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바람의 언덕>이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라는 다소 생소한 상영방식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과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바람의 언덕> 팀은 2020년 4월말까지, 전국 각 지역의 영화 커뮤니티와 독립예술영화 극장 등에서 매주 토요일 혹은 일요일을 포함해 20회 정도의 상영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매회 상영을 마치면, 상영을 주최한 커뮤니티 혹은 개인의 소개와 극장의 소개를 포함하는 이 '아주 특별한 여정'을 연재글로 전합니다. 그 네 번째는 대구사회복지영화제 김상목 프로그래머가 보내온 편지입니다.[편집자말]
길에서 "들꽃"을 만나다 
 
 영화 <들꽃>의 공식 포스터.

영화 <들꽃>의 공식 포스터. ⓒ 인디플러그

  
2014년 가을,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BIFF)가 열리던 현장에서 영화 <들꽃>을 만났다. 영화제의 주 상영공간인 '영화의 전당' 관객 라운지 앞 인도에서 영화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하듯 앉아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해 BIFF는 <다이빙 벨>과 <불안한 외출> 논란으로 부산시의 외압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굵직한 해외 거장들과 국내외 주목받는 감독들의 신작들이 늘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인파가 넘쳐나는 길거리 한구석에 외롭게 앉아있던 이들이 든 피켓에 부착된 영화 <들꽃>의 이미지는, 낯설었다. 매년 300편이 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수많은 상영작 중에서 고만고만한 국내 독립장편영화로 스쳐 지나갈 전형적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피켓을 든 40대 감독은 호기심에 멈춰선 이들에게 열심히 자신의 영화를 소개했고, 상영 일자와 상영관 홍보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한국 독립영화의 단골 소재였던 사회에서 버림받은 가출 청소년 문제를 다룬 것으로 보이는 영화에 큰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감독의 헌신적인 태도는 꽤 인상적이었다.
 
감독의 곁에는 독특한 인상의 배우 한 명이 함께 혹은 교대로 자신의 얼굴이 큼직하게 자리 잡은 피켓을 들고 있곤 했다. 열심히 영화를 홍보하던 감독과 달리 배우는 조용히 하지만 우직할 정도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다시 라운지로 돌아와 봐도, 낮 시간 내내 그들은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작은 퍼포먼스는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입소문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비슷한 처지의 크게 주목받기 힘든 다른 영화 팀도 그 곁에서 홍보 활동에 끼어들곤 했다.
 
그 영화 <들꽃>은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인상이 강렬해 뇌리에 남았던 그 배우는 아니었다. 이듬해인 2015년 <들꽃>은 소규모로 극장 개봉도 진행했다. 가출청소년들의 잔혹한 일상을 담은 영화는 곧 뇌리에서 잊혀졌다.
 
하지만 그 다음해 BIFF에 그 배우의 한번 보면 잊기 힘들 강렬한 표정이 전면에 꽉 채워진 포스터와 함께 그 감독의 신작 <스틸 플라워>가 돌아왔다. 장편 신작을 1년 만에 완성해 내다니. 조금 놀랐고, 그 배우의 얼굴이 괜히 반가웠다.
 
전작 <들꽃>에서 3명의 소녀 중 한 명이었던 그 배우는 단독주연으로 영화 속에서 무진장 고생하고 있었다. 잔혹한 영화 속 현실에서 보는 이들이 숨 막힐 정도로 힘겨워하던 배우와 영화는 적지 않은 상을 수집하며 독립영화계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게 되는 인지도를 쌓아나갔다.  
 
 영화 <스틸 플라워>의 공식 포스터.

