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3일 개봉한 독립영화 <바람의 언덕>은 올 초부터 지난 5월 말까지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라는 다소 생소한 상영방식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전국의 관객들과 만나 왔습니다. 전국 각 지역의 영화 커뮤니티와 독립예술영화 극장 등에서 매주 토요일 혹은 일요일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며 '아주 특별한 여정' 이어갔습니다. 그 여정의 기록을 개별 커뮤니티 혹은 개인의 소개와 극장 소개가 포함된 연재를 통해 전합니다. 그 열네 번째는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보내온 편지입니다.[편집자말]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바람의 언덕> 대구 상영회 현장 ⓒ 영화사삼순


 
2020년 1월 18일|오오극장에서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를 맞이하다

방송을 녹화한 1월 14일 화요일부터 박석영 감독은 대구에 머물렀다. 그 주 토요일은 대구 독립영화 전용관 오오극장에서 <바람의 언덕>이 개봉 전 관객을 만나기 위한 여정으로 준비한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의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화요일 녹화 후 뒤풀이부터 박석영 감독과 근 1주일 동안 또 다른 여정이 진행된 셈이다.

박 감독은 오오극장에서 주간 홍보와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따로 사무실이 없어 당시 오오극장에 딸린 삼삼다방 카페에서 노트북 들고 일하던 나는 며칠을 계속 박석영 감독과 함께 하는 운명에 처했다. 각자의 일정을 진행하다 조언을 청하기도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극장 근처에 있던 영화를 사랑하는 주인장이 운영하는 술집 '투찬스'에서 퇴근 후 펍에 들르듯 오만가지 영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박석영 감독은 촘촘하게 매주 잡힌 로드쇼 전국일정을 준비하느라 끙끙 앓아가며 머리를 싸매곤 했다. 극장 로비에서 이름 모를 관객이 <바람의 언덕> 로드쇼에 대해 궁금해 하는 낌새가 보이면 즉시 출동해 열정적으로 프로모션을 하는 진풍경이 종종 포착됐다. 그 다음 주 다음다음 주에 예정된 다른 지역의 로드쇼 준비에도 여념이 없었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는 <바람의 언덕>이라는 영화를 매개로 각 지역별, 분야별 관객공동체와 독립-예술영화극장들을 묶어내는 맞춤형 상영기획인데, 이를 제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호와 함께 실무를 치러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커뮤니티와의 연계가 필수라 할 수 있다.

박석영 감독은 발품을 팔고 수소문해가며 그런 파트너를 찾고 협의하는데 무척 공을 들였다. 나 역시 기존의 영화제를 넘어 다양한 상영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교류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왔다고 자부하지만, 박석영 감독처럼 간절히 그 집단을 찾고 함께 하려는 이는 처음 봤다.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만큼 자신의 영화를 제대로 봐줄 관객을 찾고 있구나 싶었다. 내가 교분을 이어가거나 이름은 알고 있던 전국의 단체와 활동가들이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를 통해 씨줄 날줄로 엮여지고 있었다.  
 상영회 뒤풀이가 이어진 대구 오오극장 인근 주점 풍경

사진 설명. 2. 상영회 뒷풀이가 이어진 대구 오오극장 인근 주점 풍경 ⓒ 영화사삼순




대구 로드쇼 당일이 다가왔다. 가족들과 함께 오오극장을 찾았다. 2005년 <친절한 금자씨> 이후 처음이었다. 15년 만에 영화를, 그것도 속칭 '독립영화'를 가족들과 함께 볼 결심을 한 건 그만큼 <바람의 언덕>이 진입 턱 없이 우리 가족들에게도 이야기 자체로 먹힐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오히려 각자의 삶을 짧지 않게 경유한 중장년층에게 더 흡입력이 있으리란 확신도 있었다.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극장을 찾았다. 며칠 전 녹화로 인해 구면이 된 배우들과 재회의 인사를 나누고 세 번째로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이번엔 조금 더 버티다 또 울었다. 그렇게 분하지는 않았다.

