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 <천문>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생각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경우가 있다.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가 다층적이거나, 줄거리 흐름이 뒤얽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입체적인 대본이라 평가를 받을 것이고, 후자는 엉성한 대본이라 비판받을 것이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아래 <천문>)을 보면서 생각이 갈린 까닭은 전자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선왕조 518년 역사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시간대의 최고 권력자 세종. <천문>에서는 사건의 기둥을 군왕 이도와 과학기술자 장영실의 인간적인 정리에 바탕을 둔다. 그들을 중심으로 당대의 지배집단과 정치권력, 조선과 명나라의 외교관계, 세종의 과학입국 의지와 자주의식 같은 다채로운 문제가 물 흐르듯 다뤄진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하는 문구가 첫머리에 나온다. 이것은 <천문>이 '팩션사극'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실제로 <세종실록>에는 "세종 24년에 발생한 '안여사건'으로 대호군 장영실을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전한다. 장영실은 그 후 역사에서 사라진다.
 
물시계와 측우기, 간의와 이도
 

1960년대 근대화 이전 한반도는 전통적으로 농본 국가였다. 물론 19세기 이전 세계 전역 거의 모든 나라가 농업 국가였다. 19세기 이후 영국을 필두로 하여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급속도로 공업화가 진행되고, 그로 인해 유럽 제국주의가 등장한다. 우리가 말하는 근대의 다른 이름은 유럽의 세계적 패권수립이다.
 
입춘에서 시작하여 대한으로 끝나는 24절기는 농사를 지을 때 긴요하다. 나이든 축이나 농촌에서 입에 달고 사는 절기는 실상 중국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한반도에 맞는 시간과 절기를 갖는다 함은 농업을 근간으로 한 조선에게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천문>에서 우리는 조선의 시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다.
 
어디 그뿐이랴. 동래의 관노출신 천재과학자 장영실은 측우기와 천문관측기구 간의(簡儀)까지 만들어 군왕을 활짝 웃도록 한다. 1438년 세종 20년에 경복궁 경회루에 높이 31자, 너비 32자, 길이 47자의 대간의가 설치된다. 명에 의지하지 않고, 조선의 기술로 완성된 간의를 보고 조선의 하늘과 별을 가지게 되었노라 기뻐하는 이도.
 
<천문>에서 인상적인 대목은 천출 영실과 이도가 맺는 관계다. 늦은 밤 영실을 불러 별 이야기를 시작하는 세종. 어린 시절부터 하늘의 별이 좋았다는 이도는 영실에게 함께 눕기를 명하고 나란히 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아스라이 먼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북극성이 군왕의 별이라 말하는 영실에게 옆자리를 나눠주는 이도.
 
조선의 홀로서기와 영실의 면천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영화 <천문 : 하늘에 묻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노비 출신이기에 영실은 낮에는 함부로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위가 캄캄한 밤하늘을 우러르면 하늘은 한 번도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한다. 그런 영실에게 정5품 벼슬을 내리고 면천을 시켜주는 세종. 나라를 위하는 일에 자질과 능력을 갖춘 자라면 그가 천출이든 상민이든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는 군왕.
 
장마철 야심한 시각에 하늘의 별을 보여 달라는 군왕에게 영실은 정말로 아름다운 28수 별자리와 별 중의 별 북극성을 보여준다. <천문>에서 가장 아름답고 잘 만들어진 장면이 아닐까 한다.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는 뭇별들의 향연! 이 장면에서 우리는 군왕 세종이 아니라, 인간 이도와 영실의 하나 됨을 만난다.
 
세종이 영실을 가까이하고 인간적인 정리를 나눔은 그에게 내재한 나라와 백성을 향한 크고 너른 사랑이리라. 출생의 근본을 따지고 묻는 사대부의 고루하고 남루한 영혼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담대하고 섬세한 이도의 품격과 인간 됨됨이가 환하게 빛난다. 그가 "저 별들이 모두 내 백성으로 보이는구나!" 할 때의 감동은 크고 깊다.
 
