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루 벤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14일(한국시간) 레바논 베이루트 로타나 제피노르호텔에서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4차전 레바논과의 경기를 하루 앞두고 가진 공식 기자회견에서 레바논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파울루 벤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14일(한국시간) 레바논 베이루트 로타나 제피노르호텔에서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4차전 레바논과의 경기를 하루 앞두고 가진 공식 기자회견에서 레바논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2000년대 후반부터 세계축구에는 '점유율'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했다. 볼을 최대한 오래 점유하며 상대에게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세밀한 패스게임과 기술축구로 경기를 지배하는 것을 추구한다.

당시 '티키타카'로 대표되는 바르셀로나 FC와 스페인 축구대표팀이 한창 전성기에 돌입하던 시점이었기에, 축구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예술적이고 매력적인 플레이의 완성처럼 보였다. 한국축구도 이러한 트렌드의 영향을 받아 점유율을 강조하는 지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대표팀에서도 점유율 축구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수차례 있었다. '만화축구'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조광래 감독을 시작으로, 홍명보나 슈틸리케, 신태용 감독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점유율과 후방 빌드업에 기반을 두고 풀어나가는 축구를 추구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축구가 점유율 축구로 국제무대에서 뚜렷한 성공을 거둔 경우는 아직까지 전무하다.

점유율 축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구상대로만 이루어진다면 가장 효율적으로 경기를 장악하고 상대를 무너뜨릴수 있는 전술인 것은 맞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축구의 고유한 스타일이나 아시아 축구의 환경과는 다소 맞지 않는 전술이라는데 있었다.

한국축구가 과거 '아시아의 호랑이'로 군림하던 시절에는 중원싸움이나 볼점유율에서는 다소 밀리더라도 적극적인 몸싸움을 통한 압박, 스피드와 측면을 활용한 빠른 역습으로 상대를 무너뜨리곤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지난 러시아월드컵에서 우승 후보 독일을 침몰시킨 '카잔의 기적'이다.

점유율 축구 앞세워 초반 승승장구한 조광래 감독, 그러나

한국축구는 아시아에서 강팀에 속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상대팀들은 라인을 깊숙이 내리고 수비적인 전략을 취한다. 이럴 때 상대 밀집수비를 공략할 수 있는 세밀한 기술이나 전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점유율과 빌드업이란 그저 '후방에서 의미 없이 볼만 돌리는' 시간낭비가 되고만다.

반면 한국과 비슷하게 점유율 축구를 추구하면서도 선수들의 개인기량이나 조직력에서 더 월등한 팀을 만나면? 말그대로 '원조'앞에서 폼잡는 '짝퉁'신세가 되어 신나게 얻어터지기 일쑤다. 심지어 세계축구에서도 기존 점유율 축구에 대한 대응 전술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조광래 감독은 점유율 축구를 앞세워 초반 승승장구했으나 일본과의 친선전에서 기술축구의 수준차이를 드러내며 0-3으로 완패했고, 이어 브라질월드컵 3차 예선 레바논전에서는 밀집수비와 원정 텃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하며 예선탈락 위기까지 몰리자 경질됐다.

슈틸리케 감독도 스페인과의 평가전에서 1-6으로 참패하며 지도력의 허상이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이후 최종예선에서도 무의미한 점유율 축구를 고집하다가 중국-카타르 등에 잇달아 패하며 한국축구를 벼랑끝으로 몰아넣고 나서야 결국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포르투갈 출신의 파울루 벤투 감독이 부임한 이후 또다시 한국의 점유율 축구는 시험무대에 올랐다. 벤투 감독이 초반 홈에서 열린 평가전에서 계속 좋은 성적을 거둘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첫 '실전'이라고 할 수 있었던 2019 아시안컵에서 밀집수비의 쓴 맛을 체험하며 졸전 끝에 8강에서 탈락하면서 점유율 축구의 민낯이 또다시 드러났다. 벤투 감독은 아시안컵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존의 스타일을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지만 카타르 월드컵 예선에 돌입한 지금까지도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지난 14일(한국시간)에 열린 레바논과의 예선 H조 4차전(0-0)은 벤투의 점유율 축구에 대한 회의감만을 다시 확인하게 만든 경기였다. 벤투 감독은 황의조, 손흥민, 이재성, 황인범, 김영권 등 주력 멤버들을 모두 가동했으나 전반적으로 한 수 아래로 꼽힌 레바논을 압도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슈팅이 골대를 맞고 튀어나오는 등, 레바논 원정만 가면 이상하게 경기가 꼬이는 징크스도 반복됐다.

