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케빈에 대하여> 포스터

영화 <케빈에 대하여> 포스터ⓒ 티캐스트

 
한때 전 세계를 누비는 잘 나가는 여행가였던 에바(틸다 스윈튼)는 토마토 축제에서 만난 평범한 남자 프랭클린(존 C. 라일리)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갖게 된다. 모든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에바는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극도로 우울에 빠지고 절망했다. 만삭이 된 다른 임산부들이 배를 쓰다듬으며 곧 태어날 아기와의 만남을 설렘 속에 기다리는 반면, 에바는 엄마가 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남편 프랭클린이 아이의 흔들침대나 유아용품을 준비하며 빙그레 웃을 때도 에바는 웃지 못했다. 그녀의 비명 속에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고 "우리가 해냈어"라고 말하는 남편 옆에서도 그녀는 미래를 비관하는 듯 어두운 표정이다.
 
갓 태어난 아이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기의 생리적 욕구와 더불어 그 감정까지도 24시간 돌봐주어야 하는 엄마들은 당황해 쩔쩔매고 때로는 함께 목 놓아 울기까지 한다. 아기에 대한 사랑이 충분하다고 해서 육아의 고통이 저절로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깊고 어두운 바다 속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기도 한다. 제발 누군가 도와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과 더불어, 어서 이 시간이 지나 아이가 훌쩍 커주기를 기도할 때도 많다.
 
에바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괴로워했다. 우는 아기를 꼭 안아주기보다는 두 팔로 번쩍 들어올려 "그만"이라고 외친다. 이때 그녀는 이를 악문 모습이다. 아기가 울면 "너무 크게 운다"고 남편에게 하소연한다. 에바는 굉음이 이어지는 공사 현장에 유모차를 세워둔 채 아기 울음소리를 기계 소음에 묻어 버리고 짧은 평화를 느끼기도 한다.
 
아기를 간신히 재운 뒤 지쳐 누웠는데 남편이 퇴근해 아이를 깨운다. 방금 재웠으니 깨우지 말라는 아내의 다급한 애원을 무시하고, 아이를 품에 안은 남편은 "살살 흔들어주면 돼"라고 '쉽게' 말한다. 남편은 퇴근 후 잠시 아이와 놀아줄 뿐, 종일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달래주며 전쟁을 치르는 것은 고스란히 에바의 몫이다. 남편은 아내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는 훌쩍 자라 말할 나이가 되어서도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다. 엄마가 해주는 놀이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저 "싫어, 싫어"만 반복한다. 에바는 자폐증을 의심해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지만, 의사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아들과의 전쟁에 지친 에바는 아들을 마주보며 이렇게 말한다.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훨씬 행복했어." 절반은 진심, 절반은 누적된 피로와 절망감, 원망, 슬픔으로 인한 홧김의 발언이다. 아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향한 것이기도 하고, 자신을 도와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탄식이기도 하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 컷

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 컷ⓒ 티캐스트

 
엄마가 자식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처럼, 아이(케빈) 역시 엄마를 선택할 수 없었다. 태어나보니 '하필' 에바가 엄마였다. 엄마, 아빠가 둘이 좋아서 사랑을 나눴으면서, 이로 인해 잉태된 아들의 존재를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엄마 뱃속에서도 케빈은 늘 그녀의 한숨 소리만 들어야 했는데, 태어나보니 엄마는 아기인 자신을 안아주지도 않고 웃어주지도 않는다. 아들의 울음소리에 얼굴을 찡그리며 분노하기도 한다. 순간순간을 그저 이를 악물고 견뎌낼 뿐이다. 엄마는 몸만 내 곁에 있지,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다.

에바는 자신만의 공간을 꿈꾸고, 자기만의 삶을 원한다. 알 수 없는 지도로 가득 채워진 에바의 방은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것을 갈망하는 그를 의미한다. 그런 에바의 마음 속 방 안에는 아들 케빈이 들어갈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케빈 입장에서의 생각이고, 엄마인 에바가 자기만의 방, 자신의 삶을 꿈꾸고 누릴 자유는 당연히 있다. 몇 년 동안 육아를 위해서 여러 희생을 감수했지만, 아이가 점차 커가면서 엄마가 다시 그런 자유와 권리를 넓혀가는 것을 나쁘다 할 수 없다.
 
