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儀典)'의 사전적 의미는 '행사를 치르는 일정한 법식'이다. 처음엔 외교 영역에서 사용되던 용어였다. 외교부 의전장을 지낸 백영선 전 대사는 "의전은 프로토콜(protocol)을 번역한 단어"라며 "공증 문서 맨 앞장에 붙인 표지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국가 간 외교에서 지켜야 할 규범으로 확장됐다"고 설명한다. <의전의 민낯>의 저자 허의도는 의전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임을 강조한다.

"국제적 외교 관계에서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베풀면 상대방이 거기에 맞춰서 새로운 걸 베풀어주고. 그 격을 맞춰 나가는 방식이 의전입니다."

타인에 대한 상식과 배려에서 출발했던 의전. 그런데 현재엔 서열, 접대, 아부를 의미하는 단어로 변질됐다. 지난 20일 방송된 < SBS 스페셜 > '레드 카펫, 의전과 권력 사이' 편은 충성과 아부의 도구가 된 과잉 의전, 직장 내에서 펼쳐지는 익숙한 의전의 현장들을 조명했다. 환대와 수발 사이, 의전과 권력 사이, 우리 일상에서 '의전'은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의전은 각종 행사 등에서 행해지는 예법이기에 물론 필요하다. 문제는 의전이 행사의 목적을 훼손하는 데 있다. 과도한 의전은 오히려 행사의 격을 떨어뜨리고 전체의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피해를 낳기 때문이다.

방송은 지난 9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열린 제1회 강화섬포도축제 개회식을 소개했다. 개회식 무대 앞 객석 중앙 자리는 군수, 시군의원 등 내빈을 위해 비어 있었다. 자리의 배치만큼이나 내빈 소개도 개회식 의전에서 중요하다. 시대가 변한 만큼 간소화한다고 노력했지만, 소개한 내빈의 수는 25명에 달했다. 다음엔 축전과 축사가 이어진다.

포도 농사를 지은 농민과 지역 주민, 관광객이 어우러진 행사이지만, 그들은 중심에서 밀려났다. 의전은 그저 높은 분들을 위한 수단이며 순서대로 얼굴도장을 찍으며 서열을 확인하는 장치다. 이준의 의전전문가는 우리 사회는 의전에서 순서, 자리, 주변을 따진다고 말한다.

"인사말을 하거나 축사를 할 때, 몇 번째로 되느냐는 '순서'를 가장 많이 따집니다. 두 번째는 어느 '자리'에 앉느냐는 걸 가지고도 많은 다툼이 있으시고요. 세 번째는 앉는 자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누가 앉느냐는 것까지도 따지십니다."(이준의 전문가)

장관, 시도지사, 여야 정치인들이 민생 현장을 탐방할 때에도 과잉 의전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어 < SBS 스페셜 >은 지난 9월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열린 제19회 국제 연안 정화의 날 행사를 조명했다. 당시 논란에 휩싸였던, 과잉 의전에서 비롯된 보여주기식 행정의 대표적인 사례다.
 
 < SBS 스페셜 > '레드카펫, 의전과 권력 사이' 편의 한 장면

< SBS 스페셜 > '레드카펫, 의전과 권력 사이' 편의 한 장면ⓒ SBS

 
진도군청은 해양수산부 장관, 전라남도 부지사, 주한 외교 사절 등이 참석하는 행사를 위해 이미 수거한 해양 쓰레기를 전날에 몰래 바닷가에 가져다 놓는 자작극을 벌이다가 발각돼, 군수가 공식 사과하는 촌극을 빚었다. 행사에 참여했던 고등학생들은 "그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행사", "장관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진도군청 관계자들을 질책한다.

재난 현장을 방문하는 자리에서도 정, 관계 인사들에 대한 지나친 의전으로 눈살이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어 방송에 등장한 지난 9월 서울시 동대문구 제일평화시장 화재 현장 역시 그랬다.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방문하는 일정을 위해 소방관들은 방화복 차림을 한 채로 이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정자세로 도열해 있었다. 고작 악수 한 번 하고 격려사를 듣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진정 소방관을 위한 일일까?

