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4주년, 한일 갈등 및 일본 제품 불매운동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광복'의 의미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그러나 7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반일'을 외쳐야만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는 지난 74년의 현대사를 어떻게 살아왔길래 오늘날까지 '반일'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3.1 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특집방송들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지난해 광복절부터 '역사의 빛 청년' 특집을 이어오고 있는 EBS <다큐 프라임>의 방송분은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8월 15일 방송된 '역사의 빛, 청년' 1부 '프롤로그: 하와이 애국단을 찾아서' 편에서 <다큐프라임>은 미국 하와이 동포들의 독립 운동을 조명했으며 이어 2부 '영산에 살어리랏다'에서는 경남 창녕군의 작은 마을 '영산'에서 시작된 23인의 독립운동 결사대를 통해 3.1운동이 어떻게 전국적으로 확산됐는지 짚는다. 또한 3부에서는 박재혁, 김익상, 김지섭 등 1920년대 일제에 자신을 던져 항거했던 20대 청년들의 활약상을 주목했다. 그리고 4부 '무라이의 안경' 편에서는 윤봉길 의사 후손과 그의 폭탄에 희생된 일인의 후손의 만남을 통해 '사과와 화해'의 방향을 모색하기도 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독립 운동가 유일한 
 
 < EBS 다큐프라임 - 100년의 가르침, 청년의 꿈>

EBS <다큐프라임> '100년의 가르침, 청년의 꿈' 편의 한 장면ⓒ EBS

 
어느새 7부를 맞이한 <다큐 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 시리즈는 우리가 몰랐던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등장시킨다. 아니 몰랐던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바로 유일한 박사다.

우리에게 기억된 유일한 박사는 1전의 추징금도 물지 않을 만큼 깨끗하게 회사를 운영한 기업인이자, 기업을 세습하지 않고 전문경영인이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든 사람이다.

<다큐프라임>은 바로 그 존경받는 기업인 유일한의 또 다른 독립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밝혔다. 1971년 3월 11일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나신 유일한 박사의 유언장은 지금까지도 세상에 회자된다. 그는 보유 주식 14만 941주를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 기금에 기증했다. 이미 만연해진 재벌가의 세습 관행과 달리, 유일한 아들 유일선씨에게 대학을 졸업했으니 자립하라고 한 것이다. 아직 대학을 나오지 못한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 1만 달러(한화 약 1200만 원)를 지원하는 것으로 유산의 몫을 다 했다. 이는 당시 신문 사회면에 대서 특필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참 기업가의 모습이었다. 올곧은 기업가 정신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그 유래를 <다큐프라임>은 유박사의 '독립 정신'과 '실천'에서 찾는다. 

"암호명 A는 한국인이다. 나이는 50세, 한국에서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열정적인 애국자이고 수십년간 한국에 엄청난 부와 시간을 쏟아부었다." OSS 서류 속 인물은 바로 유일한 박사였다. 유 박사는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기연씨는 불과 9살의 나이에 유일한을 미국으로 보낸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 입양되어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란 유일한은 낮에는 농장일, 방학이면 신문 배달을 하며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여 네르래스카 고등학교에 입학한 개교 이래 최초의 동양인 유학생이 된다. 

원래 이름이었던 '유일형'을 '세계 제1의 대한민국'이란 뜻의 '유일한(柳一韓)'로 개명한 소년은 1909년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교해서 독립 전쟁 지휘관의 꿈을 키운다. 1919년 서재필이 소집한 1차 한인 회의에 참여해 한국 독립의 열망을 알리는 데 동참했다. 1942년에는 재미 한인으로 구성된 한인 국방 경비대를 창설을 주도하고, 1945년 5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내 진격을 위한 OSS 작전에 참여하여 강도 높은 군사 및 첩보 훈련을 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이후에는 6.25 전쟁을 겪고 다시 재건과 발전에 앞장섰다.

방송 전까지 할아버지의 독립 운동에 대해 몰랐다던 손녀 유일링씨는 많은 유산을 남겨주지 않은 할아버지에 대해 실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 유일선씨 역시 미국 유학을 마치고 아버지가 만든 회사에서 평생 일했지만 퇴직 후 외려 자신에게 책정된 퇴직금이 너무 많다며 퇴직금 반환 소송을 냈다. 아버지에 이어 강직하고 청렴한 가풍을 이어나간 것이다. 도대체 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교육이 어땠기에 이런 선택이 가능했던 것일까. 