그러나 케빈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에바의 방 전체에 물감을 뿌려 그곳을 망가뜨린다. 에바는 물감이 든 아들의 장난감 물총을 빼앗아 던지고 밟아 부수며 고함을 지른다. 영화 속 장면으로 바라볼 때 에바의 반응은 대단히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에바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엄마가 몇이나 될까. 왜 그랬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케빈은 엄마의 방을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며, 에바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물감으로 엉망이 된 방을 목격하고 분노와 충격에 휩싸인 엄마를 바라보는 케빈의 표정에 놀라움, 두려움, 죄책감은 없었다.
 
극 중에서 에바와 케빈은 항상 대립 구도에 놓여 있다. 엄마는 아이에게 지시하고 아이는 무반응 내지는 화와 울음, 의도적인 장난과 문제적 행동으로 엄마를 자극한다. 그때마다 엄마의 신경질적인 태도 역시 두드러진다. 어느 날 케빈은 자신에게 숫자를 가르쳐주려는 엄마에게 반항하다가, 에바를 화나게 할 목적으로 연달아 기저귀에 대변을 눈다. 사실 케빈은 이미 혼자서 화장실에 가서 대·소변을 다 해결할 수 있지만, 엄마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분노한 에바는 케빈을 다치게 만들고 이후 엄마는 케빈에게 죄책감을 갖게 된다. 아들에게 사과하며 다가가려는 노력을 시도하지만 그 또한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간다.
 
엄마와 아들은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케빈에게는 그토록 무관심하거나 질린다는 반응을 쏟아내던 에바가 둘째인 딸 실리아(애슐리 게라시모비치)에게는 비교적 관대했다. 케빈은 자신과 여동생을 다르게 대하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본다. 이제 모자 관계는 더욱 파국으로 치닫는다. 케빈은 동생이 기르던 반려동물을 죽이고, 동생의 한쪽 눈을 멀게 한다. 그리고 부모가 이혼해서 자신은 아버지, 여동생은 엄마가 키우기로 하는 대화를 엿들은 후, 그의 분노는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어쩌면 그 대화를 못 들었더라도, 또 다른 사건이 계기가 되어 케빈은 결국 대학살을 저지르게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엄마가 읽어준 책 중 유독 로빈후드에 관한 이야기에만 관심을 가졌고, 아버지는 '눈치 없게도'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바뀔 수 있는 실제 활을 사준다. 케빈은 수년간에 걸쳐 꾸준히 활쏘기 연습을 했다. 엄마는 늘 불안한 눈길로 이를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활쏘기 실력을 칭찬했다.
 
케빈이 여동생의 눈을 멀게 한 범인이라 의심하는 아내에게 프랭클린은 역정을 내며 "상담을 받아보는 게 어때?"라고 말한다. 이상한 것은 아내이지 아들에게는 문제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선물은 아들의 공격성을 강화시키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케빈이 언젠가 화살을 사용해 누군가를 쏠 것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열여섯 살 생일을 3일 앞둔 어느날 케빈은 화살로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 컷

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 컷ⓒ 티캐스트

 
린 램지 감독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해온 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 소설로 슈라이버는 세계적인 권위의 여성 문학상 오렌지 상을 수상했고, 고교 총기난사 사건 등을 연상시키는 충격적인 소재와 내용 때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케빈이 저지른 일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가 엄마의 정서적 학대에 상처받았다 해도 그가 저지른 폭력과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아들의 일탈과 살인 행위에 대한 책임과 비난을 엄마와 그 가족에게 전부 돌리는 것 역시 온당치 않다.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기른 부모라도 자식을 전부 알고 통제할 수는 없다. 아이의 어떠한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부모뿐 아니라, 학교 시스템, 교사, 또래 아이들, 이웃과 친척, 대중매체와 게임, SNS 등 숱한 변수가 많다. 더욱이 엄마와 아들은 하나가 아니라, 별개의 존재다.
 