과한 의전으로 인한 소동이 정치인, 관료 사회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크고 작은 의전을 행하며 살고 있다. 국가 간 외교 의전이 권위와 수직적 서열 관계를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와 만나 윗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과 권력 남용을 상징하는 갑질이란 기형적인 형태로 토착화되었다.

일상의 의전은 식사 메뉴 고르기, 엘리베이터 타는 순서, 자동차에 앉는 자리, 회식 문화 등에 깊이 자리 잡았다. 권상집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 기업의 의전 문화를 '윗사람 심기 관리용'이라 꼬집는다.

"엘리베이터에서 정문까지 몇 걸음 내에 걸어가야 하는지, 시간은 몇 분 소요되는지 그런 것들을 (직원들이) 다 알아서 챙기거든요. 전체 구성원의 입장보다 최고경영자의 심기가 더 중요한 거죠."(권상집 교수)

'일의 실패는 용서할 수 있어도 의전의 실패는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과잉 의전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유는 무엇일까? 방송에 등장한 한 대기업 전 직원은 "위의 지시가 아닌, 밑에서 알아서 이뤄지는, 잘 보이고 싶은 것"이라고 진단한다. 일을 잘하는 것보다 의전을 잘해야 인사에 도움이 되고 평가를 좋게 받는다는 이야기다.

한번 자리를 잡은 의전은 관행으로 남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전임이 후임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의전 매뉴얼을 전수하고, 내가 윗사람에게 했던 만큼 받아야겠다는 보상 심리가 합해지며 과잉 의전의 악순환은 반복된다.

윗사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의전이자 예의로 받아들여진 상태에선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뤄지기 어렵다. 잘못된 결정에 대해서도 이의 제기를 하는 것이 힘들다. 한국의 한 대기업의 프랑스 현지 법인장을 역임한 프랑스인 에리크 쉬르데주는 의전을 앞세우는 한국 기업 문화 때문에 중요한 의사 결정에 문제가 생기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이야기한다.

"제품 출시에 앞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의 본사 사장이 이미 출시를 결정했기 때문에 한국인 엔지니어들은 그에게 제품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제품이 잘 작동하지 않아 소비자들이 실망하거나 결함이 있는 제품으로 인해 직원들의 불만이 생길 위험을 생각하기보다 사장의 체면을 지켜주려고 한 거죠."(에리크 쉬르데주)

이처럼 실제 업무보다 상사에 대한 의전을 더 신경을 쓰면 회사의 경쟁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서열주의의 계단에서 과잉 의전이 행해지면서 정보 교환은 제한되고 소통은 차단 당한다. 제왕적 의전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재들이 떠나면서 조직은 점점 추진력, 창의성, 혁신과 멀어지게 된다.

지금 의전은 서열주의, 상명하복의 동의어와 다름이 없다. 제작진이 만난 한 회사원은 의전을 "자발적으로 우러나서 하는 거면 예의, 슬슬 눈치가 보이면 과잉 의전, 강압적인 분위기라면 갑질"이라고 정의한다. 박소연 국제행사전문가는 '수발'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 SBS 스페셜 > '레드카펫, 의전과 권력 사이' 편의 한 장면

< SBS 스페셜 > '레드카펫, 의전과 권력 사이' 편의 한 장면ⓒ SBS

 
"젊은 세대가 의전에 대해서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문제는 '의전'은 괜찮은데 '수발'이 문제에요. 만약에 (어떤 일을) 시켰는데 그 직원이 하는 행동을 가족들이 본다고 했을 때, 얼굴이 화끈거리면 '수발'이고요. 괜찮으면 '의전'입니다."(박소연 전문가)

< SBS 스페셜 > '레드 카펫, 의전과 권력 사이' 편은 다양한 의전 실패를 보여준다. 과잉 의전이 어떻게 조직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지를 살펴본다. 상대를 존중하고 소통을 강화하는 좋은 의전은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과잉 의전의 악순환을 끊는 건 상대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위치가 높을수록 권위를 내세우거나 무례하게 갑질을 하기 보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자신을 낮출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의 품격은 의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우할 줄 아는 태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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