대구 로드쇼는 별도의 커뮤니티와 제휴 없이 독립영화 전용관 오오극장과 함께 진행했다. 오오극장 관객 프로그래머 중에서 박석영 감독의 전작부터 팬이었던 곽라영님이 모더레이터를 맡았다. 박석영 감독의 전작들부터 형성된 열정적인 팬들과 지역 독립예술인들의 비중이 높았던 관객과의 대화 현장이었다.

서울이라면 'GV 빌런'이라 욕먹기 딱 좋았을, 그런 소감의 토로와 단순하지만 정말 궁금해 견딜 수 없던 질문들이 터져 나왔고, 시계도 보지 않고 성실히 답하고 공감하는 관객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특별히 '윤식' 역할을 맡은 김준배 배우까지 GV에 참여한 자리였고, 역시나 배우들의 노래와 연주까지 종합 공연이 이뤄졌다.

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뒤풀이 장소로 대관한 '투찬스'에서 밤을 샌 뒤풀이가 이어졌다. 대개 이런 뒤풀이는 속된 말로 '관계자'들끼리 가게 마련인데, 거짓말 조금 보태면 GV 자리에 남아 있던 이들의 거의 반절은 같이 따라간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 영화 속 현실에 대한 시시콜콜한 확인, 제작과정 비화들에 대한 궁금증들이 오갔고, 여러 차례 테이블 멤버들이 교체되면서 관객 간에도 교류가 이뤄지는 시간이었다. 겨울밤은 꽤나 길지만 그날의 뒤풀이는 시간이 꽤 모자랐다. 그렇게 다음날 <바람의 언덕> 유랑극단을 떠나보냈다.

몇 군데 매체에 <바람의 언덕>에 대한 기고를 보냈고, <오마이뉴스>의 관련 작품 연속기획에도 외람되이 연재의 일부분이 되었다. 인스타그램에서 <바람의 언덕> 소식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확인하게 됐고, 이 유랑극단의 여정을 계속 성원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디 상영은 잘 이뤄졌는지, 여기에선 누구누구 참석했는지 찾아보는 순간은 퍽 즐거웠던 기억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우리 일상을 송두리째 뒤바꿔버린 코로나19의 시간이 도래하게 된다.

코로나19를 뚫고 서울과 전주를 관통한 독립영화 부흥회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바람의 언덕>의 '시스터스 필름' 상영회 포스터. ⓒ 시스터스필름



극장개봉과 재개된 로드쇼들, 2020년 5월 16일 |CGV 명동씨네라이브러리, 시스터스필름×바람의 언덕 & 2020년 5월 17일 |CGV 전주, 무명씨네×바람의 언덕

2월말 이후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는 잠정 중단을 맞았다. 본래의 로드쇼 일정은 취소 및 대폭 수정되었고, 그렇게 예열이 중간에 멈춘 <바람의 언덕>은 근 석 달이 지난 2020년 4월 23일에 개봉을 맞이한다.

그리고 통상적인 개봉 GV와 병행해 원래 계획했던 일부의 로드쇼 프로그램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극장과 영화에 대한 목마름이 있던 차에 5월 중순에 연달아 진행된 서울과 전주의 로드쇼 일정에 유랑극단 일행과 함께 할 기회를 얻고 동행하게 되었다.

5월 16일 토요일 로드쇼는 독자적인 기획으로 서울과 포항에서 정기상영회를 열고 있는 '시스터스 필름'과 함께 진행되었다. 여성주의적 시선과 독립영화 상영을 연계해 '언니네 영화관'(서울 아리랑시네센터)과 '퇴근길 영화관'(인디플러스 포항) 등 일련의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시스터스 필름은 일군의 르포와 에세이 작업으로 알려진 은유 작가를 모더레이터로 가족, 특히 여성 구성원에 초점을 둔 관객과의 대화 프로그램을 꾸렸다.