그러나 아들이 저지른 대학살 사건 후, 에바는 집도 일자리도 잃는다. 남편과 딸마저 잃어(영화를 보면 케빈의 아버지와 여동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다), 희생자 가족 및 지역사회와 직장에서 모든 이의 경멸과 증오를 홀로 받아내며 견딘다. 희생자 유족은 케빈의 엄마 에바를 향해 "살인마", "악마"라고 부르고, 집과 자동차에 붉은 페인트를 투척하며, 길에서 만나면 서슴지 않고 뺨을 때린다. 마트에서도 에바의 장바구니 속 달걀을 전부 깨부수고, "지옥에나 떨어져 버려"라는 악담을 쏟아 붓는다. 그녀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도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아들을 그렇게 키웠으니 전부 부모 책임이라고 가볍게,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에바는 원하지 않을 때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하필' 케빈과 같이 매우 예민한 아이였다. 기질적으로 타고난 성향과 부모의 양육 태도가 아이에게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테지만, 에바도 서툴렀고 그만큼 힘들었다. 개인의 주체적인 삶과 자유, 성취를 추구하는 에바에게 임신과 출산은 경력 단절과 독박 육아, 마음의 병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누구나 처음부터 엄마였던 것은 아니다. 모성도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에바 역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첫째 아이 때는 누군가를 위한 일방적인 희생과 돌봄의 경험을 감당하기 벅찼을 것이다. 둘째 아이에 대해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것은 축적된 경험과 익숙해짐, 그리고 여자 아이의 유순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케빈에게 에바의 아들로 사는 일이 괴로웠다면, 에바도 케빈의 엄마로 사는 일이 십자가였을지 모른다. 에바가 어른이고 엄마이니 좀 더 책임이 크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이 모자는 서로가 감정의 폭력과 줄다리기, 상처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니 이 모자를 두고 전적으로 누구의 책임이다, 누가 더 나쁘다고 말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둘 다 희생자라거나 둘 다 나쁘다는 식의 결론도 맞지 않다. 엄마도 아들도 서로를 이해하는 데 서툴렀고,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충분히 노력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다만 여동생의 출생을 앞두고 어린 케빈이 엄마에게 했던 말과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익숙한 것과 좋아하는 건 달라. 엄마도 나에게 익숙하기는 하잖아." 에바는 아들의 말에 곧바로 "아냐. 엄마는 케빈을 정말 사랑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동생이 태어나면 우리 셋 다 적응해야 돼"라고만 말했을 뿐.
  
 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 컷

영화 <케빈에 대하여> 스틸 컷ⓒ 티캐스트

 
이 비뚤어진 모자의 관계 속에 놓인 그 사랑의 슬픔을 읽는다. 누구나 부모를 선택할 수도, 자식을 선택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부모됨을 배워야 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법, 자식의 아픔과 고뇌를 읽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물론 자식도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부모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부모의 삶을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엄마라면 이러저러 해야 한다거나 모든 게 다 엄마 때문이라는 식의 일그러진 모성신화도 깨뜨려야 한다.
 
활쏘기 연습을 하던 케빈의 눈동자에는 과녁이 비쳤다. 케빈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아이를 낳고 키운 지 2년 2개월. 나 역시 엄마로서 서툴렀고, 아이에게 상처를 준 적이 많다. 지난 2년은 끊임없이 "나는 엄마 자격이 있는가?", "아이는 엄마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자문하며 살아온 시간이었다.
 
인간의 아이는 다른 동물에 비해 유독 성장에 오랜 시간이 걸리며, 보호자의 정성을 필요로 한다. 아기는 무섭고 험난한 세상에 태어나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오직 보호자만을 바라본다. 그래서 영·유아기의 최소 3년 동안은 물리적인 보살핌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사랑과 보호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 아이에게 '주 양육자는 나를 보호해주는 사람, 이 세상은 살아갈 만한 세상'이라는 신뢰감을 주는 게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이 시기의 부모와 아이의 애착관계가 어긋나고 실패하면, 평생 부모도 아이도 상처를 안고 살아갈지 모른다. 그리고 그 상처는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극도로 우울한 영화의 전개와는 달리, 영화 내내 경쾌한 노랫말과 리듬이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그 중 이 노랫말이 심장을 울린다. "사랑하는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신 그 날을 잊을 수 없어라.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넌 항상 이 엄마의 기쁨이었단다." 아들이 듣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원작소설과 영화를 소개하는 문구 속에는 아들이 악마, 소시오패스, 괴물 등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케빈은 과연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 것일까, 악마로 자라난 것일까. 케빈은 악마이기 때문에 악을 저질렀을까.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은 케빈의 악마성 때문일까, 에바가 나쁜 엄마였기 때문일까.

아빠 프랭클린이나 (엄마에게만 모든 희생을 강요하는) 비뚤어진 모성신화를 만들어온 이 사회에는 책임이 없을까. 케빈이 점차 악마가 되어가는 도중에, 그것을 막아낼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악마를 만들지 않기 위해 인간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어디까지 가능할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내내 떠나지 않는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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