물론 원정에서 좋지 못한 경기력을 보인데는 나름의 사정은 고려해야한다. 현지의 불안한 정세로 인하여 북한과의 지난 평양 원정에 이어 2경기 연속 무관중 경기를 치렀다. 선수들은 레바논과의 경기를 치르기전까지 현지에서 제대로 된 적응 훈련 한 번 가질 수 없었다. 경기 외적인 환경은 물론이고 원정 텃세와 상대의 거친 플레이까지 우리 선수들이 축구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정에서 큰 사고 없이 실점이나 패배를 피했다는 것은 최소한의 위안이 될 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벤투 감독의 '전술적 유연성 부재'까지 미화할 핑계는 되지 못한다. 한국이 중동 원정에서 왜, 어떻게 고전했는지는 이미 역사적으로 데이터가 충분히 쌓여있는 내용이다. 레바논 경기장의 잔디 상태가 엉망이라 정상적인 빌드업의 위주의 패스축구를 펼치기 어렵다는 것은, 현지에 한 번도 가보지 않고 대표팀 경기만 지켜본 축구팬들이라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예상대로 패스한 볼이 제대로 굴러가지않거나, 선수들이 드리블하는 와중에 잔디가 불안하게 푹푹 빠지는 모습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투호는 여전히 영양가 없는 빌드업 축구를 시도하다가 고전을 자초했다. 벤투 감독이 조광래-최강희 감독 시절의 레바논 원정이나, 슈틸리케 감독 시절의 빌드업 축구가 왜 실패했는지 한번이라도 제대로 검토했다면 이런 식의 경기운영을 고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마 알고서도 그렇게 했다면 아시아 축구의 수준을 무시하는 것이거나, 자신의 축구철학에 대한 '아집'에 불과하다. 그리고 대가는 한국축구가 현재 조 선두이기는 하지만 2차 예선조차 통과를 장담하기 힘든 불안정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또한 벤투 감독의 전임자들이 실패한 이유는 단순히 점유율 축구 때문만은 아니었다. 홈과 원정의 경기력 편차가 컸고, 해외파나 주전급 선수들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변화를 줄 수 있는 '창의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 모든 것이 현재 벤투 감독의 약점과도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벤투 감독의 일방통행

유럽에서도 정상급 공격수로 성장한 손흥민은 유독 벤투호에서는 두각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직선적인 공격루트가 필요한 경우 대안이 될수 있는 '장신 공격수' 김신욱은 벤투 감독 체제에서 여전히 짧은 시간만이 주어지는 조커 역할에 머물고 있다. 반면 국제전에서 벌써 몇 경기째 그리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음에도 황인범-남태희같은 선수들이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무한 신뢰를 받아야하는 이유도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벤투 감독이 한국 선수들의 개성이나 상대팀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축구 철학만을 대표팀에 주입하려는 일방통행에 있다. 역대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중 나름의 성과를 남긴 히딩크나 허정무 감독의 공통점은 자신의 색깔만을 강조하기 보다 '선수들에게 맞는 축구'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벤투 감독은 지금 한국팀을 이끌고 아시아 무대를 뛰고 있다. 자신의 위치나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현지 상황에 적응하려 노력하지 않는 외국인 지도자는 결코 성공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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