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이페이 스토리> 스틸 컷

영화 <타이페이 스토리> 스틸 컷ⓒ (주)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영화 초반, 사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가 타이페이로 돌아온 아룽(허우 샤오시엔)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야구를 가르쳤던 코치를 찾아간다. 코치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연습시합 중이던 선수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과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자로 나와 있는 학생에게 훈수를 둔다. '자세가 잘못됐다.'

그러나 그의 말을 비웃기라도 한 듯, 학생은 멋지게 안타를 쳐낸다. 이에 아룽은 잠시 뜸을 들이지만, 곧이어 투수의 제구력으로 비판의 화살을 돌린다. 그러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뜬다. 그때, 하늘 위로 비행기 한대가 빠르게 지나간다. 비행기는 금세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비행기 구름만이 남아 화면에 자리한다. 변화하는 현실은 외면하고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린 학생들을 판단하는, 심지어 그 판단이 틀렸음을 안 뒤에도 바뀌지 못하는 아룽은 그렇게 비행기 구름과 겹쳐진다. 그렇다, 영화 <타이페이 스토리>(1985년 작품, 34년 만에 한국에서 개봉했다-편집자 말)는 이 비행기 구름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타이페이(대만)의 1980년대는 대변혁의 시대였다. 대만의 경제는 상당 부분 일본의 그것과 연동돼 있다. 대만은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인데, 일본의 국제기업들의 하청업체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 국제기업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시점이 80년대였다. 영화 속에서 유독 후지필름의 간판이 자주 보이는 것도 그 까닭이다. 그 결과 대만의 중소기업들도 덩달아 폭풍성장을 하게 되고, 타이페이를 비롯한 대만 전역이 도시화의 급류에 휩쓸리게 됐다.

과거에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들

이러한 대변혁으로 대만은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하나가 됐고, 이에 잘 적응한 사람들은 부와 명예를 쌓아갔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대만과 대만인의 이미지 또한 이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의 관심사는 그들이 아니다. 아룽은 직물산업에 종사한다. 이는 대표적인 노동집약적 1차 산업으로, 과거의 경제다. 소니, 후지필름 등 당시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2, 3차 산업과는 다르다.

중소기업의 사장으로 보이는 동년배와의 일화에서도 이 대비는 더욱 두드러진다. 아룽은 자신을 직물 산업에 종사한다고 소개하지만, 사장은 끝까지 방직으로 알아듣는다. 직물과 방직은 무슨 차이일까? 직물은 물건이고 방직은 그 물건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전자는 정적이고 후자는 동적이다. 이미 지나가 버려 바뀔 수 없는 과거의 고정성과 직물, 끊임없이 흘러가는 현재의 유동성과 방직. 이 대응 쌍은 우연이 아니다. 이렇듯 영화가 비추는 아룽이라는 인물은 급변하는 현재 속에서 과거에 머물러 있는 존재다.

그리고 아룽은 그곳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의 오래된 연인인 수첸(채금)의 아버지는 과거의 방식만 고집하다 파산한 사업가이며, 그와 함께 야구를 했던 친구는 선수로서 실패했음에도 여전히 그 과거에만 얽매여 있는 채, 택시 일로 겨우겨우 세자매를 키운다. 그럼에도 아룽은 그들과 함께함으로써 과거의 삶을 지속한다.

수첸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미국(영화에서 미국은 줄곧 급성장하는 80년대 대만의 최종 목적지, 새로운 시대에서의 성공을 상징한다) 이민을 포기하며, 친구와 함께 모교 야구 경기를 보러간다. 그렇게 아룽은 과거에 머물러 있고, 그 속에서 안주한다. 현장성이 핵심인 스포츠 경기를 기어코 녹화하여 봄으로써, 어떻게든 현재를 과거에 가두려는 태도는 이 모든 걸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수첸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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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페이 스토리> 스틸 컷ⓒ (주)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여기서 주목할 점은 수첸이라는 인물의 위치다. 그녀의 태도는 아룽의 그것과는 다르다. 과거에 머무를 생각이 없다.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커리어우먼이다. 하지만 결국 그녀 또한 아룽의 위치, 즉 과거에 머물고 만다. 우선 현재가 그녀를 과거로 떠민다. 새로운 시대의 성장이라는 밝은 면 뒤에는 혼돈, 경쟁이라는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무한 경쟁 속에서 먹고 먹힌다.

수첸의 회사 또한 인수를 당하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회사를 떠나게 된다. 이와 동시에 과거는 그녀를 과거로 당긴다. 이때 그녀를 잡아채는 과거는 아룽의 과거와는 다르다. 그녀에게 과거란 가부장적 사회, 즉 남성중심적 사회다. 같은 상황에서 회사를 나오는 건 여자인 수첸과 그녀가 믿고 따르는 여자인 상사 메이다. 반면 수첸과 불륜을 저지른 남자는 회사에 남는다. 인수 회사의 대표로 온 사람들도 모두 남자다(이때 5명이 남성이 모두 비슷한 옷차림에 머리 모양을 한 것은 흥미롭다, 마치 과거가 인간으로 분화한 것 같다).

