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영화 <곡성>의 결말이 담겨 있습니다. 
 
 The Temptation of Christ on the Mountain - Duccio di Buoninsegna(1308-11)

The Temptation of Christ on the Mountain - Duccio di Buoninsegna(1308-11) ⓒ Duccio di Buoninsegna


황량한 광야 절벽 위에 한 남자가 위태롭게 서 있다. 그의 뒤로는 두 천사가 지켜보고 있고, 그의 앞에는 마귀가 뭔가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하는 것 같다. 무슨 말을 했을까? 사실 남자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임무를 앞두고 광야에 들어왔다. 40일간 금식 기도를 마친 후, 극도의 허기를 느낄 때 마귀가 다가왔다. 그는 굴러다니는 빵 모양의 돌을 가리키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떡으로 변하게 해서 먹어.'

유혹이 실패하자, 마귀는 남자를 높은 곳으로 데려간다. '네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려봐.' 실패하자 마귀는 남자가 입성하려는 도시를 가리키며 말한다. '나한테 경배하면 세상의 권력을 주겠다.' 하늘과 땅만 있는 광야에서, 마귀를 마주한 남자의 이름은 '예수'. 예수가 치른 이 '광야 40일의 수행'이, 요즘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 바이러스 '코로나19'로 인해 자주 오르내리는 단어, '검역(quarantine)'의 유래가 된다. 광야 40일의 자기 격리가 이 시점에 왜 의미가 있는지, 영화 <곡성>을 통해 알아보자.
 
 <곡성> 시골 형사 종구(곽도원)는 처음 보는 처참한 현장에 충격을 받는다. /

<곡성> 시골 형사 종구(곽도원)는 처음 보는 처참한 현장에 충격을 받는다. /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평화롭고 순박한 마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일가족 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하고, 그 현장마다 출동하던 형사 종구(곽도원)는 문득 자기 딸 효진(김환희)에게서 그 섬뜩한 기운을 느낀다. 희대의 유행어 '뭣이 중헌디'를 양산하고, n차 관람 문화를 활성화시킨 영화 <곡성>(2016)은 <추격자> <황해>의 나홍진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로, 충격적인 점은 그가 이 영화를 코미디로 생각하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이것은 반드시 현혹될 것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저 명령어'가 영화 내부뿐만 아니라 영화 외부에서도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종구의 새벽잠을 깨운 전화는 인삼 농장 부부 살인사건 호출이다. 범인 박흥국(정미남)은 피칠갑을 하고 동공이 풀린 채 마루에 앉아 있다. 사실 마을에 살인사건이 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다리께 가게 칠성이네와 방앗간 집에 사달이 났다. 이게 다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마을에 오고 나서 벌어진 일로, 그에 대한 괴소문이 난무한다. 이후 마을 곳곳에서 벌어지는 가족 내 살인사건에 대해 <곡성>의 마을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곡성>의 관객들까지 도대체 왜, 그리고 누가 범인이며, 누가 귀신인지에 현혹되어 감독이 도처에 뿌린 온갖 '떡밥'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마을에 들어온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낚시터에서 미끼를 던지고 있다

마을에 들어온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낚시터에서 미끼를 던지고 있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고놈은 미끼를 던져 분 것이고, 자네 딸내미는 고것을 물어본 것이고, 고것이 다여."

무당 일광(황정민)의 대사 한마디면 충분하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일광 역시 비슷한 말로 종구와의 대화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네,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렸네.' 솔직히 저런 말을 듣고, 아무것도 안 떠오르기는 쉽지 않다. 사회생활하는 사람이라면 크건 작건 뭐라도 떠오르게 되어 있다. 그리고 무당을 이유 없이 부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미끼를 문 살인자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박흥국의 경우 정보가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불난 집 안주인(박성연)의 모습은 다소 위태로워 보인다. 다행히 남편에게 구출되어 돌아간 그날, 집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까.

아내가, 며느리가 외지인에게 능욕을 당할 뻔했다. 가족들이 만약 동네 부끄럽다는 이유로 분노했다면 그녀는 아마 수치심에 괴로웠을 것이고, 만약 감싸줬다면 자책감에 괴로웠을 것이다. 죄의식에 떨고 있는 인간의 마음은 빗장이 열린 집처럼 허술하다. 그날 누군가 그녀 마음의 빗장을 열었고, 이후 그녀는 밤마다 알몸으로 활보했다. 그녀를 짓누른 빗장이 수치심인지, 억압된 성욕인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종구와 효진 부녀의 행복한 한때

종구와 효진 부녀의 행복한 한때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효진의 경우, 사춘기의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부모의 은밀한 장면을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시방 뭐 하냐'며 망신을 준다. 효진은 당황하는 아빠를 끌고 다니면서 갖고 싶은 것을 한가득 사서, 낚시터로 소풍을 간다. 성관계를 목격한 것이 처음도 아니라며 아빠를 무색게 한다. 부녀지간에 민망한 대화가 오가던 낚시터 건너편에서 외지인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다음 날부터 열이 나고 시름시름 아프더니 효진의 눈빛과 말투에 미세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곡성>의 극장판에서는 긴가민가한데, 감독판에는 효진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 즉, 엄마의 자리를 탐내는 딸, '엘렉트라 콤플렉스 모티브'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물론 그 욕망은, 미혹되지 않았더라면, 마치 사랑니나 맹장처럼 탈 없이 지나갔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불편한 공기는 마지막 장면, 넋이 나간 종구의 들릴락 말락 한 대사를 통해 쐐기가 박힌다.