영화 <스틸 플라워>의 공식 포스터. ⓒ 인디스토리


<들꽃>이 가출 청소년들이 성매매 등 범죄에 노출되는 사회적 비참함을 한참 유행하던 다르덴 형제 풍의 연출 방식으로 구현해냈다면, <스틸 플라워>는 역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던 청년 세대 불안정노동을 전면적으로 활용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 수많은 독립영화의 공통 소재로 묶이기 십상일지언정 연출방식이나 이미지는 독특했다. 사회적 폭로와 고발보다는 '그 배우' 정하담이 분한 소녀 주변의 이상하고 낯선 어른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의지할 곳 없는 소녀는 필사적으로 일자리를 찾고 살아남으려 노력하지만, 그녀가 끌고 다니는 마치 달팽이나 소라게의 등껍질 마냥 보이는 캐리어는 보는 이들에게 점점 더 무겁게 다가왔다. 생의 의지를 표상하듯 보이는 탭댄스 또한 잔인한 세상을 돌파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스틸 플라워>는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서 주목받고 수상하면서 독립영화로는 큰 주목을 았고, 이듬해 극장 개봉까지 치른다. 이 후속작을 통해 박석영 감독은 전형적이지 않은 연출방식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정하담 배우는 독립영화계에서는 주목받는 배우로 성장했다.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점의 <재꽃>
 
 영화 <재꽃>의 공식 포스터.

영화 <재꽃>의 공식 포스터. ⓒ 딥포커스

  
놀랍게도 <스틸 플라워> 완성 후 영화제와 개봉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박석영 감독은 1년 뒤 '꽃' 연작의 세 번째 영화 <재꽃>을 선보였다. 전작들이 BIFF에서 첫 선을 보인 것과 달리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공개된 <재꽃>은 차갑고 어두운 도시의 밤으로 기억되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밝고 환한 농촌으로 영화 속 배경을 통째로 이동했다.
 
<들꽃>의 공동주연에서 <스틸 플라워>의 단독주연으로 어른들에게 의지하기는커녕, 늘 수난당하며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정하담 배우는 <재꽃>에서는 시골에서 마치 휴식 같은 나날을 보는 캐릭터를 맡았고, 그곳에 마치 어린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소녀 해금이 등장한다.
 
전작들과 대조되는 요소가 많지만 3편을 하나의 연작 혹은 연대기처럼 모두 소화한 관객들이라면 박석영 감독의 '꽃' 시리즈가 동일한 인물과 배경이 등장하는 시리즈물은 아니지만 정하담 배우가 분한 '하담' 캐릭터의 성장담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늘 외롭고 의지할 데도 없을뿐더러, 주변에는 믿을 사람 없던 주인공에게 <재꽃>은 쉬어갈 틈을 내어준다. '하담'의 표정은 밝다. '유사 가족' 형태를 갖춘 그녀가 문간방에서 더부살이하는 집도 있다. 이번에는 그녀 주변에서 여러 사건이 발생한다.
 
하담은 그녀가 보호받지 못했던 전철을 밟는 것 같은 소녀 해금을 만나면서 본인의 '생존 투쟁'이 아닌, 분신과도 같은 소녀를 지키려 동분서주한다. 완전히 고립된 것처럼 보이던 <스틸 플라워>의 하담은 <재꽃>에서 어렵게 찾아냈던 안식처의 붕괴를 겪는다. 하지만 하담이 마치 자신의 어릴 적 같은 존재인 다른 소녀와 함께 떠나는 결말은 낯설음과 동시에 기이한 연대기의 마무리로 울림을 준다.
 
독립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이 3부작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역시 여러 영화제를 거쳤고, 극장 개봉도 이어갔다. 관객과 만남에 예전부터 적극적인 박석영 감독은 특히 <재꽃> 개봉 후 전국 일주를 하듯 감독 자신은 물론 배우들과 함께 짧지 않은 여정을 거치며 전국의 관객을 만났다.
 
<바람의 언덕>에서 만나는 새로운 시작 
 
 영화 <바람의 언덕>의 스틸컷.

영화 <바람의 언덕>의 스틸컷. ⓒ 영화사삼순

 
3부작을 완성한 박 감독이 과연 정하담 배우와 함께 했던 '꽃' 연작 이후 어떤 신작을 내놓을지 궁금증이 쌓여만 갔다. 그리고 2019년 BIFF에서 신작 <바람의 언덕>을 선보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꽃 3부작'+1로 <바람의 언덕>을 논해야 할지, '<들꽃> & <스틸 플라워>' 대 '<재꽃> & <바람의 언덕>'으로 설정해야 할지 상당한 시간 생각해야 했다.
 