코로나19 이후 변화된 극장 풍경으로 객석의 일부만 활용할 수 있었고, 방역절차로 인해 여러모로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극장 분위기는 낯설었지만 지방에서 진행되던 로드쇼와는 다른 풍경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뭐랄까,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와 개봉시기 GV의 혼합형 같다고나 할까.

서울의 관객들이라면 통상적인 GV에 비해 좀 더 주제에 초점 맞춤형태 관객과의 대화로 받아들이겠지만, 대구 로드쇼 때 들었던 소회처럼 기존의 GV에서는 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나누고 교감하는 특이점을 발견했던 나로서는 서울에서의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의 '맛'이 지방에서보다는 엷은 맛이 든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부분은 아마 서울과 지역의 관객들의 독립영화 관람환경과 연결되는 지점이 아닐까? 서울에선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관객 개인이 비용과 발품을 약간 감수한다면 꽤 괜찮은 기획과 행사들이 상당히 풍족한 환경이기에 굳이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라는 명칭을 달지 않아도 유사한 체험을 취사선택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넓은 편이다.

반면에 같은 개봉 GV라 할지라도 물리적 한계로 인해 개봉 초반은 주로 서울 등 수도권 중심으로 효율을 따질 수밖에 없고, 참석 게스트나 모더레이터 등의 진용 또한 감독이나 배급사의 어지간한 의지 없이는 서울에 비해 한 두주 뒤늦은 지역 관객과의 대화가 빈약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즉 독립예술영화의 향유란 측면에서도 서울과 지역의 갭이 뚜렷하게 존재하는 셈이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의 지역 일정은 서울과 별반 차이 없는 하나의 '팀'으로 대부분의 일정이 치러졌고 이는 큰 강점으로 작용했다. 박석영 감독의 의지와 기획 아래 충분한 진행시간 확보와, 그 지역에 뿌리내린 커뮤니티와의 제휴 등 면밀히 사전 조사의 영향 하에 홍보와 모객 등이 이뤄져 지역 독립영화관객으로선 드문 체험의 기회가 되었다.

마치 아티스트의 전국 투어 일정처럼 일찍 공개된 지역별 로드쇼 계획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다가왔었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에서 '커뮤니티'의 세분화는 상대적으로 서울 등 수도권에서 강점을, '로드쇼'의 순회성이 지역에서 더 부각되지 않았느냐 넘겨짚을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전주 '무명씨네' 상영회 현장 ⓒ 무명씨네


 
그 다음날은 전주에서 로드쇼가 이어졌다. 전주 로드쇼는 지역 영화공동체 '무명씨네'와의 연계로 진행됐다. 다른 로드쇼들처럼 3월에 잡혀 있던 일정이 두 달여 연기되어 치러진 이번 로드쇼는 극장을 찾지 못해 무척 고생했다고 들었다.

전주는 국제영화제의 고장답게 지자체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전주 독립영화관이 상설 운영되기에 상대적으로 상영 공간 확보나 기획이 용이했던 지역인데, 코로나19로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대부분의 집합시설이 문을 닫으면서 오히려 상영 공간 확보가 힘들어져버리는 역설을 낳았다. 결국 CGV 전주극장에서 어렵게 상영관을 구해 전주 로드쇼는 진행될 수 있었다.

전날 진행된 시스터스필름과의 로드쇼가 '가족'과 '여성'에 초점을 맞춰 은유 작가와 함께 깊게 들어갔다면, 무명씨네와의 전주 로드쇼는 대구와 비슷하게 심도가 깊다기보다는 영화 속 가족 이야기를 관객들이 각자 현실의 자기 사정과 연계해 입을 열어 말하고, 궁금한 지점들을 확인하는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역 로드쇼 간의 기본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내가 본 로드쇼에선 늘 한 가지 이상의 의외성 질문이나 지적이 등장하곤 했다. 관객과의 대화가 자연스러운 감상의 발화가 아니라 마치 식견을 평가받는 검증의 장처럼 변모한 듯한 근래 독립예술영화 GV의 '익숙한' 풍경들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박석영 감독과 유랑극단 구성원들의 의지에 힘입어 영화가 상영되던 특정 시공간을 휘감았기 때문일 것이다.

