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시민의 생명을 구한 문용동 전도사

광주 시민의 생명을 구한 문용동 전도사 ⓒ 문용동전도사순교기념사업회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새벽 동이 다 튼 (아침에) 헬기에서 '투항하라'고 (계엄군이 선무방송을) 했었는데, (전남도청 지하 무기고를 지키다가 투항하기 위해) 문 전도사가 앞에 가고 제가 그 뒤를 따라가며 (전남도청) 문을 열고 막 나가는데 헬기에서 쏜 총격으로 문 전도사가 유명을 달리했죠."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무기고 관리반(일명 폭약관리반)의 일원이었던 김영복(광주서석교회 집사)씨는 CBS-TV 5.18 4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7부작 릴레이 인터뷰 <그 해 봄>(연출 반태경 PD)에서 '광주를 구한 의인'으로 불리는 고(故) 문용동 전도사(1952~1980)가 계엄군의 조준사격에 의해 1980년 5월 27일 숨졌다고 증언했다.
 
계엄군의 만행을 목격한 전도사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의 만행을 기록한 문용동 전도사의 일기.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의 만행을 기록한 문용동 전도사의 일기. ⓒ 문용동전도사순교기념사업회

 
고(故) 문용동(당시 27세) 전도사는 1980년 광주항쟁 당시 호남신학대 4학년생으로 상무대교회에서 시무했다. 상무대교회는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소속된 군인과 가족들을 위한 교회다. 문 전도사는 전남노회 여전회연합회에서 파송한 민간인 신분의 교역자로 전교사 소속 군인가족 대상으로 주일학교와 학생회를 지도했다. 전도사는 개신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 이전의 교직 신분이다.
 
문 전도사가 항쟁에 참여한 것은 계엄군의 만행 때문이었다. 1980년 5월 18일 상무대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광주 시내를 걷던 그는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폭행을 당해 쓰러진 시민을 전남대 병원으로 옮기면서 항쟁에 참여했다. 문 전도사는 1980년 5월 22일 일기에서 당시의 상황과 심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관 32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계엄당국의 엉터리없는 오도(誤導). 불순분자들의 난동이라니, 그럼 내가 나도 불순분자란 말인가. 대열의 최전방에서 외치고 막고 자제시키던 내가 적색분자란 말인가. 우린 후세에 전 국민에게 광주사태가 몇몇의 불순세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선량한 시민들의 궐기임을 알리고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시민이 빵과 주먹밥과 음료수를 나르는 시민들이 폭도란 말인가. 뭔가를, 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보여줘야 한다. 나의 불참이, 나의 방관, 외면이 수습을 더 지연시키는 것이다."

 
광주 시민의 생명을 구하려다 프락치로 누명
 
 광주 시민의 생명을 구한 뒤 계엄군에게 죽임 당한 문용동 전도사의 묘.

광주 시민의 생명을 구한 뒤 계엄군에게 죽임 당한 문용동 전도사의 묘. ⓒ CBS

 
광주항쟁에 참여한 문 전도사는 '폭약관리반원'을 자원했다. '폭약관리반'은 시민군이 전남도청 지하에 구축한 무기와 탄약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전남도청 지하에 보관돼 있던 TNT 양은 1977년 발생한 이리역(현재 익산역) 폭발사고의 두 배. 이리역 폭발사고로 사망자 59명, 부상자 1343명, 이재민 1만 명이 발생했다.
 
전남도청 지하에 보관한 TNT 시민군이 계엄군에 맞서기 위해 화순광업소에서 가져온 것으로 항쟁 최후의 무기이기도 했지만 이를 사용할 경우 광주 시가지의 절반이 날아갈 정도의 재앙을 불러올 무기였다. 계엄군이 시민군의 최후 보루인 전남도청 진압을 망설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수도경비사령부 헌병으로 복무하면서 총기류와 폭약류 교육을 받은 문 전도사는 광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다. 그는 한 살 아래로 공병하사관 출신인 김영복과 함께 5월 23일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을 찾아가 다이너마이트 뇌관 700여개, 24일엔 폭약 뇌관 2288개를 넘겨주었고, 김 장군은 탄약전문가 파견을 약속했다.
 
전교사에서 파견한 배승일 기술문관(탄약검사사)은 5월 25일 전남도청 지하 무기고에 잠입, 문 전도사를 비롯한 5명의 폭약관리반원과 함께 밤을 새우면서 다이너마이트 뇌관과 폭약 뭉치 2100개와 수류탄 신관 450여 발을 해체했다. 문 전도사는 재앙을 막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계엄군의 프락치라는 누명이었다. 계엄군은 1980년 5월 31일 발표한 '광주사태의 전모'에서 문 전도사를 "군이 매수한 부화뇌동자'로 기록했고 광주 시민사회는 공작요원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평화의 순교자 문용동 전도사는 누군인가?
 
 호남신학대에 세워진 문용동 전도사 추모비.

