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삐 걷다 보면 못 보고 지나칠 아까운 것들이 있다. 그럴 때 누군가 옷깃을 잡아 잠시 숨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라고 하는 건 고마운 일이다. 벌써 반년 째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 확산 속에서 스쳐 지나가 버린 좋은 영화 한 편을 소개하려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3월 11일 개봉해 12만 명의 관객을 모은 <다크 워터스>가 바로 그 영화다. <벨벳 골드마인>, <캐롤>의 토드 헤인즈가 연출하고 마크 러팔로와 앤 해서웨이, 팀 로빈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3월 한국 박스오피스 4위에 오르며 기분 좋은 출발을 알렸다. 3월 개봉작 가운데선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하지만 3월 전국적으로 확대된 코로나19 사태가 극장을 개점휴업 상태로 만들었다.

문제는 이 영화가 그렇고 그런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기업이 야기한 환경문제'와 '자본의 논리', '그에 대한 기업의 책임'까지를 두루 다룬 보기 드문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그냥 스쳐 가기엔 아쉬운 영화였기 때문이다.
 
다크 워터스 포스터

▲ 다크 워터스 포스터 ⓒ (주)이수C&E

 

2000년 <에린 브로코비치>와 2020년 <다크 워터스>

흔히 환경과 기업의 책임을 다룬 영화를 꼽을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독보적인 영화가 있다.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에린 브로코비치>다. <다크 워터스>는 <에린 브로코비치>와 마찬가지로 실화이며 글로벌 거대기업에 대항해 싸운 시민사회의 승리의 기록이고,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현재적 문제라는 점에서 그 뒤를 잇는 작품으로 지목되기 충분하다.

<에린 브로코비치>가 개봉한 게 2000년이니 <다크 워터스>는 무려 20년 만에 등장한 '환경파괴 자본에 대한 투쟁' 장르의 적자가 되겠다.

이 영화의 가치는 단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칸영화제 작품상과 아카데미 시상식 주요부문 4관왕에 빛나는 <기생충>을 배출한 한국 영화계에서 '환경파괴 자본에 대한 투쟁' 장르에 속하는 영화를 꼽자면 단 한 편도 대기 어렵다. 그나마 2013년 개봉한 <또 하나의 약속> 정도를 들 수 있겠으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던 작품성을 논외로 치더라도 지레 움츠러들어 삼성을 삼성이라 하지 못하고 가족도 약속이라고 부르는 자발적 홍길동이 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두루 출연한 <에린 브로코비치>와 <다크 워터스>의 가치는 과연 한국 영화계에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지를 의심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어 보인다.
 
다크 워터스 20여년 간 듀폰의 유독물질 무단방류를 추적한 변호사 롭 빌럿 역을 맡은 마크 러팔로. 그는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 다크 워터스 20여년 간 듀폰의 유독물질 무단방류를 추적한 변호사 롭 빌럿 역을 맡은 마크 러팔로. 그는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 (주)이수C&E

 
미국 최대 화학기업이 저지른 범죄를 밝히다

<다크 워터스>는 2016년 뉴욕타임스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된 미국 최대 화학기업 듀폰의 '독성 폐기물 유출사건'을 다뤘다. 변호사 롭 빌럿이 20여 년에 걸쳐 듀폰의 독성물질 PFOA(과불화옥탄산) 방류를 추적하며 3535건의 단체소송을 제기해 2017년까지 미국 법원으로부터 총금액 8000억 원대 배상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와 별개로 미국 환경보호국은 듀폰에 사상 최고액 벌금을 추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PFOA는 듀폰이 1938년 개발한 테플론(polytetrafluoroethylene, PTFE, 상품명 Teflon)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물질이다. 테플론은 테팔로 대표되는 '눌어붙지 않는 후라이팬 코팅', 고어텍스, 콘택트렌즈, 각종 포장재 등에 폭넓게 사용되는데 제조과정에서 생산되는 PFOA가 암을 비롯해 각종 중증 질병을 유발하는 유독물질이라 관리에 상당한 주의가 요구된다.