무명씨네 또한 전주에서 다년간 이색적인 상영 기획을 해왔던 공동체이기에 행사는 무난하게 잘 진행됐다. 재개된 로드쇼는 지역별, 분야별로 흩어진 영화의 친구들이 다들 건재하다는 생사 확인과 안부의 여정처럼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전주국제영화제의 무 관객 행사 결정으로 십여 년 만에 5월의 전주행을 못하게 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는 시간인 셈이기도 했고.

이른 오후에 진행된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 덕분에 아주 여유롭게 GV 연장처럼 뒤풀이를 이어갈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마당에서 자리를 만들어 전주는 물론 군산에서 온 관객들, 행사를 진행하느라 수고한 무명씨네 구성원들과 함께 평소 나누기 힘들었던 영화에 대한 만담을 아주 오래 이어갔다. 그만큼 전주의 5월 날씨는 술 마시며 이야기 풀어내기에 딱 좋았다.

무명씨네를 비롯한 전주의 상영공동체 활동가들은 전주 로드쇼를 통해 지난 몇 달간의 고립상태에서 겨우 벗어났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코로나19로 영화계, 특히 독립영화계가 입은 타격은 어마어마하지만 그 중에서도 더 조명되지 못한 부분이 '상영' 활동 분야일 것이다.

지역으로 갈수록 형편은 더 열악한 게 독립영화 '씬'이기 마련이다. 그나마 지역 독립영화판이 창작활동 위주로 명맥을 유지하기에, 상영이나 평론 활동은 지역 생태계 순환을 위해 그 비중이 적지 않음에도 당장은 창작만큼 급하게 인식되기 힘이 든다. 그런 안타까운 조건에서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는 각지의 상영활동가와 커뮤니티에 작은 부흥회의 역할이 되어준 셈이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 인생을 바칠 수 있는가?"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사진5 ▲ 정성일 평론가와의 '굿바이' GV 포스터 ⓒ 영화사삼순


 
2020년 5월 30일|종로3가 계동치킨에서 유랑극단과 친구들의 시간

오랜만에 반가운 로드쇼 동행 길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꽁꽁 얼어붙은 극장가 사정 때문에, <바람의 언덕>은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 일정과 극장 개봉 모두 아쉬움을 남긴 채 원래 예정보다 축소해 5월말로 마무리 수순으로 돌입하게 됐다.

큰 기대를 품고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전국을 순회하며 독립예술영화가 대기업 복합상영관 체인의 호의나 샐럽을 앞세운 필사적 홍보마케팅 외의 방법으로 자력갱생할 수 있는 여지를 모색하려던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 전작들에 이어 네 번 연속 극장개봉을 통해 어려운 시기에 희망적인 사례로 개봉 성과를 이어가길 바랐던 박석영 감독과 유랑극단 구성원들로선 받아들이기 쉽진 않은 상황이었으리라.

그런 아쉬움을 안고 공식적인 로드쇼의 마지막 여정이 발표됐다. 지난해 성탄전야를 장식하며 로드쇼의 출발을 선포했던 공간이기도 한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정성일 선생과 재회하며 유랑극단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다. 다른 일정들이 많아 5월 30일 마지막 로드쇼의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에는 함께 하지 못했다. 너무 아쉬운 지점이다.