호남신학대에 세워진 문용동 전도사 추모비. ⓒ CBS

 
문 전도사의 호남신학대 동기인 윤상현 목사는 CBS-TV와의 인터뷰에서 "문 전도사는 자기 집에 찾아온 거지가 씻을 수 있도록 목욕물을 준비해주고 먹을 것을 챙겨준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면서 "집창촌 여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정도로 신앙적 열정을 가진 순수한 교역자였지만 당시 (계엄군이 저지른 만행에 의한) 광주 상황이 의분을 갖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며 문 전도사의 항쟁 참여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26일 전남도청을 찾아가 문 전도사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늘 저녁에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하니 나와라. 위험하다. 친구(문용동 전도사)가 이야기하기를 도청 안에 들어가서 보니 회수한 무기들을 도청 지하에다 보관하고 있는데 특히, 화순탄광(화순광업소)에서 가져온 다이너마이트라던가 TNT를 보관하고 있는데 잘못하면 광주시가 큰일 날 것 같다. 만약에 폭발하게 되면 반경 5km 안은 다 날아간다. 이걸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무기와 탄약을 같이 지키던 몇몇은 떠났다. 나는 끝까지 지키겠다. 이걸 아는 신학도로, 예수는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끝까지 지켜야지. 죽으면 죽으리라 하면서 끝까지 지키겠다고 했다."
 
문 전도사를 연구한 호남신학대 최상도 교수는 CBS-TV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보면 TNT는 (시민군에게) 항쟁 최후의 보루였다. TNT 때문에 진압군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문 전도사가 TNT 뇌관을 다 분리, 항쟁 지도부에 반기를 든 것 같은 상황이 되면서 프락치라는 누명을 쓰기도 했지만 (문 전도사는) TNT 폭발로 파괴되는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를 했다"며 문 전도사를 광주 시민의 생명을 지킨 순교자라고 평가했다.
 
윤 목사는 광주항쟁에 대해 "5.18은 민주화운동이자 평화운동이었다. 그때 당시에 도난사건이 있었나. 구타 사건이 있었나. 너무나 평화로운 평화시민운동이었다"면서 "문 전도사는 광주의 평화를 위해 희생했다"며 광주 시민의 생명과 평화를 위해 자기를 버린 친구 문용동 전도사를 그리워했다.
 
한편, 문용동 전도사의 소속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순교·순직자심사위원회는 지난 1월 104-2차 모임에서 문용동 전도사 순교자 추서 청원 논의를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해 연구를 지속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 열린 103회기 모임에선 광주동노회의 문 전도사 순교자 추서 청원이 '가하다'고 판단했지만 일부 위원들이 새로운 증거나 연구결과가 필요하다는 입장에 따라 연구와 조사를 다시 진행하기로 했다.
 
광주의 진실을 외면하는 기독교인
 
 CBS-TV 5.18 40주년 특집 <그 해 봄>

CBS-TV 5.18 40주년 특집 <그 해 봄> ⓒ CBS

 
5.18 40주년 특집 <그 해 봄>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및 5.18 기념 재단과 공동으로 기획한 7부작 릴레이 인터뷰 프로젝트로 지난 4월 초부터 CBS-TV를 통해 방영됐다. 마지막 방송인 7회 분인 '토크멘터리 그 해 봄'은 오는 16일과 18일 두 차례 방송될 예정이다.
 
문용동 전도사의 이야기는 '무기고의 의인(義人) 고(故) 문용동 전도사'라는 제목으로 4회에 방영됐다. 1회는 5.18기념재단 이사장 이철우 목사의 '빚진 자의 마음으로', 2회는 5.18 당시 광주기독병원 간호사 감독이었던 김복순 사모와 초보 간호사였던 박경희 사모의 '예수의 사랑으로 부상자를 돌보다', 3회는 5.18 당시 투사회보 제작에 참여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 저자인 전용호 작가의 '빚진 자의 심정으로 광주의 실상을 알리다'가 방영됐다.
 
5회 한신대 신학생이었던 고(故) 류동운 열사의 '병든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진 신학생' 편에선 동생 류동인씨가 전남도청을 지키다 순교한 형에 대해 인터뷰했다. 형의 뒤를 이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한 류동인씨는 광주의 진실을 왜곡하는 방송국에 화염병을 던져 구속되기도 했다. 현재는 경북 성주 사드 반대 투쟁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6회 서강대 학생이었던 고(故) 김의기 열사의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편에선 누나 김주숙씨가 5.18 직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유서를 남기고 투신한 동생 김의기 열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나 김씨는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공동의장 박철 목사의 아내다.
 
7회는 광주항쟁 40주년 오는 18일 오전 10시 40분 역사작가 심용환과 육순종 한국기독교총회장 등이 출연해 '5.18의 기독교적 의미'라는 주제로 토크를 진행하면서 5.18 40주년 특집 <그 해 봄>을 마칠 예정이다.

<그 해 봄>은 5.18 광주항쟁과 한국 개신교의 역할을 재조명하기 위해 제작됐다. 광주에서 5.18을 연구해 온 호남신학대 최상도 교수는 "국립 5.18 민주묘역에 종교를 확인할 수 있는 묘가 199기(基)인데, 그 중 130기 이상이 기독교(개신교)인으로 추정될 정도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 해 봄>을 제작한 반태경PD는 "인터뷰에 참여한 분들의 한결 같은 바람은 전 국민이 광주항쟁의 정신을 살려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라면서 "이 프로젝트가 광주항쟁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부 개신교인들에게 작은 공명(共鳴)이라도 울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연출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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