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마틴 에덴> 포스터

영화 <마틴 에덴> 포스터 ⓒ 알토미디어


   
표면적으로 <마틴 에덴>은 1950년대 이탈리아 나폴리를 배경으로 선박 노동자인 마틴 에덴이 상류층 집안의 엘레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개인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당시 이탈리아의 사회와 배경으로까지 두루 지경을 넓혀가는 서사가 인상적이다. 

가난한 청년은 문화를 통해 지식을 쌓고 사상을 해방해 성장하지만 파멸한다. 이는 21세기 한국으로 옮겨왔을 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화두다. 높은 교육과 직업적 성공으로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듯해 씁쓸함이 느껴진다. 실질적인 계급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자본으로 줄 세우는 신(新) 계급사회는 출신, 돈, 학벌, 인종 등 이유만 바뀌었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시작, 예고된 계급 갈등

마틴(루카 마리넬리)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여의고 누나와 매형 집에 얹혀살고 있다. 열한 살 때 처음 배를 타기 시작해 선원으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육체노동자, 비숙련공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유를 느꼈고 삶을 배워갔다. 배움이 짧았지만 배 위에서 세상을 익혔다.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고, 땀과 결실의 노동이 있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하루를 잘 마감하면 되는 삶이었다. 글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지만 불편함을 없었다. 부족하지도 풍족하지도 않은 보통의 날. 그런 삶 속에 갑자기 엘레나(제시카 크레시)가 들어왔다.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 알토미디어

 
마틴은 사랑과 학문을 무섭게 탐독했다. 똑똑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하고 싶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하지만 기본 지식과 문법이 확립되지 않아 어긋나는 대화로 서걱거렸다. 다행히 머리가 좋아 남들보다 빨리 지식을 습득해 갔고, 학문을 익히는 도중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알게 되었다. 마틴은 글을 쓰고 싶어졌다. 비로소 꿈이 생긴 것이다. 심연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을 재료 삼아 닥치는 대로 읽고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확신 한다. 작가가 되겠노라고.

흥분한 마틴에게 현실적인 엘레나는 일단 정규 교육부터 마치라 설득한다. 그래야 교제를 허락받고 미래를 공고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제도권은 그를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독학으로 깨우진 지식은 세간의 인정에서 멀어지고 마틴의 첫 번째 좌절은 교육의 문턱부터 시작된다.

마틴은 전 재산을 털어 낡은 타자기를 들여놓는다. 욕심 많은 어부처럼 쉬지 않고 쓰기 시작한다. 잡지 투고를 시작하나 매번 돌아오는 대답은 '반송'이었다. 매체는 세상의 날것을 그대로 보여주길 꺼렸다. 노동자의 삶, 투쟁, 빈부격차 등을 불편한 진실은 보기 좋은 행복으로 포장하길 좋아했다. 문학은 본디 성찰, 반성일진대 눈앞의 것은 보려 하지 않고 눈 감으려 했다. 그럴수록 마틴은 쉬지 않고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쏟아 낸다.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 알토미디어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가난한 자가 일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매진한다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돈은 떨어졌고, 집세를 내지 못해 집을 나와 외곽으로 떠났다. 그러던 중 기차에서 만난 마음씨 좋은 마리아 아줌마와의 인연으로 하숙을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글을 썼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엘레나에게 2년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엘레나의 집안은 처음부터 마틴을 받아 줄 생각조차 없었다. 마틴을 조롱했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반대는 완고했고 오해가 쌓여 엘레나마저 마틴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마틴의 미래는 이대로 불투명해 보였다. 그렇지만 쓰고자 하는 욕구를 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루스(키를로 세치)를 만나 본격적인 사회 문제에 입문한다.

그는 책 속에서 배웠던 부조리를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마틴의 스승이 된다. 탁상공론을 싫어하고 비판적 시선도 환영하는 진보적인 사상가였다. 루스를 통해 마틴은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확립한다. 번민이 커질수록 더욱 깊게 구렁텅이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채찍질했다. 작가의 숙명이 무엇이냐고, 착취와 구속으로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거냐고 말이다.

삶도 용기가 필요하다
     
<마틴 에덴>은 1909년 출간된 '잭 런던'의 자전적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잭 런던은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콜 오브 와일드>의 원작 <야성의 부름> 원작자이기도 하다. 미국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한 배경을 1950년대 이탈리아 나폴리로 옮겨왔다. 사실 50년대라고는 하지만 <트랜짓>처럼 모호한 설정 배경이 16mm 필름 카메라로 찍은 낡은 분위기와 잘 맞물린다.

영화의 전반부는 마틴과 엘레나의 로맨스에 치중하는 듯 보이나. 후반부로 갈수록 계층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좌절과 연민이 발생한다.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 여러 이념이 상충하는 혼돈의 시대를 그린다. 사회적 격변기에 마주한 개인의 성장과 무너짐이 동시에 전해진다. 뼛속까지 프롤레타리아인 청년이 배움으로 부르주아 계급을 탐색하지만 좁힐 수 없는 차이에 괴리감이 커진다.

예술과 사랑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던 개인의 퇴보는 아름다운 남부 이탈리아의 풍경과 대비되며 더욱 극명해진다. 특히 영화 중간중간 삽입되는 세피아, 블루톤의 푸티지 영상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적절히 오간다. 오롯이 마틴의 생애에 빠져들 수 있게 만든 인상적인 연출력이다. 줄거리와 상관없는 듯 보이나 어느새 인물의 상황, 마틴의 습작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오랜 잔상을 남긴다.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 알토미디어

 
결국 작가로 이름을 알렸으나 개인과 세상에 대한 환멸만이 커지게 된다. 프롤레타리아에서 부르주아가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은 변하지 않고 수많은 질문들만 던진다. 자신의 글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상황도 참을 수 없다. 마틴을 줄기차게 따라다닌 고질적인 문제, 바로 삶에 타협하며 살 거냐 거칠게 대항할 거냐가 끊임없이 상충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 또한 왜 사냐고 묻거든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마틴에게 삶을 살아갈 진정한 용기는 사랑에서 피어났고 사랑으로 이어졌으나, 사랑 때문에 꺼졌다. 삶의 지표가 사라진 사람은 망망대해의 가라앉는 배와 같다. 사는데도 용기가 필요함을 마틴을 통해 배웠다. "세상을 위해, 굶어죽는 사람을 위해, 글을 써라"고 말한 루스의 일침이 유독 뼈를 때린다.

한편, 이 작품에선 넷플릭스 영화 <올드 가드>에서 샤를리즈 테론과 불멸의 존재로 활약한 루카 마리넬리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눈빛에서 로버트 드 니로와 알랭 들롱, 제임스 딘이 어렴풋이 보인다. 마치 마틴 에덴이란 인물이 있는 것처럼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한 눈빛과 농밀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고전적인 외모부터 현대적 선까지 두루 갖춘 주목할 만한 배우다. 제6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분에 상영되었으며 당시 <조커>의 호아킨 피닉스를 제치고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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