(로드쇼의 뒤풀이는 항상 GV의 연장, 속편에 가깝다) 인근 계동치킨에서 진행된 마무리 파티에 부랴부랴 합류할 수 있었다. 듣기로 성탄전야의 장구한 관객과의 대화와 이날의 마무리 토크 때 정성일 선생의 이야기는 겹치는 지점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어떤 영화에 대해 저렇게 순전하게 지지와 애정을 보이는 건 참 드문 일이다. 그것도 호오는 있을지언정 그 '순도'와 '내공'에 대해선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 정성일 선생이라면 더더욱.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정성일 평론가와의 '굿바이' GV 현장. ⓒ 영화사삼순


 
뒤늦게 도착한 계동치킨. <바람의 언덕>과 박석영 감독의 그간 영화작업에 함께 했던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마 코로나19 역풍을 맞지 않고 원래 예정대로 훨씬 방대한 로드쇼 투어와 보다 나은 개봉 성과를 냈더라면 좀 더 많은 이들이 함께 했겠지만, 대신에 그렇게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역시 2차, 3차로 뒤풀이는 이어졌고, 일출의 기운이 어렴풋하게 비춰질 때까지 그 자리에 합석하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는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박석영 감독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차기작 시나리오 이야기를 한참 풀어내기 시작했고, 다음 영화작업을 위한 실무 궁리에 여념이 없었다. 박석영 감독은 정성일 선생의 영화비평집 제목이기도 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처럼 그런 순간이 오기까지 영화를 어떻게 잘 만들까 궁리할 사람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몇 몇의 사람들. 박석영 감독이 신나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부흥회를 하듯 끝도 없이 이어나가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고, 다음 영화를 위해 거두절미 도움을 청할 때 기꺼이 형편만 된다면 같이 하려는 영화의 친구들, 뤼미에르의 후예들이 함께 할 것이다. 어쩌다보니 그 지독한 영화에 대한 애정표현의 길에 살짝 무임승차를 하게 된 셈인데, 그 공짜 차비는 두고두고 비싸게 대가를 치르지 않을까 퍽 두렵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라는 작지만 소중한 영화공동체의 실험과 코로나19 영향 아래에서 시도한 독립영화의 극장개봉은 후기자본주의 시대, 인간의 감정과 사고마저 수량화/수치화하려는 탐욕 앞에선 실패담 혹은 해프닝에 불과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석영 감독과 유랑극단 멤버들이 영화를 완성하기까지와는 별개로 지난 반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함께 한 여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영화를 넘어서는 '영화적' 체험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원래 그림만큼은 아닐지언정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고 소통하며 기존 독립영화관객 층이라 간주되는 이들을 벗어난 층위에 부딪히는 임상 실험의 소중한 경험치를 얻었다.

아마 현재 한국 독립영화판에서 박석영 감독만큼 전국의 상영공동체와 영화 커뮤니티를 꿰뚫어보고 연계망을 그릴 수 있는 활동가는 없을 것이다. 영화에 미친 한 독립영화인과 그에 공감하거나 안쓰러워하면서도 애정 하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전설적인 청춘만화 <슬램덩크>를 관통하는 명대사는 의외로 주인공 강백호도, 라이벌인 서태웅이나 윤대협, 은사인 안 감독이 아니라 지나가는 캐릭터에 불과한 풍전의 노 감독이 던진다. "농구는 좋아하나?"가 바로 그 대사다.

억지로 대입해 보자면, 영화가 예술이다라거나 독립영화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발언을 수행해야 한다는 지극히 정당한 당위가 자연스럽기 보다는 하나의 성역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고민될 때가 있다.

그런 당위를 강조하다 보니 정작 순전하게 영화를 좋아하는 감정은 오히려 퇴색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잡상에 간혹 빠질 때, 영화에 대한 전문지식이나 고강한 결기가 없더라도 상업영화와는 분명 다른 재미를 독립예술영화에서 누군가가 찾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좋지 아니한가?'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근래 박석영 감독의 영화들, 특히 <바람의 언덕>에서 그런 순간을 체험했었다. "영화는 좋아하나?"는 변용은 곧이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인생을 바칠 수 있는가?"라는 삶을 건 결단으로 전환된다. 박석영 감독과 좋은 친구들은 바로 그 결단에 도달하려는 이들이라 믿는다. 이 쓸데없이 길기만 한 글이 그들에 대한 사랑의 연대기로 읽혀진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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