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방송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

2002년 방송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 ⓒ MBC

 
집에 있는 시간은 길고 글은 안 써지고 이럴 땐 영감이라도 받으려 지나간 드라마를 다시 본다. 뭘 볼까?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발견한 작품은 <네 멋대로 해라>. 이나영과 공효진의 청춘 시절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안구 정화는 기본에 양동근의 초집중해야 알아들을 수 있는 공기 반 소리 반 웅얼웅얼 대사. 그런데도 그의 능글능글 인생 연기에 마음이 무너져 눈물을 쏙 빼게 되는 작품.
 
2002년도 작품인 이 드라마는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드라마에 '폐인'을 만들어낸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에도 두근두근 몰입해서 봤었는데 다시 봐도 '꿀잼'이다. 대체로 로맨틱 코미디는 남주와 여주의 외모가 큰 몫을 차지하는데 이 드라마 남주 양동근은…. (묵비권 행사).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대체 불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드는 마성의 남자다.
 
첫 장면부터 코끝이 시큰해진다. 고복수(양동근)는 어린 시절 아버지(신구) 손에 이끌려 보육원에 들어가고, 곧바로 교도소에서 나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비가 쏟아지고 아버지는 복수의 손에 만 원짜리 몇 개와 우산을 쥐여 주고 일하러 가는데, 신구의 우산은 다 부서진 어린이 우산. 복수의 손에 쥐어진 우산은 태그가 붙어있는 새 우산.
 
가난한 부모의 뒷모습은 얼마나 속절없이 자식의 마음을 무너뜨리는지. 자식을 보육원에 버렸으니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을 거란 예상을 깨고 복수와 아버지는 다른 결을 보여준다. 둘의 '케미'는 극의 중심을 딱 잡아주는데, 특히나 아버지가 싸준 상추쌈을 입에 물고 복수가 대문 앞에서 오열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시대를 앞서간 미래 캐릭터와 대사
 
 2002년 방송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

2002년 방송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 ⓒ MBC


복수는 소매치기다. 경(이나영)의 지갑을 소매치기하다가 돌아보는 경과 눈이 마주치고 자석에 끌리듯 마음이 홀린다. 경은 아직 앨범 한 장 내지 않은 인디밴드 키보디스트에 부잣집 딸이지만, 딴따라 음악을 반대하는 아버지 때문에 후원은커녕 날마다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린다. 복수에게는 이미 연인인 치어리더 미래(공효진)가 있다. 결국 복수를 가운데 둔 경과 미래의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더 반가운 얼굴은 정두홍 무술 감독이다. 드라마 안에서도 무술 감독으로 나오는데 난 이 분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정 감독은 스턴트맨이었던 시절 정우성 주연의 영화 <비트>에서 정우성의 대역이었는데, 사고가 나는 바람에 쇄골이 골절되어 내가 일하는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나는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기에 그분의 둔부에 주사도 놓아주고 극진히(?) 간호했다(혹시 저 기억하시나요? 강남에 있던 그 병원이요. 그때 감독님 생명의 은인이 여기 있답니다! 곧 만나게 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18년 전 드라마이기에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는 면도 있다. 특히 동진(이동건)이 경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그렇다. 하지만 미래(공효진)의 캐릭터와 대사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시대를 앞서갔다. 드라마에 푹 빠져서 내 방에서 연이어 몇 편을 정주행하고 있는데 스무 살 아들이 슬금슬금 들어와 내 옆에 앉아 재밌냐고 물었다. 자고로 드라마는 같이 봐야 더 '꿀맛'. 그간의 줄거리를 신나게 주저리주저리 알려줬다.
 
아들은 어이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보더니 "저렇게 생긴 가난한 소매치기를 저렇게 이쁜 여자 둘이 좋아한다고? 말이 돼? 더구나 한 명은 치어리더고 한 명은 부잣집 딸에다 키보디스트인데?" 나는 불쌍한 복수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왜 말이 안 돼? 생긴 건 저래도 성격이 좋아!" (말하고 보니 궁색한) 애써 설명했는데, 괜히 리듬만 깨진 것이 억울해서 너는 얘가 왜 그렇게 낭만이 없냐, 이게 드라마지 다큐냐고 열을 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은 쓱 나가더니 "라면 먹을 거야?" 한다. 이게 뭐라고 나는 빈정이 상해서 "너나 먹어!" 해버렸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정정당당한 두 여성
 
 2002년 방송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

2002년 방송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 ⓒ MBC


아들이 나가고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닌데 사랑이 그렇게 머리로만 된다면 세상에 나온 명작의 반은 사라질 터. 나는 큰소리로 '로미오와 줄리엣, 호동왕자와 낙랑공주가 왜 그랬을 거 같냐'고 뒤끝 작렬 한마디를 보탰다. 못났다. 쩝…. 갱년긴가?
 
