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조선 <바람과 구름과 비>는 철종 말기에 킹메이커로 활약하며 고종 임금을 등극시킨 가상의 역술가인 최천중(박시후 분)에 관한 드라마다. 7월 5일 제15회에서 최천중은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 흥선군(전광렬 분)의 아들인 이명복(박상훈 분)이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 한장면.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 한장면. ⓒ TV조선

 
흥선군 입장에서 이 일은 기쁨이자 슬픔이었다. 아들이 왕이 되는 일인 동시에 아들과 헤어지는 일이었다. 이 헤어짐은, 아들은 왕궁으로 가고 자신은 운현궁에 남기 때문에 생기는 그런 헤어짐이 아니었다. 이것은 법적인 연을 끊는 헤어짐이었다.
 
이명복의 왕위 계승 직전에, 조만간 이재황으로 개명될 그의 '호적'을 정리하는 일이 있었다. 그를 살아 있는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에서 죽어 있는 익종 이영(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적하는 일이었다.
 
2016년에 KBS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배우 박보검씨가 연기한 인물이 바로 효명세자다. 스물한 살 때 아들 헌종을 두고 눈을 감은 효명세자는 아들이 왕이 된 뒤 익종으로 추존됐다. 이명복은 바로 이 익종의 아들로 입적된 다음에 임금이 됐다.
 
이 입적을 주도한 인물은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조대비)다.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는 배우 김보연씨가 신정왕후를 연기하고 있다. 세자빈 시절인 1830년에 남편을 잃은 뒤 헌종 때 왕대비가 되고 철종 때 대왕대비가 된 신정왕후는 이명복을 자기 남편의 아들로 만들었다. 음력으로 고종 즉위년 12월 8일자(양력 1864년 1월 16일자) <고종실록>에 신정왕후의 결정 사항이 소개돼 있다.
 
"흥선군의 정실부인이 낳은 둘째아들 명복이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하는 것으로 결정한다."
 

효명세자와 이명복의 공동 조상은 사도세자다. 효명세자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계통이자 사도세자의 3대손이고, 이명복은 사도세자의 또 다른 아들인 은신군 계통이자 사도세자의 4대손이다. 그래서 효명세자와 고종은 7촌간이었다. 이 7촌 관계가 1864년 1월 16일의 입양으로 1촌 관계로 바뀌었던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왕위계승의 제1조건은 '왕의 혈통을 타고났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왕의 혈통 중에서도 '왕의 아들'이라야 더 높은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1864년의 '특수한' 사정

이명복은 왕의 혈통을 타고나기는 했지만, '왕의 아들'은 아니었다. 아버지 흥선군은 왕이 아니라 왕실 종친에 불과했다. '왕의 아들'이 아니면 '왕의 손자'라도 돼야 했지만, 그마저도 아니었다. 고종의 할아버지 남연군 역시 왕실 종친에 지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고종은 '왕의 증손자'도 아니었다. 증조부인 은신군 역시 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왕의 고손자도 아니었다. 1864년 이때까지만 해도 고조부인 사도세자는 왕으로 추존되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된 것은 조선 멸망 11년 전인 1899년이다. 사도세자를 왕으로 격상시킨 인물은 다름아닌 고종이다.
 
그래서 즉위 직전의 고종은 '왕의 5대손'이었다. 5대조인 영조가 왕이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왕의 5대손은 왕위계승을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왕위를 이을 남자가 거의 없었던 1864년의 특수한 사정이 이명복에게 기회가 됐던 것이다.
 
이처럼 정통성이 극히 취약한 이명복에게 권위를 실어주는 방법은 '죽은 왕들' 중 하나를 그의 양부로 만드는 것이었다. 즉위에 앞서 입양 절차를 선행시킨 것은 그의 정통성을 높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명복의 입적은 왕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정통성을 얹어주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런데 '죽은 왕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효명세자가 이명복의 양아버지로 선택됐다. 그렇게 된 것은 고종을 왕으로 만든 장본인인 신정왕후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는 최천중이 이명복을 왕으로 만들려 했고 신정왕후는 반대했던 것처럼 묘사됐지만, 실제로는 신정왕후가 이명복을 왕으로 만든 핵심 인물이었다.
 
