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마에게> 스틸컷

영화 <사마에게>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솔직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현재 극장상영중인, 제 72회 칸영화제 최우수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작품, 다큐영화 <사마에게>를 관람하는 동안 내내 불편했다. 영화적 짜임새나 연출자의 관점 혹은 윤리적 태도나 미학적 완성도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극장에 있는 동안 '관객으로서 나' 자신에 대해 몹시도 불편했다는 말이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전쟁을 소재로 한 기존의 다큐멘터리작품들과는 다른 포맷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다큐의 제목인 '사마'는 내전중인 시리아의 반군지역에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다. 바로 이 작품을 현장에서 직접 촬영하고 연출한 와드 알-카팁 감독의 어린 딸이다. 2010년 12월 18일 튀니지에서, 한 노점상인의 분신으로 촉발된 민주화운동은 도미노처럼 아랍세계전역에 걸쳐 일어났다. 당시 와드는 시리아의 알레포시에 소재한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그녀는 장기집권중인 시리아의 독재정권타도를 위해 싸웠던 수많은 운동권학생들 중 한명이었다.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이 혁명은, 처음엔 아랍사회 전체가 곧장 민주적인 체재로 이행될 수 있을 것처럼 비쳐졌다. 그러나 권력을 틀어진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인해 불행히도 내전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후 사태는 엎친 데 덮친 것도 모자라 보일정도로 매우 복잡한 양태로 전개된다.
 
종교분파간의 갈등, 인접한 국가들 간의 첨예한 이해관계 그리고 이라크의 몰락을 틈타 세를 결집한 IS세력의 준동, 게다가 미국, 러시아 그리고 유럽의 개입으로 인해 시리아내전은 국제전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근 십년에 걸친 전시상황은 결과적으로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조차 알 수 없는 난제가 되고 말았다.
 
 영화 <사마에게> 스틸컷

영화 <사마에게>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21세기를 출발부터 위태롭게 한 아랍세계의 혼란은 엄청난 수의 피난민을 양산한다. 역사적으로 대규모 난민의 발생과 유입은 대격변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전쟁으로 통제 불가능한 수준의 난민이 발생한 상황은 더 이상 특정지역만의 문제만은 아닌 듯싶다.
 
일견, 이해당사국들이 전향적인 자세로 난민을 받아들이고 양성화시키는 것만이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지만, 현실정치에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이 많기 때문에 개별국가차원에선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다. 또한 국경이 불안해 지고 각국의 정부가 제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규모로 유입될 수 있기 때문에 또 다른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크다.
 
그런데 먼저 말해둘 것이 있는데, 다큐멘터리영화 사마에게는 위와 같은 복잡다단한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시도하거나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는 대중매체를 통해 앞서 정리한 것과 같은, 예의 진단적 입장을 취하는 포맷의 다큐멘터리에 익숙해져있다. 말하자면 멀리 떨어져 있는 타국의 전쟁을 소비하는 패턴인데, 대부분의 경우 진중하지만, 무엇보다도 매우 건조한 방식으로 문제를 다룬다.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가리고, 사태는 사건수준으로, 다시 사건은 사고수준에서 다뤄진다. 이와 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소비할 뿐 공감하지 못한다. 참혹함은 적당한 이미지로 포장되고 그저 연민의 정서로 소비될 뿐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5년 터키의 바닷가에 시신으로 떠밀려온 시라아난민의 세 살배기 어린아이를 수습해 안고 있는 해안경비대원의 사진을 들 수 있다. 이 사진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시리아내전이라는 가늠조차 어려운 사태가 한 가족의 비극정도로 축소되어 버린다. 또한 바닷가에 널브러진 아이의 사진과 죽은 아이를 수습해 안고 나오는 연속된 이미지로 인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종의 장례절차를 수행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이처럼 희생자를 특정하여 죄의식이라는 윤리적 태도를 간접적으로나마 취하게 함으로써 적당한 수준의 슬픔의 시간을 소비하게 되면, 뉴스는 대중들로 하여금 대상세계에 대한 부채의식을 털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매체가 우울(melancholia)보다는 애도(sorrow)를 선호하는 이유이다. 이는 보도사진의 전형적인 메커니즘이랄 수 있다.
 
 <사마에게> 스틸컷

<사마에게>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그렇다면 다큐멘터리영화 사마에게가 어떠한 점에서 여타의 전쟁에 대한 무미건조한 객관적보고서로서 다큐멘터리들과 다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마에게는 분명하게도 박제화 된 이미지로써 정제된 전쟁에 대한 보도사진들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극 전체에 걸쳐 드러난 절제되지 않은 감정선을 그대로 유지한 카메라다.
 