상사의 특별보좌관 역할을 하던 수첸에게 격하된 지위인 비서 직을 제안하여 떠나게 만든 것도 그들이다. 집안에서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그녀를 타박한다. 자신의 실수로 숟가락을 떨어뜨린 지도 모른 채, 식탁 위에 숟가락이 없자 수첸의 숟가락을 그져 가져가는 그 아버지 말이다. 여기서 수첸은 말없이 떨어진 숟가락을 자신에게로 가져간다. 그렇게 수첸은 과거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듯 수첸은 아룽과 분명 다른 인물이지만 같은 곳에 머문다.

문제는 아룽과 수첸이 실제로 살고 있는, 머물고 있는 곳은 현재라는 점이다. 과거 속에서 살아갈 순 없다. 아룽의 과거인 직물 산업은 생존을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쇠퇴했다. 직물 산업으로 먹고 살던 그 과거는 이미 없다. 수첸을 억누르는 가부장적 사고는 새시대의 인물인 그녀에게 시대착오적이다. 전문직인 그녀는 그곳에서 머물 수 없는 그런 부류다. 그럼에도 아룽은 과거를 붙들고 늘어짐으로써 갈 수 없는, 파멸로 귀결할 수밖에 없는 곳으로 향하며, 수첸은 과거를 부정하고 멀리하고 싶지만 과도기적 사회에서 과거의 인력에 크게 저항하지 못한다.

결국 둘은 각기 다른 각자의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쉴 새 없이 자동차들이 지나치는 사거리가 자주 영화에 등장하는 건 그 이유다. 그 한 가운데 아룽과 수첸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 도로 어느 곳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둘, 섣불리 걸음을 옮겼다간 차에 치일 뿐인 그 위치가 진짜 둘이 위치한 자리다.

정답은 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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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페이 스토리> 스틸 컷ⓒ (주)드림팩트 엔터테인먼트


그렇다면 아룽과 수첸은 영원히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순 없는 걸까? 흔히 이러한 상황에서 제시되는 해결책이 바로 연대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결하진 못하더라도 서로 위로하며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듯이 아룽과 수첸은 같으면서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위치는 같아도 태도는 상반된다.

아룽은 늦게 들어오는 수첸의 행적을 묻지 않고, 다른 여성을 보러 일본을 다녀왔다. 수첸은 아룽이 없는 동안 불륜을 저질렀다. 둘의 대화가 오직 과거의 한때, 서로가 같은 위치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던 시절에 국한돼 있는 것도 그 연유다(그리고 그 모습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앞서도 말했듯이 아룽의 과거와 수첸의 과거는 다르다. 심지어 아룽의 과거는 수첸의 과거에 영향을 끼친다. 수첸의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느라 아룽은 미국을 가지 못한다. 수첸과 함께 가려한 미국 말이다.

아버지라는 굴레가 결국 그녀의 미국 행을 막은 셈이다. 여기서 둘의 과거는 하나로 연결되며 연대는 요원해진다. 두 인물과 다른 인물들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현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후지필름 간판이 붙은 비어있는 건물에 아지트를 차린 젊은이들과 수첸은 잠시 연대를 맺은 보였지만, 일련의 사건으로 이마저도 끊어진다. 미련이 남은 한 남학생이 그녀의 집 앞에 허락없이 서있는 모습은 데이트폭력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과거다. 그리고 아룽은 친구의 아내를 때린다. 그녀가 가족을 저버린 채 도박에만 빠져있다는 이유에서였지만, 그녀도 시류에 적응하지 못한 존재라는 점에서 연대라는 선택을 했을 수 있었음에도 결국 아룽은 파기를 선택했다. 

영화 속에서 사거리 위 인물들은 연대는 말할 것도 없고, 서로를 해한다. 사거리 한 가운데, 비좁은 곳이지만, 그곳에서라도 버티기 위해 최대한 주변 사람들을 밀쳐내는 것일까? 아룽이 수첸을 기다리는 남학생에게 맞이하는 최후는 그 결과인 것일까? 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스토리> 쉽게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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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방법은 연대 하나뿐이다. 사거리의 신호는 저절로 빨간 불로 바뀌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를 막아설 방법은 없다. 다만 차의 속도를 잠시 늦추게 하여 그 틈을 타 인도로 건너가야 한다. 이는 혼자 하기 힘든 작업이다. 끊임없이 수첸의 발목을 잡았던 남성중심사회라는 과거처럼, 차에 치일지 모르는 두려움은 발을 붙잡는다. 하지만 건너려는 사람이 둘이라면? 셋 아니 그 이상이라면? 혼자일 때보다는 수월히 발을 뗄 수 있을 것이며, 차 또한 혼자일 때 보다 쉽게 속도를 늦춰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수첸은 메이의 새 사무실을 찾는다. 아직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은 빈 공간 뿐이지만, 그곳에 서 있는 두 여성의 관계는 그전까지 인물들이 맺었던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 아직은 둘이지만, 영화 속에서 같은 위치에 처한 사람들이 같은 태도를 취하는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상사는 말한다, 미국은 못 갔지만, 여기에 미국을 만들자고. 그렇다, 두 여성은 차의 속도를 멈추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결국은 연대다. 연대의 실패를 보여줬지만 <타이페이 스토리>가 말하는 건 그럼에도 연대다. 그리고 그 연대를 다시 이으려는 두 여성의 스토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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