걸그룹으로 거듭났다.

동생그룹 나올 만큼 강렬했던 베이비복스의 힘
 
 베이비복스는 지난 2010년 5명의 멤버가 뭉쳐 특별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베이비복스는 지난 2010년 5명의 멤버가 뭉쳐 특별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 SBS 화면 캡처

 
3집의 성공 이후 중국 시장에 진출한 베이비복스는 4집 < Why >, <배신>, 5집 < Game Over >, <인형>, 5.5집 <우연>, 6집 <나 어떡해>를 차례로 히트시켰다.

베이비복스는 2004년 7집 앨범을 발표한 후 심은진을 시작으로 멤버들이 차례로 팀을 틸퇴하면서 사실상 해체의 길을 걸었다. 베이비복스가 해체된 후에도 소속사에서는 2007년 베이비복스 리브라는 팀을 데뷔시기도 했다. 베이비복스 리브는 선배들만큼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베이비복스의 이름을 딴 동생 걸그룹이 나온 걸 보면 베이비복스라는 브랜드가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베이비복스는 비록 정상의 자리에서 오래 군림하진 못했지만 언제나 무대 위에서 기존의 걸그룹들과는 다른 매력을 뽐내던 팀이었다. 이미 결혼한 멤버(김이지, 간미연)도 있고, 다른 분야에서 대성한 멤버(윤은혜)도 있어 현실적으로 베이비복스의 재결합을 기대하긴 힘들다. 하지만 베이비복스는 작년 12월 간미연의 결혼식에서 완전체가 모여 축사를 맡는 등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멤버 5명이 아름다운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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