형식적 혹은 내용적 방식을 구분할 필요 없이, 이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는, 전장이 되어버린 도시에서, 포탄이 작렬하는 전쟁 상황을 버텨가며 일상을 꾸리고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이들과 거의 모든 감정선을 공유한다. 카메라와 일치된 주체의 시선은 감정으로 요동치고 격정적인 떨림으로 삶과 죽음을 기록한다.
 
극이 전개되는 내내 거리엔 주검이 넘치고 주요촬영장소가 된 임시병원에서는 사지가 잘린 이들의 신음소리가 가득하다. 살아남은 자의 오열과 죽은 이들의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서도 거주민들은 농담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웃음으로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틈틈이 아이들에게 동요를 불러주고, 부모가 모두 죽었을 때 행동지침을 동화로 만들어 들려준다. 두려움 속에서 아이들을 지켜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 틈바구니에 카메라는 거기에 있다.
 
더 이상 카메라는 관찰자가 아니다. 생존자의 시선으로 카메라는 역시 증거로서 살아남기를 갈망한다. 기존의 제작자의 위치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카메라가 함께 한다'는 표현과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카메라는 거기에 실존하기에 온전히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 생존자란 곁에 있는 주검의 당사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들이 들고 있던 카메라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선 실존의 문제로서 존재자와 동일시된다.

비극적인 현장을 기록할 때마다 카메라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죽음을 기록할 땐, 하염없는 공포에 휩싸인다. 그 이유는 존재자로서 카메라와 동일시된 감독의 시선이 직면한 공포심으로 야기될 수 있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기보다, 필름에 기록된 아이들의 주검에 자신의 딸을 이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폭격이 없는 시간에도 어머니로서 감독은 자신이 전쟁터에서 낳은 딸 사마가 죽는 꿈으로 시달릴 수밖에 없다.
 
적으로 둘러싸인 봉쇄된 도시에서, 전폭기가 쏟아붓는 폭탄과 미사일로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나간다. 그런 현장에서 그렇게 아이들의 주검 앞에서 카메라를 든 감독은 무너진다. 핏빛으로 기억되는 참상의 현장이 자신의 가족에게 오버랩되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에 가까워보인다. 이러한 보편정서를 통해 카메라를 든 감독의 감정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이된다.
 
한편 이와 같은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카메라는 관찰자의 시선을 배제됨으로써 과정의 내러티브 또한 파괴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관찰자적 관점은 예상 가능한 일련의 과정을 기록함으로써 플롯을 대체하기 마련인데, 사마에서는 사태의 과정은 생략되고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극의 전개를 지켜보는 관객에겐 적어도 도시의 모든 이가 죽어야 끝날 것 같은 극단적이고 절박한 우울의 정서로 다가온다. 우울은 우리를 죽음충동으로 이끌기 마련인데,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선 우리는 어떤 강력한 희생제의를 바라게 된다.
 
바로 관객인 필자가 불편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큐멘터리가 시작되고 타이틀백이 뜨고 나서 "사마에게 바친다"라는 문구와 내레이션이 나온다. 굳이 변명하자면 묘하게도 이 카피는 우리를 서스펜스로 이끈다. 이와 같은 도입부 덕분에 어쩌면 우리는 감독의 어린 딸 사마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보고싶은 마음을 품고 객석을 지켜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큐의 결말은 우리를 미끄러트린다.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전쟁 중에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기적은 이루어진다. 생존이 주검보다 더 슬프고, 죽음이 일상보다 덜 우울한 까닭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의 플롯은 불편해지고 결과적으로 이항대립은 해체된다. 이로써 감독은 관객이 품을만한 '숭고의 감정'을 파괴시킨다.
 
이와 같은 해체를 통해, 비로소 전쟁은 압도적인 이미지와 극적인 내러티브가 아닌 온전한(?) 전쟁으로서 기록된다.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크레디트가 올라가도 우리는 한동안 객석에 남아 있어야 한다. 전쟁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의 스펙터클과 영화적 서스펜스를 은근히 기대했던 불편함과 부끄럼 때문에...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문화평론가이자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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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교수로 재직중이며, 현재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문화정치에 관한 칼럼을 아시아투데이에 연재중입니다. 출판한 저서로는 영화로 읽는 우리시회- 역설과 아이러니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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