"효진아, 아빠 옆자리는 효진이야."

어느 집 숟가락 개수까지 빤하다는 시골 마을에는 비밀이 많지만, 알고 보면 비밀은 없다. 쉬쉬할 뿐 집집마다 말 못 할 속 사정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곡성>은 어느 무당과 사특한 바람잡이가 시골 마을을 돌며 벌이는 2인조 사기극으로, 바람잡이는 미끼를 던지고, 무당은 굿을 한다. 사기단은 안다. 어느 마을에 가도 욕망에 혹은 죄의식에 미혹되는 자들이 덥석 미끼를 문다는 것을 말이다. 빙의 되면, 무당이 와서 굿을 하고, 굿을 중단하지 말래도, 결국 중단할 것을 알고 있다. 굿의 예정된 실패는 2차, 3차 굿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 마을 공동체가 초토화되면 떠난다. 이것이 그들의 수익모델이다.
 
 부제 양이삼(김도윤)은 외지인의 실체와 직면하면서 신앙의 흔들림에 괴로워한다.

부제 양이삼(김도윤)은 외지인의 실체와 직면하면서 신앙의 흔들림에 괴로워한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다시 유대 광야로 돌아가 보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었기에 고통과 감정을 그대로 느낀다. 40일간의 금식이 끝나자마자 극도의 허기진 상태에 마귀는 나타나 식욕이라는 본능을 자극했다. 그것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다면 죽지 않을 테니 뛰어내리라면서, '불사'를 자랑하도록 유도했다. 그것도 실패하자 마지막으로 제시한 유혹은 한층 교묘하다. 앞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을 가리키며, 자신에게 절을 하면 세상의 권세를 넘겨주겠다고 한다.

지금 예수는 저 성 안으로 들어가 공생애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성안에는 그가 싸워야 할 온갖 부정부패한 세력이 득시글하고, 도와야 할 가난한 자들과 깨우쳐야 할 무지한 자들이 가득하다. 자신이 떠난 후 복음을 전할 제자들도 뽑아 훈련시켜야 한다. 그 많은 일들을 실행할 세력을 주겠다는 뜻이다. 임무를 앞둔 자에게 일당백의 손발을 주겠다니, 평범한 인간이라면 이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예수는 거절한다.

검역, 즉 40일간의 자기격리는 내가 감염이 되었더라도, 면역을 생성했을 충분한 기간이다. 예수가 마귀의 유혹을 받고 이겨내서 면역력을 형성한 기간, 그래서 본격적인 공생애에 돌입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광야가 있다. 도시 안에도 '가난'이라는 이름의 광야가 있고, '소외'라는 이름의 광야가 있다. 또는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실패'라는 이름의 광야를 만난다. 자기모멸, 열등감, 질투, 분노. 이렇듯 광야의 이름은 셀 수 없이 많다. 광야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지만, 그래서 더욱 '자신'과 깊이 대면하는 공간이다. 모세도, 다윗도, 세례요한도, 예수도 모두 혹독한 광야생활을 치르고 나서야 인생의 큰 전환기를 맞이했다.

누구나 한번쯤은 광야를 만난다. 아니, 더 자주 만날 수도 있다. 오로지 자기 힘으로 견뎌야 할 때, 수많은 미혹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특히 간절히 원하는 것을 마치 알고나 있는 것처럼 내미는 손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의 손이다. 힘들수록, 앞이 안 보일수록 우리는 더 눈을 감고 자신의 내면과 만나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진솔하게, 충분히 만난 후에야 새로운 인생을 맞이할 수 있다. 그가 성도라면 세상의 소음에 귀를 막고 내면에서 들려오는 창조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요즘 한국은 코로나19의 확산이 장기화됨에 따라 본의 아니게 사회적 거리를 두는 '자기격리'를 집단적으로 치르고 있다. 이 '집단적 자기 격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갈린다. 누군가는 봉쇄를 말할 때, 누군가는 자원봉사를 하러 달려가고, 누군가는 사재기할 때, 누군가는 양보하고 기부한다. 누군가는 검역관에 바이러스 침을 뱉을 때, 누군가는 그들을 위한 도시락을 준비한다. 배제와 경쟁이 아닌, 예수가 강조했던 '사랑과 선행'의 가치관이 어려움에 처한 공동체를 회복시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도서출판 참서림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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