살아생전에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와 대립했다. 그런 효명세자를 지지하는 가문이 처가인 풍양 조씨였다. 그래서 이명복을 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는 조치는 고종을 풍양 조씨 편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안동 김씨에게 타격을 가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 입양은 신정왕후와 풍양 조씨에게도 유리했다.
 
그러나 그 입양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에게 훨씬 더 큰 이익이 됐다. 아들의 등극에 힘입어 흥선군에서 흥선대원군으로 격상된 그는 수렴청정권을 갖게 된 신정왕후로부터 섭정권을 위임받고 이를 토대로 실질적 군주 역할을 하게 됐다. 아들을 6촌 형제인 효명세자의 아들로 입양시킨 그는 일개 종친에서 최고 권력자로 급부상하며 1873년까지 조선왕조를 이끌어 나갔다.
 
그런데 그 입양은 흥선대원군에게 이익만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암울한 복선 같은 것도 됐다. 이 일은 머지않아 두 부자가 적대관계로 돌아서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흥선대원군이 아들 하나를 사실상 잃게 되는 원인이 됐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입양이 친부모와 양자의 법적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현행 민법 제882조의2 제2항은 "양자의 입양 전의 친족관계는 존속한다"고 규정한다. 그래서 입양 뒤에도 양자는 친부모를 부양해야 하고 또 친부모의 재산을 상속할 수 있다.
 
양자가 친부모에게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옛날에는 친부모와 양자의 관계에 제약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은 양자가 친부모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양자가 양부모 제사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한 관습이었다.
 
이 관습은 아주 오래 전부터 동아시아에 존재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첨해이사금 편에는 양자가 친부모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는 문화가 중국 한나라 때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옛날 입양은 친부모와 양자의 관계를 어느 정도 갈라놓는 기능을 했다. 양자는 친부모와 어느 정도는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면에서, 옛날 입양은 친부모와 양자의 관계에 부정적 효과를 끼쳤다.
 
그런 부정적 효과가 흥선대원군과 고종 사이에 나타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섭정의 토대인 신정왕후 수렴청정이 1866년에 끝났는데도 흥선대원군이 계속해서 최고권력을 행사하자, 흥선대원군에 대한 견제에 착수한 것은 다름아닌 아들 고종이었다.
 
대신들이 '공부에나 더 신경 쓰시라'며 견제하는데도 고종은 계속해서 국정 운영에 깊이 개입하려 했고, 주요 요직에 자기편을 심고 아버지 쪽을 몰아내는 작업을 지속했다. 그런 끝에 고종은 1873년에 아버지의 국정 개입을 차단하고 실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아버지가 기득권층 및 서양세력 견제에 열정을 쏟고 있는 줄을 잘 알면서도 아버지를 가차없이 밀어낸 것이다.
 
양자는 친부모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당시의 관습을 고종은 너무도 철저히 이행했다. 친아버지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도 그는 친아버지를 멀리하며 국정 개입을 차단했다.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 한장면.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 한장면. ⓒ TV조선

 
 
아버지에 적대적인 고종

고종의 적대적 태도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1876년의 시장개방(대일 문호개방)과 그 뒤의 서구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한양 중산층이 월급 부실지급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과 합세해 반란을 일으킨 1882년 임오군란 때도 그랬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서민층 주역들은 흥선대원군을 역사 무대로 다시 소환하고 그에게 정권을 맡겼다. 이로 인해 고종은 약 1개월간 '식물 임금'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뒤집기 위해 고종은 부인인 명성황후(민비)와 합작해 청나라 군대를 은밀히 불러들였다. 청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임오군란 주역들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청나라군에 붙들려 중국 천진(톈진)으로 끌려가는 상황을 묵인했다. 고종의 요청을 받고 조선에 들어온 청나라군이 고종의 승인도 없이 고종의 아버지를 청나라에 끌고 갈 수는 없었다. 명성황후가 요청한 것이든 아니든, 고종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했다.
 
대원군 납치 당일의 정부 기록을 토대로 작성된 고종 19년 7월 13일자(양력 1882년 8월 26일자) <고종실록>은 대원군 피랍 사실을 "대원군이 천진으로 행차했다"는 짤막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불법적인 납치가 합법적인 행차로 둔갑된 것이다. 이 '행차'에 합법성을 부여해준 고종과 명성황후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부자간에 이 정도 상황이 벌어졌다면, 사실상 남남보다도 못하게 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864년 정월의 입적이 이 부자를 이런 파탄 상황으로까지 몰고 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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