연이어 드라마를 보는데 특이한 점은 미래와 경의 관계이다.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경쟁하는 구도에는 빠짐없이 어떤 계략 같은 것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두 여인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정정당당하다. 경에게 복수를 뺏긴 미래는 "너 같은 나쁜 년들 때문에 나 같은 불쌍한 년이 생기는 거야" 하는데 어찌나 가슴이 아프든지 눈물을 참느라 애썼다. 마음을 진정하고 코를 푸는데 아들의 목소리 "엄마 라면 먹어!" 나는 정지화면 버튼을 누르고 나갔다. 울고 나면 왜 또 그렇게 배가 고픈지.
 
라면은 물으나 마나, 대답하나 마나 먹게 되는 마법의 식품. 한 젓가락 뜨는데 아들이 TV를 켰다. 히든싱어 백지영 편이 재방송 되고 있었는데 하필 히든싱어들이 백지영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듣는 백지영도 히든싱어들도 눈물바다였다. 나는 또 덩달아 폭풍 눈물을 쏟았다. 때마침 큰아들이 외출했다 돌아와서 이 장면을 보고, 제 동생에게 "야! 니가 엄마 울렸어?" 작은아들은 무심하게 라면을 먹으며 "설마." 큰아들은 금세 사태 파악을 하고 텔레비전을 끄면서 "그니까 엄마 밥 먹을 때 TV 켜지마." 하더니 물을 한 컵 따라서 내게 내민다. 이거 냉수 마시고 속 차리라는?
 
부끄러움에 뒷골이 띵했다

유난히 미래의 입에서 명대사가 많이 나온다. 미래가 복수를 믿지 못하고 흔들리는 경에게 하는 말, "너 같은 얘들은 잡생각이 많아서 믿음이라는 게 뭔지 모르지? 그 사람이 날 속여도 끝까지 속아 넘어가면서도, 믿어버리는 거. 그게 믿음이다." 잡생각이 많은 나는 부끄러움에 뒷골이 띵했다. 그렇지, 굳이 속이려 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 믿어주는 것이 믿음이지. 눈만 뜨면 코 베가는 세상에 단 한 사람만 나를 믿어준대도 서러움이 덜 할 텐데.
 
그리고 미래를 떠나는 복수의 대사.

"미래야,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데, 근데 그 사람이 너무나 심장에 깊이 박혀서 그걸 뜯어내면 내가 심장마비로 죽어, 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니가 용서해, 응?"

살자고 하는 짓이라고 다 이해할 순 없겠지만, 복수는 어려서는 보육원에 버려졌고 기껏 사람답게 살아 보려 하는 지금은 뇌종양으로 시한부다. 한 사람에게 이런 불행의 몰빵은 불공정하다. 그러니 그런 복수가 사는 동안 행복했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마음껏 사랑하다가 갔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인지상정. 나는 실연에 가슴 아픈 미래에게 소고기라도 사주며 복수를 좋게? 떠나보내 주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2002년 방송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

2002년 방송된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한 장면 ⓒ MBC

 
또한 동진에게 경은 복수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는데. "성격 좋은 사람은 많이 봤지만, 그게 마음은 아닌 거 같아요. 그 사람의 마음은 나를 울려요. 1분 1초도 안 쉬고 내 마음을 울려요. (중략) 난 최고의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거예요." 좋은 성격이 마음은 아니라니. 얼마나 세밀한 통찰이 담긴 문장인가. 드라마 속 어딘가 맹해 보이는 경은 어색한 연기마저 설정처럼 보이게 하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드라마는 수술실에서 나오는 복수를 보며 미소 짓는 경의 얼굴로 끝이 난다. 역시 로코는(로맨틱 코미디) 해피엔딩이어야 하지! 복수를 죽였다면 작가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텐데 다행히 경의 미소는 복수의 회복을 암시했다. 좋은 드라마는 여운이 길다. 팔딱팔딱 살아 숨 쉬는 청춘들에 애잔하고 애틋한 마음 같은 것이 뭉글뭉글 올라왔다. 그런데 이 마음이, 어쩌면 사랑에 대해 한 번도 치열해 보지 못한 내 청춘에 대한 애잔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때문일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