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우리집에는 자가용이 없었다. 이른 아침마다 아버지는 용달 오토바이에 나를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시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는 하얀 자가용에서 내리던 같은 반 친구와 허름한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있던 나는 눈이 마주 친 것이다.

순간 뭔가 잘못한 일을 들킨 것만 같던 미묘한 느낌. 짧은 순간이었지만 일생동안 기억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준 그 날. 아마 그 날이 내 인생 처음으로 빈부격차를 의식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잘못한 일을 들켰을 때 느끼는 감정을 '수치심'이라고 한다. 낡은 용달오토바이로 상징되는 우리집의 가난을 13살의 나는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복음 19:23-24)'라고 말하며, 조선 시대만 해도 청렴한 생활과 안빈낙도(安貧樂道)를 훌륭한 것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전통적인 세계관과는 달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자가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이다. 가난은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가난을 죄악시하는 '시대의 인식'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Oliver Twist, 2005 로만 폴란스키 감독

▲ Oliver Twist, 2005 로만 폴란스키 감독 ⓒ sony.com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는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은 당대 도시 하층민의 비참한 삶과 범죄자들의 세밀한 묘사, 그리고 악명 높은 '신빈민법'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반응과 비판을 담고 있다.

'자립 능력이 없는 사람'은 오직 구빈원안에 수용되어서만 교구의 원조를 받을 수 있고 구빈원은 '나태한' 사람들이 제 발로 찾지 않도록 혹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신빈민법의 비인간적 요소들은 '열등처우의 원칙'에 잘 반영되고 있는데, 이 원칙에 의해 구제를 받는 사람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했고, 한 가족은 같은 방에 살 수 없었으며, 자유와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위신을 지킬 수 없는 형벌적 요소가 강했다고 한다. 사실상 강제노역장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 이면에는 '빈곤은 나태로 인한 결과이자 죄악'이라는 관점이 전제한다. 과연 가난은 죄인가?
 
영화는 원작의 시대상과 문제의식을 잘 반영하면서도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아름다운 영상미로 스토리를 짜임새 있게 이어나간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구빈원의 교관이 기억하기 쉽도록 알파벳 순으로 지어 준 특이한 이름으로, 사생아로 태어난 10살 된 고아이다. 올리버는 구빈원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밥을 더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조금만 더 주세요."
"(채찍을 때리며)책임자 데려와!"
···
"올리버가 밥을 더 달랍니다!"
(풍요로운 만찬 앞에 돼지처럼 살찐 위정자들)
"뭐라고! 밥을 다 먹고도 더 달랬다고?!"
"목을 매답시다!"
영화 『올리버 트위스트』 대사
 
 
빈민을 범죄자로 취급하는 사회와 부자들의 냉혹한 시선을 풍자하는 장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올리버는 구빈원의 문제아로 낙인찍히고 5파운드에 장의사의 조수로 넘겨진다.
"개밥 남은 거 있으면 먹여라!"
 

장의사 사무실에서 도착한 첫 날의 대우이다. 구빈원에서보다는 안정된 삶을 찾았지만 이내 장의사 집 아들의 멸시와 조롱으로 다툼이 생기게 된다. 무작정 도망 나온 올리버는 런던으로 향한다.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홀몸인 올리버는 런던에서 우연히 소매치기 다저를 만나 그의 일행과 같이 살게 된다. 돌봄 없는 고아들을 이용해 소매치기를 가르쳐 이득을 취하는 장물아비 페이긴의 소굴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모든 단정들과 상식을 거슬러서 올리버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의에 물들지 않는 선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재현된다.
 
우리는 올리버를 통해 '가난'을 사회 경제적 상황의 맥락(context) 없이 개인의 도덕적 태만의 탓으로만 돌리는 게 합당한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가난=태만=죄'의 도식은 고아 올리버를 통해 부정된다. 사실 자본주의는 그 발전 과정에서 빈민과 실업자를 양산해왔다.

일찍이 18세기 대규모 엔클로저(Enclosure: 농지를 목장으로 전환) 운동에 의해 공유지를 빼앗긴 소작농들은 생활기반을 잃게 되었고 도시로 대거 이동했지만 저임금의 고역에 시달리거나 거지, 도둑, 부랑자로 전락하는 비참한 삶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반면 값싼 노동력의 반대급부로 자본가들이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 우리사회의 '올리버'들을 생각하게 된다. 올리버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완충장치를 마련하기 보다는 복지예산을 대폭 삭감하여 빈곤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기는 신자유주의적 물결과 함께 워킹푸어(Working Poor: 근로빈곤)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워킹푸어는 빈곤층을 뜻하는 말로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계층을 의미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머튼(Robert K. Merton, 1910~2003)은 대다수의 하층민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또는 사회적으로 그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성공이라고 여기는 가치를 도저히 획득할 수 없을 때 심한 좌절감을 느끼게 되며, 수단의 부재가 클수록 반사회적인 행동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말한다. 즉 수단의 부재가 사회혼란(anomie)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혈혈단신(孑孑單身)의 올리버가 소매치기 소굴에 들어가게 될 수밖에 없던 상황은 개인의 도덕성이나 나태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양극화가 심화되어 사회혼란이 가중될수록 우리사회의 올리버들은 점점 증가할 것이다.

영화의 올리버는 운이 좋게 마음씨 좋은 부자의 후원을 얻게 되었지만, 사회의 빈곤 문제를 부자들의 '착한 마음(善心)'에 의존하는 건 현실적이지 못하다. 그 보다는 정책을 통한 구조적 접근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혼란이 가중될수록 피해를 입는 것은 결국 그 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가난은 죄인가? 나는 이렇게 결론짓고 싶다. 가난이 죄인 게 아니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방치'하는 게 죄라고.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빈곤 문제를 접근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모습은 달라지는 거라고. 사회적 희망은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니라, 모두가 만들어 가는 거라고.
덧붙이는 글 브런치 '느리게걷는여자'에 중복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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