20여 년에 걸친 투쟁 결과 듀폰이 PFOA를 무단으로 방류하고 이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거짓주장도 서슴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듀폰의 행위로 인한 결과는 참혹했다. 동식물이 집단 폐사했고 마을 주민과 공장 직원들도 중증 질환과 기형아 출산 등으로 고통 받았다.

하지만 듀폰은 무려 40년 간 법정 공방을 벌이며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에린 브로코비치 미국 거대 에너지기업 PG&E 힝클리 지사가 유해물질인 중크롬을 유출해 주민 수백명에게 피해를 발생시킨 사건과 관련된 실화를 다룬 <에린 브로코비치>. 당대 최고 배우인 줄리아 로버츠가 주인공 에린 역을 맡아 열연했다.

▲ 에린 브로코비치 미국 거대 에너지기업 PG&E 힝클리 지사가 유해물질인 중크롬을 유출해 주민 수백명에게 피해를 발생시킨 사건과 관련된 실화를 다룬 <에린 브로코비치>. 당대 최고 배우인 줄리아 로버츠가 주인공 에린 역을 맡아 열연했다. ⓒ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이 영화가 한국의 오늘에 전하는 메시지

이 영화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작지 않다. 초국적 자본이 군림하는 오늘날 한국은 가해자가 되기도, 피해자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산모와 영유아 등 1421명이 사망하고 (확인된 것만) 6000여명에게 폐질환을 일으킨 '가습기살균제' 사태가 대표적이다. 피해자들이 옥시래킷벤키저 등 10개 업체를 검찰에 고발했지만 검찰은 수사하지 않고 기소중지 결정을 내렸다. 유족이 사과를 받기까지 무려 5년이 넘게 걸렸다.

입장을 바꿔 한국이 가해사례인 경우도 있다.

지난 5월 7일 LG화학 인도공장에선 발암물질로 알려진 스타이렌이 800톤가량 누출돼 현재까지 인도주민 15명이 사망하고 1000여 명이 병원 치료를 받았다. 이중엔 6살과 10살 어린 아이부터 의대에 재학 중이던 젊은이까지 포함됐다. 모두가 잠든 새벽 스타이렌 가스가 폭발해 일어난 대참사였다. 인명 희생뿐 아니라 가축이 폐사하고 농작물이 못쓰게 됐으며, 물과 토지도 크게 오염됐다.
 
또 하나의 약속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노동자 백혈병 사망사건을 소재로 한 <또 하나의 약속>. 한국에선 흔치 않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기업에 대한 영화이지만 기업명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논란을 빚었다.

▲ 또 하나의 약속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노동자 백혈병 사망사건을 소재로 한 <또 하나의 약속>. 한국에선 흔치 않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기업에 대한 영화이지만 기업명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논란을 빚었다. ⓒ OAL(올)

 
LG화학 유출사고를 돌아보다

사고 이후 2달 간 인도 당국이 조사해 발표한 보고서에는 '탱크 청소를 지난 5년 동안 하지 않았다', '코로나19로 공장 가동이 중단된 동안에 안전관리를 소홀히 하는 등 LG 측의 총체적 안전부실이 원인'이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LG가 현지에서 사용한 스타이렌 탱크가 사용된 지 50년이 넘어 낡아 있었고 안전담당 직원들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내용도 언급됐다.

이에 대해 이달 초 기자회견을 연 환경운동연합 등 다수 시민단체는 "100% 한국 본사가 투자하고 이익을 가져가는 구조 속에서 발생한 사고"라며 "LG화학 한국본사가 민형사상의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과 듀폰, 옥시와 LG화학의 사례를 들여다 보면 이를 관통하는 문제가 보이는 듯도 하다. 작업환경보고서 공개를 놓고 삼성전자와 소송전을 벌인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LG화학의 탱크 관련 정보를 요구하는 인도 조사단이 우리의 생각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듯이.

<다크 워터스>가 다른 어느 곳보다 2020년 한국에 유효한 메시지를 가진 영화인 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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