세종이 조선의 홀로서기를 관철하려던 군왕이었음을 허진호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되 '호사다마'라 했던가. 대사헌 정남손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반기를 든다. 그들의 주장은 명쾌하다. "명나라 없는 조선은 없다!"는 것이다. 조선 자체의 과학기술도 문자도 명나라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전혀 불가하다는 그들의 주장.
 
조선의 군왕과 사대부
 
조선은 군왕과 사대부가 권력을 분점하는 체제를 가진 국가다. 영화 속 세종의 책상 위에 놓인 상소 꾸러미가 그것을 입증한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군왕이 일일이 답해주어야 하는 사대부의 상소문이 조선의 여론 형성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영의정은 말한다. "사대부가 없으면 전하의 안위도 위태롭사옵니다."
 
조정의 벼슬아치들과 사대부가 하늘처럼 받들어 모신 천조국(天朝國) 명나라와 나란히 서려던 세종의 꿈은 어그러진다. 명나라 사신 앞에서 대간의를 끌어내리고 불 붙이는 장면이 그것을 상징한다. 속으로 피눈물을 쏟으며 인고했던 세종이 꺼내든 회심의 일격은 '반역'의 음모를 밝혀내는 것이다. <천문>의 예기치 못한 반전이다.
 
하지만 영화는 사건과 장면을 간단하게 바꿔버린다. 어가(御駕)를 위태롭게 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를 들먹이던 세종과 공포의 검은 곤룡포. 영화의 긴장감이 고도로 응축되는 시점에 감독은 슬며시 꼬리를 내린다. 그는 이미 하고 싶은 말과 생각을 모조리 털어놓은 터, 뭐가 아쉽겠는가?
 
오늘날에도 상당수 가진 자들이 공감하는 또 다른 '천조국' 미국에 대한 일방적인 의지와 의탁. 주한미군 주둔비용 6조를 내주면서까지 우리의 국방을 미군에게 맡기자는 자들의 생각을 빼닮은 조선의 사대부들과 벼슬아치들. 그들에게 하늘과도 같은 상국이자 사대의 대상이 시대와 더불어 바뀌었을 뿐, 내면의식은 동일하다.
 
글을 마치면서
 
 영화 <천문> 한 장면

영화 <천문> 한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안여사건'으로 곤장 80대를 맞은 장영실은 웬일인지 그 후 종적도 없이 사라진다. 영화가 주목하는 대목은 여기다. 대체 그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조선의 과학과 기술을 위해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은 영실은 왜 역사에서 지워지고 말았는가? <취화선>의 장승업처럼 장영실의 역사도 완전히 망각된다.
 
하지만 <천문>은 인상적인 장면을 선사한다. 국문(鞫問)하던 세종이 눈물범벅이 되어 영실에게 묻는다. "너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느냐?" 군왕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영실이 답한다. "전하의 나라와 백성이 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허진호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고갱이 아닐까? 노비와 군왕이 함께 나눈 조선의 현재와 미래.
 
그러나 우리는 21세기에도 금수저와 흙수저로 표현되는 불평등의 나락에 빠져있다. 조선의 왕보다 넉넉하고 배부르게 살면서 이웃이 굶고 얼어 죽는 황망한 세상에서 안온하고 평안하게 살아간다. 동시에 정부와 대통령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기에 분주하다. 모든 것이 국가 책임이라는 의식에 젖어 나와 가족의 행복에 몰두한다.
 
세종은 국가정책을 결정할 때 세 계층의 소외된 사람들을 제일 먼저 생각했다고 한다. 버려진 아이와 무시당하는 노인 그리고 힘없는 노비였다.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는 사람들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면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한 세종. 600년 전 조선왕조보다 나아지지 못한 21세기 대한민국은 행복한지, <천문>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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