다시 겨울의 어두운 밤길 장면이 위주였지만 <바람의 언덕>은 <재꽃>의 후일담 혹은 확장된 세계관에 가까워 보였다. 초기작들이 고립된 상황 속 하담의 악전고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재꽃>은 하담이 해금을 만나고 겪는 여러 가지 사건들로 범위가 넓어졌다. <바람의 언덕>은 본격적으로 엄마와 딸 (그리고 의붓아들까지) 버디무비의 성격을 갖추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1명에서 2명으로 늘다니!
 
<바람의 언덕>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 구조다. 남편과 사별한 영분이 강원도 고향으로 돌아온다. 우연히 어릴 적 버린 딸을 만난다. 엄마임을 속인 채 딸의 필라테스 학원에 등록한다. 우연한 계기로 모녀 관계가 드러난다. 상속 문제로 의붓아들이 찾아온다. 딸을 두고 떠난다. 그리고 다시 재회한다. 아침 드라마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에 가까운 셈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주제와 소재 중심의 전개가 아니다. 다양한 이미지와 편집을 통한 연상 효과, 개별 영화가 아니라 '작가'로서 특정 감독의 영화 세계를 함께 호흡하면서 얻게 되는 세계관과 배경 정보로 지층처럼 쌓여가는 <바람의 언덕>의 독특한 영화적 세계는 흔히 생각하는 사회적 맥락의 독립영화라기보다는 작가주의 예술영화에 가까운 경지로 다가온다.
 
독립영화와 예술영화가 선 그어지듯 뚝딱 구분되지는 않는다. 이들 영화는 공통적으로 상업영화의 최우선 덕목이라 할 '상품'으로서의 고려보다는 영화를 통해 사회적 발언이나 예술적 성취를 중시하면서 상대적으로 저예산으로 작업해 자본의 영향을 최소화하려 노력하는 경향을 띤다.
 
그중 한국 독립영화가 사회비판적 측면을 강조하며 소재나 표현 수위를 통해 '개입'하는 형태라면, 주로 서구 영화제에서 주목받는 예술영화 거장들의 방식은 공적 지원을 얼마간 받으며 소수 정예 스태프와 친숙한 배우들과 함께 감독 본인의 자의식과 주제에 최대한 집중하는 식이다. 박석영 감독의 작품세계는 <바람의 언덕>에 이르러 완연히 후자의 경향으로 기울어진다.
 
물론 당대 한국 독립영화에서 사회참여를 근간으로 하는 기조는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독립'영화의 기본적인 인식이나 상업 영화에 비해 강점으로 인정되는 측면에서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기본 요소로 작동한다.
 
반면 박석영 감독의 작품은 초기작부터 소재로서 사회적 이슈를 다루더라도 그 전개와 결론에서 체제 구조보다는 개별적인 '인간'에 주목해왔다. 근작으로 향할수록 더욱 더 개인의 삶과 판단의 윤리적 측면으로 강조점이 기울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상업 영화가 주는 정교한 '가짜 현실' 속 개인을 묘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은 아니다. 개인의 선택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윤리적 고민을 다루는 작가주의 영화에 가까운 모양새다. 미니멀리즘에 가깝게 소규모로 압축된 영화 속 현실은 복잡한 세상의 사정을 간결하지만 선명하게 대비하며 개인의 실존을 전달한다.
 
흔히 독립영화의 선입견을 갖게 되는 이야기 구조와도 다르고, 상업영화의 단순명쾌한 전개와도 다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는 순간 휘발되지 않고 오히려 두고두고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상징과 암시, 반복되거나 대조되는 편집의 묘를 살린 인상들로 직조된 구조 등은 (독립영화에 대한) 약간의 진입 턱을 넘어서려는 관객들에겐 영화적 쾌감과 함께 성찰을 제공해줄 것이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라는 모험
 
 <바람의 언덕>의 대구 상영회 포스터.