성공 도구, 돈, 직위를 물려주면 자신의 역량을 최대로 발휘할 인물이 될 수 없다. 한 사람이 최고로 강인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만의 방법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유일링씨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인생 수업이라고 한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유일한 박사의 인생 수업 
 
 EBS <다큐프라임> '100년의 가르침, 청년의 꿈' 편의 한 장면

EBS <다큐프라임> '100년의 가르침, 청년의 꿈' 편의 한 장면ⓒ EBS

 
유일한 박사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단다. 할아버지의 유지 덕분일까. 유일링씨는 예일대 심리학과에 들어갔지만 대학 사격팀의 첫 여성 주장이 되었으며, 이제 캘리포니아 레드블러프에서 총기 안전 교육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다큐 프라임>은 이처럼 물고기를 낚아 주는 대신, 스스로 낚을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 유일한 박사의 교육 방식을 오늘에 묻는다. 

초등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봤더니 다양한 대답이 나왔다. 운전하는 아빠의 모습이 좋아 택시 기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 홈런을 쳐서 놀라게 만들고 싶어 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는 아이, 싸움을 잘하니 군인이 되고 싶다는 아이, 자신의 가사를 직접 써보고 싶어 래퍼가 되고 싶다는 아이까지.

하지만 중, 고등학생만 되어도 대답은 달라진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안정적 직업을 위해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한다거나, 산업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만 역시나 공무원이 되어야 할 거 같다는 학생도 있다. 농부가 되고 싶지만 일정한 수익을 위해서는 교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대답도 나온다. 중, 고등학생 10명 중 7, 8명이 대학에 진학하려 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위해 교사, 공무원을 장래 희망으로 꼽았다. 그리고 그런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다름 아닌 부모들이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몸을 쓰는 일은 사회적으로 무시를 당하게 된다며 의자에 앉아서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강권한다. 아이들은 해 본 게 공부밖에 없으니 다른 꿈을 가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정작 대학에 들어와서야 아이들은 고민을 시작한다. 공부를 해왔는데 이게 내 미래에 맞는 건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 역시 학벌 위주의 사회에서 방황하기는 마찬가지다. 

네브래스카 고등학교에서 기술 교육을 받고, 미시간 대학에서 미국의 산업 발전을 눈으로 목격했던 유일한 박사는 일찍부터 기술 교육의 중요성을 알았다. 식민지 조국의 독립이 꿈이었던 청년은 스스로 대학에 가고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만들었던 원동력이 독립에 대한 의지였다. 청년은 해방 후 그 의지를 한국인들의 '더 나은 삶'으로 발전시켰다. 발전하는 미국의 산업을 경험한 후 1954년 1500평의 대지와 500만 원의 기금으로 한국 고등 기술학교의 첫 삽을 퍼올렸다. 실질적인 학문, 기술 교육이 국가 발전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대한 실천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퇴행적이다. 유일한 박사가 설립한 유한 공고를 다니는 청소년들, 그들의 선택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다. 공부를 웬만큼 잘하는데 왜 공고를 가냐는 주변의 걱정부터 인문계를 가야 한다는 부모들의 우려까지.
 
 EBS <다큐프라임> '100년의 가르침, 청년의 꿈' 편의 한 장면

EBS <다큐프라임> '100년의 가르침, 청년의 꿈' 편의 한 장면ⓒ EBS

 
현재 미국에서 로켓 기술을 선도하고 있는 피츠버그 카네기 멜른 대학교는 철강 기술자를 위해 부호 카네기가 만든 카네기 공업 학교에서 출발한다. 20세기 산업 기술 인재를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는 이제 21세기의 로켓 기술의 메카가 되었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가 마찬가지로 기술 입국의 꿈을 안고 만든 유한 공고의 학생들은 '왜 특성화고에 가느냐'는 편견에 시달리고 있을 뿐이다. 
 
기술 중심 교육만이 아니다. 자신이 공립 학교를 나왔던 유일한 박사는 억만 장자가 되었음에도 자녀들을 모두 공립학교에 보냈다. 손녀 유일링씨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공립, 라콜리나 독립 중학교를 나왔다. 특별하지 않게 여느 미국인처럼 이제는 사라진 악기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독립심을 키웠다는 유일링씨. 바로 그런 자산이 오늘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의 근원이 되었다 회고한다. 

정권이 바뀌고 교육 개혁이 시대의 화두가 된 지금도 특권적인 교육 방식은 유지되고 있고 개혁의 의미는 퇴색되고 있다. 이 시대 유일한 박사의 삶과 교육 방식은 74주년 광복절에 시의적절한 주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날의, 그 시절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본받고 이어받아야 할 그 무엇이 아닐까. 그리고 그 '무엇'에 가장 교감이 될 독립운동가로 유일한 박사만한 분이 어디 있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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