<바람의 언덕>의 대구 상영회 포스터. ⓒ 영화사삼순

  
<바람의 언덕>은 2019년 후반 BIFF와 서울독립영화제 상영 후 독특한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기 시작했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라는 형태로 통상적인 극장 개봉이 아니라 마치 유랑극단의 순회공연에 가까운 식이다. 이는 박석영 감독의 지난 극장 개봉 경험에서 쌓인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결단이다.
 
독립영화가 극장에 걸리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거친다. 일단 전체 독립영화의 10%에 미치지 못하는 장편 독립영화는 개봉까지 비용과 품이 많이 들어간다. 상업적 개봉을 통해 손익을 맞추기 어려우므로 공적 자금 지원에 크게 의존한다.
 
국내외 영화제 등의 쇼케이스 행사에서 주목받고, 수상실적을 내고, 개봉지원에 선정되고, 영화 배급사와 만난 이후 개봉 과정에 돌입한다. 그 과정에서 홍보와 마케팅 등 영화 제작에 들어간 자금의 1/3 가까이가 추가로 투입돼야 한다. 하지만 애초 손익분기점을 넘길 전망이 희박한 독립영화들이 이 조건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
 
개봉하더라도 100여 개 미만, 심하게는 두 자릿수 상영관을 겨우 확보하는 현재의 멀티플렉스 극장 환경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작품은 손에 꼽는다. 독립영화의 소규모 팬덤을 위한 굿즈와 GV(관객과의 대화)에 들어가는 수고 또한 만만치 않다. 하다못해 영화 유튜버 바이럴 마케팅에도 상응하는 비용이 지출돼야 하는 현실에서 본전을 뽑을 가망이 없어 홍보를 못 하고 홍보를 못 하니 관객이 더 줄어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3편의 전작들을 모두 개봉하는 성과를 낸 감독이지만, 박 감독은 특히 <재꽃> 개봉 당시 전국의 관객들과 대화를 진행해 본 판단으로 '어차피 돈 벌기는 글렀으니 기존의 방식대로 이길 수 없는 게임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즐겁게 관객과 만날 순 없을까?'라는 문제의식으로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를 기획했다고 한다.
 
전국 곳곳에 외로운 섬처럼 흩어져 있는 독립예술영화전용관 및 지역별로 산재한 다양한 유형의 상영 집단들과 제휴해 반드시 관객과의 대화나 여러 부대행사를 전제한 소규모 상영을 매주 이어나간다는 감독의 계획은, 유랑극단의 전국 순회공연에 가까워 보인다.
 
반년 가까운 기간 동안 예정된 '로드쇼' 이후 소규모로 전통적 방식의 개봉 계획도 열어두고 있지만, <바람의 언덕>이 관객과 만날 주된 방법은 우리 동네에 유랑극단이 언제 오느냐 기다리거나 그 공연을 직접 유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익을 포기한다면 원래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고픈 주제와 이야기를 좀 더 전면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감독의 판단이 명백하다는 사실을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의 방법론이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유사한 방법으로 과거나 현재까지 독특한 방식의 변칙 개봉이나 공동체 상영이 이어지고 있지만, 박석영 감독의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는 그런 다양한 시도의 집대성에 가깝다.
 
<바람의 언덕>은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해 오래 손발을 맞춰온 배우, 스태프와 함께 자주적인 재원 마련과 치밀한 사전 기획을 통해 효율적인 제작, 그리고 영화를 관객과 만나게 하는 개봉방식의 독립성을 지닌다. 그래서 소재로만 사회적 의제를 활용하거나 자유분방한 형식과 주제에도 불구하고 상업 영화로 가기 전 단계로 인식되는 독립예술영화와 궤를 달리한다.
 
특히나 박석영 감독이 수차례 언급한 것처럼 감독의 어머니가 볼 수 있는 영화를 지향해 완성한 <바람의 언덕>은 지적인 젊은 영화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진한' 이야기를 체험하고픈 이들이라면 만족할 수 있는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첨단에 있는 작품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지난달 18일 대구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에서 진행된 <바람의 언덕> 대구 상영회 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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